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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Apr 10. 2023

일찍 찾아온 고혈압을 받아들이는 5단계 마음

[내가 사는 40대] 같이 술 먹던 친구들이 슬슬 고혈압 환우가 된다.

내 앞자리의 나보다 한 살 많은 동료 직원이 기어코 고혈압 진단을 받아 약을 먹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비슷한 시기에 입사하여 40대 중반을 함께 달리고 있는 동료들이 하나 둘 고혈압 환우가 되어가고 있다.

그들에게 일찌감치 30대 후반부터 약을 먹기 시작한 나는 마음의 안정을 주는 존재다.


나는 고혈압 세계에 먼저 들어선 선배로서 그들을 자애로운 표정으로 바라본다.

고혈압 약을 먹는 것은 합병증을 미연에 방지하는 보약과 같은 것이니, 너무 심려치 말고 꾸준히 복용하시고, 약의 용량이 늘어나지 않게 앞으로 운동과 식이요법에 더욱 정진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도 선사한다.


지금은 그들을 보며 여유롭게 잘난 척을 하지만 처음엔 상당한 마음의 저항이 있었다.


30대에 고혈압 판정을 받으면 한참을 버티다가 약을 먹게 된다. 내 경우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에 뭔가 엄청난 것을 받아들이는 듯한 착각으로 청승을 떨었다.


인간이 상실을 받아들이는 5단계는 30대가 고혈압 판정을 받아들일 때도 겪을 수 있다.



STEP 1. 부 

감기 때문에 방문한 동네 내과에서 혈압이 많이 높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 시작이었다. 몸이 안 좋으면 그럴 수 있다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지만 감기가 다 낫고 나서도 혈압은 떨어지지 않았다. 집에 있는 아빠 혈압계로 하루에 다섯 번씩 혈압을 재면서 가장 낮게 나온 혈압을 내 혈압이라고 믿기로 한다.


그러면서도 걱정이 멈추지 않아 다시 동네 내과를 찾아갔다.

"을 먹어야 할 것 같은데. 너무 높네."

"아침에 일어나서 재보면 정상인데요? 그리고 이렇게 젊어서 먹는 거 괜찮아요?"

"아침에 깨자마자는 누구나 낮아. 조금 움직이면 올라가잖아. 그리고 젊으니까 더 먹어야지. 혈압이 높은 채로 세월이 흐르면 장기가 망가져."

어렸을 때부터 다니던 내과 선생님의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인정하지 않고 고집을 부렸다.


그 말씀을 무시할 배짱은 또 못돼서 결국 큰 병원 순환기 내과를 찾아갔다. 역시 혈압이 너무 높다는 얘기를 들었다.

다른 장기에 이상이 있어도 혈압이 높을수 있으니, 검사를 해보고 약을 처방해 주겠다는 의사의 말에 다른 장기에 이상이 있기를 바라야 하는지 없기를 바라야 하는지 헷갈리는 마음으로 다양한 검사를 받았다.


검사결과 장, 신장, 갖가지 호르몬 등 어느 곳에도 이상은 없으니 그냥 유전에 의한 본태성 고혈압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다른  안심이 되면서도 유전이라는 말에 빠져나갈 수 없는 패배감을 느끼며 결국 고혈압 환자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STEP 2. 분노

갑자기 살이 찐 것도 아니고 술 담배를 즐기는 것도 아닌데, 음식도 싱겁게 먹는데, 왜 내가 마흔도 되기 전에 고혈압이어야 하는지 상당한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서른여덟이나 마흔이나 큰 차이 없는 것 같지만 30대에 혈압약을 먹는다고 선언하면 주변에서 다들 많이 놀란다. 이런저런 검사 때문에 연차도 여러 번 썼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에 회사 사람들에게 나의 증상과 진단을 소상히 밝혔다.


곧이어 위로와 격려가 뒤따라는데 따뜻한 마음으로 건네는 그 말들이 괜히 짜증스러워지면서 온 세상에 불만을 품는 투덜이가 었다.


임원과 팀장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그들을 둘러보며 속으로 악담을 퍼부었다.

'강상무는 매일 소주를 두병씩 때려 붓는데 왜 고혈압이 아니지? 팀장은 하루에 담배를 두 갑씩 피우는데도 혈압약 안 먹네? 김 부장은  맨날 기름진 거 먹고 맵고 짠 것 아니면 입에도 안 대는데 그래도 혈압약을 안 먹는다고? 곧 다들 고혈압 되겠지? 그렇게 될 거야.'


선량한 얼굴에 미소를 띤 착하디 착한 중년의 동료들은 방실대며 인사를 건네는 내가 속으로 이런 악마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줄 꿈에도 몰랐을 거다.

 

STEP 3.  타협

약을 받아왔으면서도 이걸 계속 먹어야 하나 식이요법으로 미뤄야 하나 변덕이 죽 끓듯 했다.

어떤 날은 삼시세끼 샐러드를 먹었더니 혈압이 급격히 떨어졌지만 그렇게 계속 살면 스트레스 때문에 다시 혈압이 오를 것이 틀림없었다.


과거에 내가 했던 수많은 잘못들 떠올렸다.

'생각해 봐, 너 고기 먹을 때 상추도 안 싸 먹고 날고기만 소금에 찍어먹고 빵을 입에 달고 살잖아, 지금까지 먹은 믹스커피로 산을 쌓으면 올라가는데 반나절은 걸릴걸.'


그러니 이제부터 음식을 조심하면 약 먹는 것을 미룰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봤다. 하지만  받아온 약을 먹지 않고 합병증 걱정을 하지 않을 용기도 없었다.

결국 걱정병 환자는 그냥 의사 말을 잘 듣는 편이 건강에 좋은 거라고 나 자신과 타협을 끝냈다.



STEP 4. 우울

이제는 고혈압 환자임을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마음 울적하다. 이 우울함은 특히 순환기내과 앞 대기장소에 앉아있을 때 극에 달한다.


수많은 70대 노인들 사이에서 가장 나이 어린 환자임을 인식한다. 부모님의 보호자로 온 젊은이들 말고는 내가 가장 젊어 보이는 것을 매번 확인 때마다 씁쓸하다.


한편, 이제 약을 먹기 시작했을 뿐인데 고혈압으로 발생할 수 있는 후유증을 샅샅이 검색하면서 공들여 불안해한다.


참 가지가지 한다.

알고 보면 이 성격이 고혈압의 원인인 거 같은데 성격은 유전만큼이나 벗어나기 힘들다.


STEP 5. 수용

그렇게 저항기를 거치고 드디어 수용기가 찾아온다.

그래, 죽을병도 아니고 약 한 알씩 먹으면 되는 건데 뭐. 이 덕분에 운동도 하고 식이요법도 하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어. 오히려 바람직한 생활태도를 할 수 있게 경종을 울려주는 거야. 아, 나는 일찌감치 건강 적신호를 경험해서 더 오래오래 건강할 것이 틀림없어.


스스로에 대한 비난과 위로를 반복하며 고혈압 약 먹는 사람이라는 딱지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동생에게 약 통도 선물 받았다. 매일 먹어야 하는 약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일주일간 한 칸에 하나씩 넣어놓을 수 있는 일주일 약통이다.


일요일에 그 주의 마지막 약을 먹고 나면 차분히 앉아서 다음 주 약을 채운다. 한 개당 한 칸씩 채워 넣고 서랍에 넣어두면 뭔가 할 일을 마친 것처럼 마음이 단출해지기도 한다.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너무 다짐한 나머지 매일 혈압을 재서 기록할 수 있는 엑셀 파일을 만든 적도 있었다.

날짜와 시간별로 조로록 적힌 데이터를 보고 있자니 그래프가 만들고 싶어졌다. 엑스축과 와이축에 날짜와 혈압을 지정하고, 데이터 레이블을 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정신을 차다.

이 그래프를 가져다 의사 선생님에게 보여주면

'아, 당신이 왜 혈압이 높은지 이제 알겠군요. 꼭 유전 때문만은 아닙니다.' 할 것 같아 접었다.




이제 혈압약을 먹은 지 8년이 지나 매일 아침 눈 뜨자마자 약을 먹는 것이 습관이 되어 귀찮지도 않다.

혈압이 높기 때문에 음식도 조절하고 운동도 하려고 노력해서 오히려 컨디션은 30대보다 좋아진 것 같기도 하다. 


40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기초대사량이 줄어드는지 똑같이 먹고 움직여도 체중이 늘어나는 것 같아 운동량도 늘려볼 생각이다.


모이면 대화의 끝이 건강과 운동으로 수렴되는 40대이지만 아직 건강하고 젊다.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걸 알아차리는 것도 행운이다.

미리 약도 챙겨 먹고 평생 안 하던 운동과 식이요법도 하면서 더 오래 젊게 살 수 있도록 정비하면서 잘 사는 거다.


그래서 오늘 점심은 토마토와 당근, 사과와 블루베리와 그릭요거트로.

오후에 짠 거 땡긴다고 과자를 먹지 않을 것을 잊지 말자.

맛은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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