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가난하고 행복했던 군산 여행

야반도주하듯 떠난 군산 여행

by 춘춘

“일어나, 얼른 일어나.”

엄마가 동생과 나를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아직 깜깜한 밤이었습니다.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엄마가 건네주는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어요.

엄마는 뭐가 들어있는지는 모르지만 크지 않은 가방을 한 팔에 걸치고 손에는 머리빗을 쥐고 있었습니다. 세수도 하지 않은 채 나가자고 해서 어딜 가냐고 물었지만 그냥 빨리 나오라고만 했습니다.


빌라 계단을 내려올 때는 옆집 사라들이 깨지 않게 계단을 발소리 나지 않도록 조용히 밟았습니다. 도 트지않아 하늘 저 편으로 푸른 기운만 감도는 어스름한 새벽에 엄마를 따라 골목 어귀를 벗어나니 수퍼 앞 큰 길가에 아빠의 트레일러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트레일러는 너무 커서 아빠가 우리를 번쩍 올려 태워주었습니다.


“우리 어디 가는 거야?”

“놀러 가. 흐흐흐흐”

아빠의 트레일러를 타고 엄마, 나, 동생 네 가족은 군산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날의 아빠가 갈 출장지는 군산이었는데 여유가 좀 있었던 모양입니다. 문 여는 소리가 옆집에도 들리는 연립 주택에서 이른 새벽 옆집 사람들을 깨우지 않도록 야반도주하듯 집을 나선 것이었어요.


트레일러는 운전석까지 포함해서 3명이 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나 동생 중 한 명은 운전석 뒤에 있는 공간에 앉거나 누워서 가야 했습니다. 트럭 뒷 공간은 인기 좌석이었습니다. 보통 트럭 좌석 뒤에는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누울 정도의 공간이 있습니다. 모노륨 가게를 하던 삼촌들의 1.5톤 트럭을 얻어 타고 갈 때도 그 공간에 쏙 들어가서 다리를 펴고 앉아서 가는게 너무 재밌었거든요.


콘테이너를 싣는 아빠의 트레일러는 삼촌들 트럭과는 비교도 안되게 좌석 뒤 공간이 엄청나게 넓었습니다. 꼭 붙어 누우면 두 명은 누울 수 있었습니다. 거기엔 아빠가 숙박을 해결할 때 필요한 이불이 얇은 것부터 두꺼운 것까지 여러 개 쌓여있었습니다. 홀로 가는 길 위에서 쉴 때마다 아빠의 무료함을 달래 줄 책들도 수북했습니다.


여행이래 봤자 차 안에서 있었던 일 말고는 거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가족 모두 한 차에 타고 종일 달리면서 수다를 떠는게 무척 재미있었던 생각만 납니다.

아빠는 계속 운전을 하고, 우리는 놀며 자며 그렇게 몇 시간을 가다가 끼니때가 되면 어딘가 식당에 내려서 밥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쉬었다가 또 달렸어요. 아마도 거대한 트레일러였기 때문에 일반 승용차보다 속도가 느렸을 겁니다.


군산 바다는 전에 가 봤던 만리포 해수욕장 같은 백사장이 있는 해안가가 아니었습니다. 방파제가 길게 바다와 맞닿아 있었고 부둣가 여기저기 크고 작은 배들이 많았습니다.

놀러 온 사람들보다는 일상생활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바쁜 중에도 적막해 보였습니다. 낯선 바다마을의 모습이 아름다우면서도 이상하게 슬펐던 느낌이 떠오릅니다.


올라가는 길이었는지, 저녁이 되어 잘 곳을 찾기 위해 휴게소에 정차했습니다. 아빠는 휴게소에 딸려있는 숙소를 예약하겠다고 들어갔고 우리는 차 안에서 아빠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엄마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엄마가 좌석 의자를 몇 번 접었다 폈다 하고 나니 차 안에 그럴듯한 잠자리가 마련됐습니다.


“여보, 방 잡았어. 들어가자.”

“여기서 자면 돼. 내가 이불 다 깔아놨어.”


운전석 뒷자리를 깔끔히 정리하고, 좌석을 바짝 접어 놓고, 아빠의 이불들을 보기 좋게 깔아서 네 식구가 잘 자리를 마련해 놓은 엄마를 보며 아빠가 웃었습니다.


“그래 그럼 그러지 뭐. 방은 취소하고 올게.”

그렇게 차박을 했습니다. 아늑하고 따뜻했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다음날 아침은 도로 위였어요. 눈을 떠보니 차는 달리고 있었고, 동생도 깨 있었습니다. 트레일러 안에서 우리 네 식구는 번갈아 생각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엄마가 바윗고개 같은 노래를 불렀던거 같아요.


나는 버스든 승용차든 오래 차를 타면 멀미를 해서 먹은 것을 토해내는 편이었는데요. 아빠의 트레일러는 높아서 밖이 훤히 보였기 때문인지, 덜컹거림이 재밌어서인지 그 오랜 시간을 타고 가도 멀미가 전혀 나지 않았습니다.


그날 군산은 어린 시절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아련하고 행복한 여행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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