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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Dec 30. 2023

#25. 생활계획표는 매일 지켜질 수 없어.

다시 내 경로로 돌아오기 위해.

방학이 시작되면 스케치북에 동그란 원을 그리고, 그 안에 하루 일과를 계획했다. 

컴퍼스로 정성껏 그린 동그라미를 정확히 24개의 부채꼴로 나누어 시계모양을 만든다. 분량을 조금이라도 더 가져가는 시간대가 없도록 철저히 원을 조각냈다. 각각의 시간대는 그날 해야 할 일들로 채워져 간다. 큰맘 먹고 방학숙제에는 두 시간을 주고, 식사는 한 시간만 배정한다.


아침 7시 기상

8시 아침식사

9시 독서

10시 운동

11시 산책

12시 점심식사

1시 방학숙제

3시 학원

5시 놀기

7시 저녁식사

8시 가족과 대화

9시 TV 시청

10시 취침


대충 이런 패턴이었겠다. 우습게도 방학 생활계획표는 거의 국민학교 내내 비슷했다. 그때 만든 것들을 보지 않아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을 장담할 수 있다.


방학마다 색연필로 열심히 칠해가며 만들었던 이 생활계획표는 안타깝지만 지켜질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막상 그 시간이 되면 뭘 어떻게 할 지 구체적인 행동 지침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운동은 왜 매번 일정에 끼어있었던 걸까. 나는 국민학교 시절 내내 운동이라는 이름을 건 행위를 정식으로 해 본 적이 없다. 밖에서 뛰어놀기 정도가 근육과 관절을 자극하는 운동이 되었겠지만 그것은 한 번도 운동이라고 불린 적이 없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황당한 계획 '산책'

'엄마 나 산책하고 올게.'

이런 단어를 써본 일은 단 한 번도 없다. 아마도 교과서 모범 사례에 산책이 들어있었고, 계획표의 부채꼴 중 하나를 채울 수 있는 그럴듯한 활동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계획을 세워도 지켜지지 않는 것은 게으름 때문만은 아니다. 계획이 구체적이지 못해서 뭘 실행해야 할지 방향을 잡아주지 못하기 때문일 때가 더 많다.


어린 시절 생활계획표를 지키지 못했던 것은 내가 의지 박약한 어린이여서가 아니라 계획 자체가 막연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9시 독서라고 적었다면 방학 동안 무슨 책을 읽을지 어느 정도 정해놨어야 했다. 그래야 9시가 딱 되면 그 책을 펼칠 수 있다. 10시에 운동을 하고 싶다면 줄넘기인지, 훌라후프인지, 놀이터 두 바퀴 뛰기 인지 적어놔야 할 맛이 난다. 하긴, 국민학생인 나는 사실 운동이 하고 싶지 않았으니 애초부터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주현이랑 고무줄 하기' '마당에서 애들이랑 비행접시하기' 이런 것들을 적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 시절을 잘 못 보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보통의 어린아이는 그 정도 계획밖에 세우지 못한다. 나는 보통의 어린이였고, 누가 알려주지 않았으므로 그게 내 한계였다. 그것은 지켜지기 위해 만들어졌다기보다 계획이라는 것을 세워보는 첫걸음마 연습정도의 의미였다. 실패한 날들은 꼭 필요하다.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계획을 세우고 지킬 수 있는 법에 눈을 뜨고 있다. 수많은 실패한 계획을 거쳤고 유용한 정보를 받아들이며 조금씩 지혜로워졌다고 생각한다.


해야 할 일들을 먼저 늘어놓고, 나의 시간 속에 그 일들을 집어넣어 준다. 가까운 미래의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지금의 내가 안내해 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획은 모두 지켜지지 못한다.

내가 아무리 탄탄한 미래 안내를 해 두어도, 나의 컨디션, 가족의 컨디션, 뭐든 예측할 수 없다.



12월에 들어서서 좋은 다이어리를 준비했고, 펼쳐지는 시간 속에 내가 들어가서 뭘 할지 꼼꼼히 적어두었다.

그럭저럭 계획대로 맞아 들어가는 날들을 보내며 통쾌했는데, 이번주에는 아들이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 고열로 하루는 학교에도 못 갔고 이삼일간 아팠다. 옆에서 보는 나도 똑같이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다. 한시도 쉬지 않고 돌아가는 세상이 전해주는 우울한 소식들도 무기력에 한몫을 했다.


다이어리에 계획된 할 일들은 해치워질 때마다 머리에 체크 표시를 달게 되는데 이번주에는 대부분의 To do list들이 보기 좋게 머리에 빨간 표시를 달았다. 빨강은 못한 일들.



예전에는 이런 날들을 '망친 날'로 분류했다.

아침 7시에 기상하지 못하면 그날 하루는 생활계획표 꼴도 보기 싫었던 것처럼 애써 세운 계획을 초기에 지키지 못하면 은근한 패배감에 무기력했다.


요즘 들어 그 망친 날들의 명예를 지켜주고 있다.

아들이 아파 최선을 다해서 걱정하고 신경 쓴 날, 몸이나 마음이 지쳐 무리하지 않고 쉬어간 날, 재밌는 창작 드라마로 충전한 날.

핑계 같은가? 뭐 어떤가. 나를 기운 나게 하면 되는 일이다.

어찌 보면 망친날 이란 없다.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을 뿐.



그럼 계획을 왜 세우는 걸까? 예상과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날이 거의 없는데 탄탄한 계획이 무슨 소용인가? 더구나 애를 낳고 엄마라는 이름을 달고부터는 계획대로 되는 날보다 뜬금없이 끼어드는 일로 틀어지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럼 나는 왜 매일 계획을 세우지?



성공상상

매일 아주 작지만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을 성공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고, 그 성공을 미리 상상하고 싶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상상이 지켜지면 성공이다. 점심시간 1시간 동안 영어공부를 하고 싶어서 계획했는데 지켜지면 성공이다.


하루는 아무것도 안 해도 흘러간다. 정해진 것들을 무의식적으로 해 나가면서도 멀리서 나를 끌어당기는 목표를 향해 가기 위해서 계획을 하고 지켜지는 상상을 한다.


계획은 목적지로 가기 위한 지도다. 혹시 예상치 못한 일들이 나를 끌고 가더라도 해결하고 다시 내 경로로 돌아오기 위해. 그래서 계획을 세운다.


흐트러진 몸과 마음을 다시 잘 정비하고, 목적지를 한번 더 바라보고.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을 알더라도 다시 계획을 세운다. 혹시 틀어져도 빨간 표시된 못한 일들은 다른 시간에 배정하면 된다.

무기력한 마음은 딱 한 가지 일을 해내고 나면 다시 발동이 걸린다.


이상, 4일간 끌려다녔던 나를 다시 제자리도 되돌리기 위한 마음정리였다. 발행을 누르고 나면 다시 발동이 걸릴 것이다.



*이 글은 헤드라잇에 동시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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