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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Jun 22. 2024

내 말이 무거워지는 나이   

나를 보살펴 마음을 키운다.

“감기는 밥상 밑으로 숨는단다.”

“징징대면 될 일도 안된다.”

“환자가 의사를 믿으면 약 봉다리만 달여 먹어도 낫는단다.”


이 나이까지도 삶의 크고 작은 걸림돌을 넘을때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말들이 불쑥 떠오른다. 수많은 말씀을 하셨겠지만 나의 결정적 순간과 맞아 떨어진 말은 머리와 가슴에 콕 박혀서 인생에서 비슷한 일을 겪을때, 표어처럼 귓가를 맴돈다.


그들은 절대로 몰랐을 것이다. 그때가 나의 결정적 순간이었음을, 자신들의 말을 딸이 수십년간 기억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나도 그랬으니, 아이를 기르면서 무심코 뱉은 내 말이 저 아이에게 오래 남을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언제 어디서 하는 말이 그렇게 될지 부모는 잘 모른다. 그래서 함부로 말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자식에게 어릴적 부모의 말은 강렬하지 않아도 때에 따라 지워지지 않는 흉터처럼 자국을 남긴다.



40대가 넘어서면서 내 말의 무게가 무거워짐을 느낀다. 

부모로서의 말이 가장 무겁지만 다른 입장에서 뱉은 말도 예전처럼 가볍지 않다.

내 삶의 대들보 같았던 부모님은 일흔이 넘었고, 이제 몸도 마음도 나약해졌다. 나는 예전처럼 투정을 담아 투덜댔을 뿐인데 늙은 부모는 마음을 다친다.


퉁명스럽고, 그러면서도 시원시원하고, 욕도 잘하는 우리 엄마도 요즘은 툭하면 볼을 늘어뜨리고 주눅든 표정을 짓는다. 옛날 같으면 내가 쏘아붇이는 말에 ‘지랄하네.’ 한마디로 넘어갔을 거면서 이제는 마흔 넘은 딸의 핀잔에 속이 상하나보다.

여려지고, 내게 기대고 싶어하는 부모에게 이제는 함부로 말하지 않아야한다. 성질대로 한 내 말에 마음이 상한 부모 얼굴은 하루 종일 떠 올라 목에 걸린 가시처럼 괴롭다.


회사에서의 40대는 중간관리자 역할을 한다. 내가 하는 시덥지 않은 말이 띠동갑 부하직원의 다이어리에 적힐 수도 있다. 그저 웃으라고 하는 농담에 긴장하며 열심히 답을 주는 사람이 있다면 앞으로 그런 농담은 하지 말아야 한다.


동년배인 친구들도 모두 저마다의 삶의 무게를 어깨에 지고 산다. 낯설어지는 신체 변화에 당황하고, 오락가락하는 호르몬 탓에 마음도 갈팡질팡이다. 각자 자신을 추스리기 힘든 날들이 많아질수록, 전 같으면 슬렁슬렁 웃으며 넘어갔을 친구의 말이 비수처럼 꽂힌다. 생각없이 가볍게 한 말 한마디로 좋은 관계가 망가지기 십상이다.


가장 가까이 있는 동년배는 배우자다. 사회적으로도 가정에서도 혼란스러울 나이를 같이 지나고 있다. 어떤 날은 투정을 부리고 싶고, 이유없이 짜증나는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런 날들엔 상대가 나를 배려해줬으면 하지만 그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서운하고 외로울 뿐이다.



나를 조금씩 늘려가야 한다.

무엇보다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실수 투성이다.

감정 콘트롤이 안돼서 아이를 불필요하게 나무라고, 신경을 거스르는 동료에게 참지 못하고 싫은 티를 내기도 한다. 불쌍하게도 그저 옆을 지나가던 남편이 대뜸 화풀이의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실수한 날은 자책감 때문에 머리를 방바닥에 딱 붙이고 꼼짝도 하기 싫다. 밤새도록 술먹고 삽질을 했더라도 강의를 빼먹고 대낮까지 자버리면 대충 해결되었던 건 스물세살때까지였다.

지금은 다 꼴보기 싫어도 꾸역꾸역 일어나서 또 일상과 맞서야 할 때다. 수습하고, 감당하고, 다시 시작하는 수 밖에 없다.


에너지는 쓰기만 하면 고갈되기 마련이다. 나를 채워줘야 말도 행동도 골라가며 사용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내가 맡아야 할 역할들은 가끔씩 너무 무거워서 나를 조금씩 깎아 먹는다. 그 무게를 튼튼하게 지탱하려면 나를 조금씩 늘려가야 한다.




나 보살피기 1. 좋아하는 것들을 할 시간 따로 떼어놓기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방해받지 않고 좋아하는 것들을 할 시간을 갖는다.

한창 바쁘던 30대에는 소설책을 읽고 있으면 마음이 불편했다. 읽어야 할 육아서적과 자기계발서들이 밀려있는데 순전히 쾌락을 위해 소설을 읽는 것이 시간을 허투루쓰는 짓 같았다. 요즘은 소설책 읽기만큼 기운을 주는 것도 없다. 주말에는 가볍게 추리소설 한편을 뒹굴면서 읽고, 오랜만에 긴 호흡의 한국 소설들도 찾아서 보려고 한다.


내가 사랑하는 드라마도 열심히 본다.

이십대까지 나는 드라마의 여왕이었다. 고등학교때도 월화수목금토일, 요일 별 드라마들은 꼭 찾아봤다. 새로운 드라마가 시작되면 볼까말까 나에게 조언을 구하는 친구도 있을 정도였다. 한동안 시간이 없어서 보지 못했던 드라마를 다시 보기 시작한건 직장맘으로 육아에 지쳐있을 때였다. 주말 새벽에 일어나 혼자서 조용히 드라마를 보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곤했었다.


최근에는 숨어서 새벽에 보지 않고 드라마 볼 시간을 따로 잡는다. 이번 달에는 저녁에 먹을 야채찜을 준비할 때, 주말 이동시간에 tvN드라마 '졸업'을 열심히 본다.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안판석 PD가 연출한 지난 작품들과 졸업을 비교하며 수십년전 드라마를 기억하는 나 자신을 기특해한다.



나 보살피기 2. 마음 달래기


마음을 키우고 안정시키는 책은 따로 있다.

심리학자들이 쓴 '자존감 수업', '당신이 옳다', '미움받을 용기' 같은 책들이나, 무라카미 하루키, 남인숙, 데일카네기 같은 작가들의 에세이를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골라서 읽는다.

아, 내가 이 책을 읽었을때 그런 일들이 있었지, 하며 기억을 더듬는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들이 그때는 왜 그리 힘들었을까, 그런 마음이 들면 지금의 괴로움도 나중에는 하찮아질 것이라고 안심을 한다. 몇 번을 봐도 읽는 순간의 마음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사춘기 아들때문에 힘겨울 때는 십년 전 읽었던 육아서적을 다시 꺼내 읽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선생님들의 말은 응급처치같은 효과가 있다. 유아기 사춘기 육아는 통하는 것들이 있는데, 방법은 다르지만 아이를 보는 바람직한 마음가짐은 비슷하다. 다 알고 있는것 같아도 다시 찾아 펼쳐보면 내가 줄쳐 놓았던 문구가 새로워 놀란다.

사춘기를 대비하기 위해 사춘기용 육아 서적도 준비해 놓았는데 이것도 울화가 터질때 도움이 된다. 특히 김붕년 선생님의 책과 영상은 수강료를 내고싶을만큼 값지다.


유튜브에서 보는 자기계발 강연은 마음의 감기약처럼 즉각 효과가 있다. 괴로울 때는 법륜 스님을, 힘을 내야 할 때는 김미경 강사님을, 인간관계가 피곤하면 남인숙 작가님을, 이것저것 다 잊고 재밌는 얘기가 듣고 싶으면 설민석 선생님을 찾아서 강의를 듣는다. 혼자서 추스릴수 없을 때는 병원에 가는 것처럼 누군가의 도움을 쉽게 받을 수 있는세상이 되었다.



나 보살피기 3. 새로운 경험 해보기


생전 예술이라고는 공부한 적도 없고, 이해하지도 못했는데 최근들어 전시회도 자주 가고 클래식 음악도 듣는다.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도 가보고, 음악회 티켓도 비싸지 않은 것을 찾아 예매했다. 음악과 미술은 나와는 관련 없는 장르였는데 자꾸 좋아지는 것이 신기하다. 아마도 예술이 주는 위안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효과를 미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장소가 주는 힘이기도 하다. 전시회장 가운데 서 있을 때, 공연장에서 무대를 바라보고 있을 때, 나는 전혀 다른 세상에 서 있다.

내가 속해있는 세상을 훌쩍 떠나 온 기분은, 나를 누르고 있던 고민들을 저만치 떨어져서 보게 만들어준다. 이렇게 커다란 세계 속 일부일 뿐인 나의 일상이 작아보이고 나의 고민은 더 작아보인다.





내 말이 무겁고, 역할이 많아졌다는 것은 내가 전보다 중요한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더 많아졌고, 내가 할수 있는 일들도 많아졌다. 무게가 더해진 내 위치를 잘 버티기 위해서 나를 잘 먹이고 입히고 달래려고 노력중이다.


그런 일들을 의식적으로 하다보면 나 스스로가 좋아진다. 남들에게 너그러울 수 있는 가장 좋은 상태는 내가 나를 좋아할 때다.


자꾸 끼어들어오는 가족 걱정, 일터의 고민, 인간관계의 고단함을 내려놓고 딱 나만 보살피는 시간. 그 시간이 있어야 말도 행동도 현명하게 할 수 있고, 내 삶의 무게도 거뜬히 지고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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