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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Nov 13. 2024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마지막은 갑자기 와

피검사를 하고 진료를 기다리는 동안, 아저씨는 오후에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차근차근 정리했다. 만나기로 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두고, 저녁나절에는 동생 집에 들러서 시골에서 올라온 감자를 받아오기로 했다.

밤 새 술을 먹고도 너끈히 새벽 출근을 하던 예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병원에 온 김에 피로 회복제도 처방받고, 앞으로 몸 관리도 좀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이름이 불리는 소리를 듣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진료를 마친 후 아저씨는 바로 입원 안내를 받았다. 긴급하게 추가 검사를 해야 해서 집에 들를 시간 없었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입원 물품들을 가지고 오라고 하면서도 아저씨는 오늘 오후에 만나기로 한 종로 3가 의료기상 김사장을 잠깐 보고 올 수는 없을까 고민을 했다. 워낙 까다로운 사람이라 약속을 취소하면 또 무슨 변덕을 부릴지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팠다.

꼼짝없이 병원에 붙잡혀서 48시간 동안 검사를 받은 후, 오후 늦게 무슨 무슨 급성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당장은 수술할 상황이 아니라며 약물치료에 바로 들어갔고, 아저씨는 다음 주까지 잡아 놨던 약속들을 모두 취소했다.


나는 아저씨를 그전 계절에 만났었다. 아저씨가 우리 동네 지하철 역까지 할머니 약을 전해주러 오신다고 해서 내가 받으러 나갔다. 표 값을 아끼기 위해 우리는 지하철 개찰구 앞에서 만나 개표기기를 사이에 두고 약을 주고받았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잘 있었냐, 많이 컸다.

일, 이년에 한 번이나 볼까 말까 한 아저씨는 코트를 입고 목도리 같은 것을 목에 걸치고 있어 우리 아빠와 달리 사업가 느낌이 났다. 만날 때마다 너는 심지가 다, 단단해 보여, 이런 추상적이고도 기분 좋은 말을 해주곤 했다


아저씨는 따지고 보면 나와 아주 먼 사이라 장례식장에는 가지 않았다.

다만, 그때 지하철역에서 만났을 때 다시는 아저씨를 볼 수 없게 될 줄은 몰랐다.



정정하시다가 넘어지시는 바람에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신 친척 어르신의 장례식에 다녀오며 수십 년 전 아저씨 생각이 났다.


아주 어렸던 시절에도 마지막은 종종 갑자기 찾아왔다. 매일 만나던 피아노 선생님이 인사도 없이 그만둬버렸다는 소식을 들었던 순간에도, 지난주 선생님께 레슨 받던 그날이 우리의 마지막이었구나, 생각했다.

작별인사가 익숙하지 않던 국민학생들은 전학 가기 전날  나 이사가, 한마디로 뜬금없이 안녕을 고하곤 했다.


하찮은 마지막은 거의 매일 찾아온다.

어제는 자주 가던 만두 가게 앞에 크게 임대구함이라는 플래카드가 붙은 것을 보았다. 지난번 튀김만두와 라볶이를 먹던 중에 분식집에 어울리지 않는 닭볶음탕 메뉴가 눈에 들어왔다. 닭볶음탕은 미리 주문을 해 놓아야 가능한 메뉴였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다음에 닭볶음탕을 먹어 보자고 계획을 세웠었다. 라볶이가 이렇게 맛있는 걸 보면 닭볶음탕도 맛있을게 분명하다는 이유였다.  만두가  집에서 먹는 마지막 만두인 것을 알았다면 김치 굴림 만두도 시켜 먹었을 텐데.

좋아하던 카페의 망고빙수 메뉴가 사라진 것을 확인했을 때도 그랬다. 너도 그날이 마지막이었구나. 주문대 앞에서 몇 초간 망고를 감싸고 있던 연유와 치즈가루를 잠시 떠올렸다.


점도 메뉴도 영원할 수는 없기 때문에 먹을 수 있을 때 마음껏 먹고 즐겨야 한다는 간단한 원리는 모든 관계에 통용되는 거라고 수첩에 한 줄 써 본다. 앞으로 겪어내야 할 수많은 먹먹한 마지막들을, 수 초 이내에 사라져 버릴 망고빙수와의 이별 같은 가벼운 마지막과 동등한 위치에 둘 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는 작곡가가 정말 서른 즈음인 시절에 썼다고 한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모든 관계는 이별을 피할 수 없다는 진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 나는 마흔이 훌쩍 넘어서인데 이 사람은 참 일찍도 깨달았구나.


눈 부신 노란 은행잎이 탐스럽게 붙어있는 나무의 모습도 올해는 이번주가 마지막일듯 하다. 오늘도, 내일도 점심 산책을 빼먹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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