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열여섯 소년 책 읽히기
80년대 말에는 국민학생에게 과학도서 독후감 방학숙제를 주는 것이 유행이었나 보다. 고학년 때는 방학 때마다 과학도서를 한편씩 읽고 독후감을 썼다. 아마도 6학년쯤이었을 것 같다. 책 제목은 '인공두뇌'였다. 어린이 소설치고는 꽤 묵직한 주제에 스토리도 복잡했다. 사람의 두뇌를 분리하여 동작하도록 하는 기술이 존재하고, 주인공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사건으로 인해 몸을 잃고 두뇌만 남아 주변에 벌어지는 일들을 인지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마지막에는 사랑했던 여인의 두뇌와 의식상태로 만나게 되고, 고생 끝에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을 수 있게 되어 두 연인이 평화롭게 세상을 떠나는 장면으로 소설이 마무리되었다.
당시 몸을 가지고 있던 주인공이 두뇌만 가지고 깨어났을 때, 의식은 또렷하지만 몸의 어떤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상태를 상상하며 온몸이 답답했던 기억이 있다. 마지막에 두 연인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내 마음이 평온해졌던 것도 생각난다.
김영하 작가의 작별인사를 완독하고 책장을 덮으며 인공두뇌가 떠올랐다. 사실 읽는 중간중간 삽 십여 년 전 어린이 과학소설을 읽던 내 감정이 오버랩되기도 했다.
AI가 채 놀랄 시간조차 주지 않고 발전하고 있다. 지금 인공 지능이 생성하는 오류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 저녁에 해결될 수도 있다고 한다. 그 속도 또한 인간이 예측할 수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인공지능을 주제로 한 소설과 영화들은 공포와 걱정을 불러와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곤 한다.
이 책은 읽는 내내 이상하리만치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로봇이 지배하는 세상이 그렇게 끔찍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인류의 멸종은 반딧불이의 멸종만큼이나 그럴 수 있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깨달음 같은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무기력과는 좀 다르다. 그렇다고 일론머스크가 원망스럽다거나 한 치 앞의 이윤만 추구하느라 비대한 욕심을 품고 자기 머리에 총구를 겨누는 줄도 모르고 인공지능을 개발시키는 거대 과학자 집단에 대한 분노가 치밀지도 않는다. 사람은 그렇게 생겨먹은 존재이고 그 이면에 또 로봇이 추구하지 못하는 어떤 것을 가진다는 생각을 담담히 받아들이게 된다.
은하철도 999의 철이를 떠올린 것이 작가의 의도와 다를지 모르나, 의도했든 아니든 철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기계인간이 되고 싶어 은하철도 999에 탑승한 철이는 결국 인간으로서의 삶과 죽음의 가치를 깨닫는다. 자신이 인간이 아님을 알고 충격에 휩싸인 작별인사의 철이 또한 결국은 죽음의 의미, 끝이 있어야 하는 삶을 선택한다.
작별인사의 철이는 철이를 만든 과학자 아버지에 의해 '철학'에서 따온 철자를 사용하여 철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철이의 아버지는 유능한 인공지능 과학자이나, 발전하는 인공지능 기술은 갖고 싶으면서, 기계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고 싶기도 한 딜레마에 빠진 인물이다. 지금 인공지능의 초고속 발전을 두려워하는 인간들이 가진 모순을 대표하는 인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두려움 없이 인공지능을 개발해 내거나, 폭력으로 휴머노이드를 파괴하는 인간에 비해 선한 영역으로 속하는 것 같으나, 결국 철이를 만들어내어 인간의 인간적 모습을 영속시키려는 의도는 그 자체로 비인간 적이다.
소설은 초기부터 아버지의 존재에서 뜨거운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모호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철이를 찾으려는 그의 의지도 결국 자신이 만든 존재를 아들로서 사랑했다기보다 자신의 발명품을 소유하고자 하는 집착으로 표현된다. 운동을 하러 나간 아버지가 비에 맞을까 걱정되어 우산을 들고나갔을 때 기특하게 여겼던 것은 아들의 배려를 받은 아버지의 감동이 아닌 인공지능 아이의 공감능력을 확인한 경탄이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이런 비 인간적인 모습은 독자로 하여금 슬픔보다 안도를 느끼게 만든다. 제목을 보고 아버지와의 뜨거운 작별을 기대했던 나의 생각은 말끔히 사라지고 질척한 슬픔을 각오하지 않아도 되어 오히려 산뜻했다.
프로그래밍된 대로만 행동하고 발전하리라 생각했던 철이 아버지 최박사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만다. 로봇들은 우주를 탐험하고 싶은 강한 의지마저 가지게 되어 인간이 갈 수 없는 우주 먼 곳까지 정복한다. 뜨겁고 차가워 목숨이 달린 인간은 경험할 수 없는 그 어떤 행성도 도달하여 정보 획득이 가능해진 것이다. 로봇이 탐구욕구까지 갖는다면 인간과 로봇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
철이의 소멸을 통해 우리는 인간 고유의 가치를 확인하고 안도한다. 자신이 휴머노이드인 것을 알면서도 유일하게 인간적으로 대해주었던 선이를 찾기 위해 철이는 다시 원래의 몸 형태를 복구한다. 그리고 늙어가는 선이를 만나게 된다. 선이가 형성한, 보통의 기준에 속하는 인간이 아닌 이들로 이루어진 커뮤니티 안에서 철이는 가장 인간적인 시절을 살아가고, 결국 인간이 세상을 마무리하듯이 스스로의 의지로 생을 마감한다.
어쩌면 인류는 그런 식으로 멸종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가 SF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기계의 폭력에 의해 학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선택한 방식으로 우리의 몸을 포기하고 정신만을 이어가는 형태로 인간이 아닌 기억으로만 남게 되는 형태이다.
소설의 초반부를 읽으면서 익숙한 방식의 전개와 전형적인 AI 세상의 모습을 그린 조금 가벼운 공상과학물이라고 생각했었다. 김영하 작가의 새로운 시도 정도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설은 후반부로 갈수록 가치를 발휘한다.
인류의 멸종이 슬프지도 두렵지도 않다. 지금의 추세대로라면 가장 현실적인 결말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죽음이 얼마나 삶을 가치롭게 해주는 것인지, 따분할 수도 있는 주제와 가르침을 건조하면서도 분명하게 가르쳐준다.
김영하 작가의 작품은 20대에 읽고 한동안 읽지 않았다. 젊은 작가의 신선함에 끌려 단편을 여러 편 읽었으나, 너무 어두운 장편 소설들은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올해 초,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은 것은 아들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읽은 작가의 소설은 명성만큼이나 흥미로웠고, 아들을 끌어들이기 적당해 보였다.
육아하면서 집착하지 말자고 노력하지만 책을 읽히고 싶은 욕구는 누르기가 어렵다. 어차피 교훈적인 책이나 청소년 소설은 억지로 읽힌다고 읽히지 않으니 흥미를 끌면서 책장을 잘 넘어가게 만드는 책들을 미끼처럼 들이밀게 된다.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은 그런 면에서 훌륭했다. 독특한 주제에 술술 읽히는 작가의 문장은 예상대로 십 대 소년의 흥미를 강하게 끌었다.
책을 좋아하는 이들의 경험담은 그런 것들이 많다. 어떤 강렬한 책 한 권을 흡입하듯 읽고 나서 책이 좋아지고 독서를 즐기는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그러나 그런 경우가 흔치는 않은가 보다. 아들은 몇 권의 책을 재밌게 읽었지만 아직까지 그 강렬한 한 권을 만나지 못한 것인지 스스로 책을 붙잡고 읽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번엔 김영하 작가의 다른 소설을 권해보았다. 살인자의 기억법을 재밌게 읽어서인지 흔쾌히 읽겠다고 했다. 읽는 속도가 빠른 내가 먼저 읽고 넘겨주었다.
지금 아들은 첫 챕터를 읽었다. 중간에 조금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는 부분이 있겠지만 결말이 궁금해서라도 다 읽을 것이다.
책을 꼭 읽어야만 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왜 책 읽기를 강요하느냐,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도 내가 좋은 것을 권하는 것이 부모의 욕심이니, 나는 그 욕심을 버리기 어려워 앞으로도 이 짓을 꽤 오래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