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을 지배하는 것은 일상을 바로 세우는 것에서부터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공산주의 국가가 된 소련에서 로스토프 백작은 인민위원회로부터 가택 연금이라는 형을 받는다. 대부분의 귀족들이 사형당했으나 혁명적인 행동을 한 이력을 인정받은 백작은 자신이 머물던 메트로폴 호텔에 갇혀 목숨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호텔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나오면 총살이다.
호텔 스위트룸에서 쫓겨나 하인들이 머물던 작은 방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 백작은 마흔이 채 되지 않은 젊은이였다. 남은 생을 호텔 안에서만 살아야 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생활, 숨이 막혀오는 듯한 답답함과 무기력을 느낀 백작은 자살을 기도한다.
그 순간 누군가의 의도치 않은 도움으로 고향 동네의 사과나무향이 나는 벌꿀을 맛보게 되고 백작은 다시 살아남기로 결심한다. 일을 하는 것은 신사가 할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귀족 생활을 뒤로하고 백작은 메트로폴 호텔의 레스토랑 웨이터 일을 시작한다. 파티에 온 손님을 접대하고, 분위기를 파악하고, 참석한 사람들의 취향을 배려하는 데에 소질이 있었던 백작의 역량은 호텔 웨이터로서도 탁월하게 발휘되었다.
그 후 삼십 년 동안 축소된 세계 같은 호텔 안에서 백작은 수많은 일을 만들고 겪어가며 생을 성실히 살아낸다.
호텔에 연금된 후 백작이 멈추지 않고 한 일은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배정된 볼품없는 작은 방을 기차 여행 중에 묵었던 공간으로 상상하며 안락하게 꾸민다.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서재를 만들고,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가벼운 운동과 스트레칭을 한다. 호텔 밖으로 한걸음도 나갈 수 없지만 호텔에 비치된 신문을 빠짐없이 읽는다. 자신에게 허락된 만큼의 자유를 즐기며 친구들을 만들어간다. 소설은 특별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독특한 이야기를 통해 사람이 살면서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것은 아주 작은 일상의 규칙이라는 보편적인 가르침을 준다.
책은 매우 두껍다. 여름휴가 때 가져가서 읽기 시작한 지 3주가 다되어 완독 했다. 매일 저녁 야금야금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신기하게도 그 두꺼운 책이 단 한 부분도 지루하지 않았다. 긴 세월을 다뤘고 다양한 에피소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지 않을 만큼, 앞에 뿌린 떡밥들이 기억에 남는 것은 작가의 필력 때문이리라.
제정 러시아와 볼셰비키, 소비에트 연방 그리고 주변국가들에 대한 기초 지식이 있으면 더 재밌게 읽을 수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이야기 자체에 매력이 있다.
한편, 작가는 미국인으로 오랫동안 미국 금융업계에서 일을 하다가 중년의 나이에 소설가가 된 사람이다. 그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에서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소련과 대립되었던 미국인의 시각에서 봤던 볼셰비키의 모순, 소련 정부의 폐쇄성에 대한 비난이 기본으로 깔려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성급히 소설에 완전히 몰입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로스토프가 추구하는 정의가 변질된 것은 아닐까, 짧은 고민이 들었다. 그 부분은 제정러시아의 부패, 구 소련의 역사와 사회상을 제대로 공부하기 전에는 섣불리 판단할 수 없으니, 당시 상황이 보여주는 모순에 집중하는 정도에 머물기로 했다. 공산주의는 이상적인 이론이고 결국 인간세상에서 유지되기 어려운 실패한 이념이라는 것이 검증된 것이니 그 안에서 벌어졌던 모순적 상황은 사실에 근거한다고 본다.
소련, 모스크바라는 독특한 시공간적 배경에 끌려 책을 펼쳤고,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고 생을 관조하며 일상을 유지하는 삶에 대한 동경이 마음 가득했다. 개인의 일생, 사회, 역사적 사건이 개인에게 주는 파장, 적과 나의 경계, 교육, 사랑 등 작가는 삶의 모든 면을 훑어보고 싶었던 것일까. 역사적 사실을 차용하였으나,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모습을 통해 개인과 일상의 소중함을 깨우치는 것, 이 책의 가장 큰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쩌면 내일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재치를 잃지 않고 도리를 다하면서 기념일은 나름대로 챙기는 백작만큼이나 아기자기한 에피소드와 웃음이 쿡 나오는 유머러스한 분위기가 한층 소설을 사랑하게 만든다. 로스토프 백작, 안드레이와 에밀, 안나, 소피야, 그밖에 백작의 친구들. 인물의 매력이 물씬 풍겨나 다 읽고 나서도 등장인물들과 헤어지기 싫었다. 오랜만에 잠을 미뤄가며 읽은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