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내 일정을 내 맘대로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피곤하다고 투덜대던 임신기간만 해도, 놀고먹고 자고 내 마음대로 했는데 떡하니 내가 낳아놓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인 인간이 내 옆에 딱 붙어버렸다. 나를 통째로 조종하는 존재가 생겨버린 것이다.
더구나 이 존재는 감정적으로도 나를 지배하여,태어난 그날부터 한날한시도나에게서 정신적으로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회사에 출근하면 몸은 떨어져 있지만 정신은 온통 그 존재에게 가 있게 되었다.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걱정되고, 좀 쉬려고 하면 죄책감이 느껴지고, 혼신의 힘을 다하자니 지쳤다.
아기가 어느 정도 커서 기어 다닐 무렵, 각자 보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한 우리 부부는 결단을 내렸다. 평일에는 회사에 다니니 미안한 마음에 주말에 딱 붙어 있어야 한다는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기로 했다. 혼자 있을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주말 이틀 중 반나절씩 각자 '주말 자유시간'을 갖기로 했다.
주로 토요일에 행해졌는데 오전에 자유를 누리는 자는 새벽 몇 시에 나가던 상관없다. 무조건 집에서 탈출한다. 점심을 혼자 먹고 들어온다.
오후에 자유를 누리는 자는 점심을 먹고 나가서 저녁을 혼자 먹고 들어온다.
그리고 다음날은 함께 아이를 돌본다.
이 제도는 우리 부부에게 생각보다 훨씬 훌륭한 육아 생활의 달콤함을 가져다주었다. 약 4시간 정도의 자유시간에 우리가 하는 것은 대부분 커피숍에서 죽치기였다. 다른 일을 해도 좋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 친구를 만나도 좋지만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혼자 조용한 곳에 가서 혼자 밥을 먹고 책을 읽던지 영화를 보던지 노닥거리다가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싹 세척되는 것 같은 상쾌함을 느꼈다.
'주말 자유시간'은 평일의 고단함을 덜어내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회사에서 지칠 때, 저녁에 아이를 보며 힘들 때, 주말에 나 혼자 있을 시간을 떠올리면 목구멍이 가르르대는 작은 웃음이 새어 나오며 가슴이 살짝 '두근' 하기도 했다.
토요일 번갈아 자유를 갖고 나서 다음날 함께하는 일요일은 에너지가 충전된 듯 활기에 넘쳤다. 평일에 회사에 가 있는라 아기를 못 보는 것과는 다르게 주말에 아기와 몇 시간 떨어져 있는 것은 또 다른 애틋함을 가져다주었다. 미안한 마음은 갖지 않기로 했다. 부모가 행복해야 아기도 행복하다는 원칙을 철저히 믿기로 했다.
실은, 이 제도를 도입하기 전에 나는 남편보다 조금 더 고민을 하긴 했다. 아기를 오롯이 남편에게 맡기는 것이 상큼하게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숙달된 엄마는 아니었지만 남편은 더 어설펐다. 사실 본인은 전혀 어설프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랬다. 아기가 울면 바로 달려가 주면 좋겠는데 밍기적 거리고, 우유 먹이는 것도 불안정해 보이고, 뭔가 내가 하는 것보다 아기를 좀 더 불편하게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기를 낳고 몇 달 동안은장시간 아기를 아빠에게만 맡기지는 않았었다.
어느 날 피치 못할 사정으로 주말에 외출을 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몇 시간 남편 혼자 아기를 보게 되었고, 나는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발길이 떼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가 다 알아서 한다는 남편을 내심 못 미더워하며 볼일을 보고 들어왔는데 아기와 남편이 생각보다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히려 나처럼 안달복달하지 않고, 편한 마음으로 아기와 시간을 보낸 남편은 에너지 소모도 나보다 덜 한 것 같았다.
앞으로 계속 아기를 함께 키울 텐데 아빠도 아기와 단 둘이 있는 시간을 수월하게 보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과감하게 주말 4시간은 남편이 완전히 아기와 있어도 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단, 아기를 옆에 놓고 TV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모습은 좀 참아주어야 한다. 어쩌겠는가, 어차피 나와 함께 평생 아기를 키울 사람인데 계속 떨어뜨려놓을 수도, 남편을 개조할 수도 없으니 나라도 아이와 있을 때 TV와 스마트폰을 보지 않기로 혼자서 합의를 했다.
그렇게 주말 자유시간을 누리면서도 나만의 시간에 대한 나의 갈증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시간을 더 확보하고 싶었다.
짜고 짜 보니 내가 유용할 수 있는 시간은 점심시간이었다. 회사의 점심시간은 동료들과 밥을 먹고, 대화도 나누는 한 박자 쉬는 시간이다. 식당가가 조금 멀어서 다 같이 차를 타고 이동을 하고 들어오면 점심시간 한 시간이 꼬박 지나간다.
이 동료와의 시간을 희생하기로 했다. 수다도 떨고 바람을 쐬는 대신 나 혼자 도시락을 먹으며 '혼자 점심시간'을 갖는 것이다.
쉽지는 않았다. 한 명씩 돌아가며 왜 밥을 나가서 먹지 않느냐, 다이어트하는 거냐, 질문공세가 들어왔다. 같이 밥 먹던 동료들에게 조금 미안하기도 했고, 너무 오랜 시간 질문을 받으니 피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 시간을 지키기 위해서 자잘한 비난과 관심은 이겨낼 필요가 있었다. 내가 다른 사람과 밥을 먹기 싫어서 도시락을 싸오는 것은 아니므로 조금 번거롭더라도 물어오는 질문에는 성의껏 답해주었다.
'나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아기를 낳고 나니 하루가 너무 정신없이 지나간다.'라고...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둥, 대체 왜 그러냐는 둥 이견이 많았지만 주변 사람들도 차츰 적응해 갔다. 아기가 있는 동료 중에는 나처럼 도시락을 싸오거나 점심을 사다 먹는 사람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혼자 점심시간'에 나는 주로 공부를 한다. 처음에는 좀 쉬고 놀기도 하려고 했는데 어렵게 얻는 시간은 더 알차게 보내고 싶어 진다. 이젠 왜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오래 해서 즐거운 영어공부를 한다. 영어 책을 읽거나 미드를 본다. 이 역시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오~ 뭐야, 점심에 영어공부하는 거야?"
"그거 하면 뭐 좀 나아?"
"영어공부하세요? 대단하신데요."
한 사람이 한 마디씩 해도 하루에 대여섯 번은 듣는 말이었다. 성가시기보다는 민망했다. 이렇게 매일 공부해도 늘지 않는 영어실력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챌까 봐 전전긍긍했고, 영어 잘하는 신입 사원들에게 내 공부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래도 그냥 했다.
어차피 내가 여러 가지를 포기하며 얻는 시간인데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하며 보내고 싶었다.
주말 자유시간은 아기가 서너 살 되던 해부터 거의 시행하지 않고 있다. 지금은 아이가 많이 커서 같이 주말을 평화롭게 보낼 수 있으므로 주말 자유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혼자 점심시간'은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느 정도 지켜 나가고 있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TF로 발령이 나서 다 같이 움직여야 하는 중에도 나는 '혼자 점심시간'을 최대한 지켰다.
팀원은 식구이고, 식구는 같이 밥을 먹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TF 팀장의 권유에도 꿋꿋하게 내 자유시간의 중요성을 설명해 주었다. 생각이 다른 주변 사람들에게 반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냥 생각이 다르다면 내 생각을 설명해주면 된다. 납득하고 하지 않고는 그 사람 몫이다. 짜증을 내거나 불편한 마음을 오래 갖는다면 자유시간을 갖는 의미가 없다. 당시의 TF 팀장도 완벽히 나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럴 수 있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로 내 '혼자 점심시간'을 지켜주었다. 매일 오늘은 뭘 먹냐고 물어보긴 했지만, 그 정도는 웃으며 답해줄 수 있었다.
삼, 사 년 전부터 나는 또 다른 자유시간을 확보했다.
바로 '새벽 두 시간'이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이 되니 조금 더 정신을 차리고 하루를 경영할 수 있었다. 저녁에 규칙적으로 잠자리에 들기 시작하니, 나도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저녁시간에 자유를 갖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새벽 두 시간'이다
매일 5시에 일어나기로 했다.
처음에는 5시에 일어나 눈감고 앉아서 이십 분을 그냥 흘려보냈다. 너무 졸렸기 때문이다.
졸린 몸과 마음으로 뭘 하는 것이 힘들어 멍하니 놀기도 하고, 다시 누웠다가 잠들기도 했다.
억지로 일어나긴 했는데 피곤함에 이 시간이 마냥 즐겁지는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새벽 빵 먹기'.
나는 빵을 엄청나게 좋아한다. 평생 먹은 빵과 믹스커피의 양이 너무 많아서인지 나는 30대부터 고혈압 약을 먹기 시작했다. 그래서 최대한 탄수화물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빵에 대한 갈망은 가시지 않는다. 아침에 먹으면 종일 움직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합리화를 하며 아침에 식빵 한쪽을 먹기로 했다.
눈뜨자마자 즐거운 일을 한 가지 넣어서 새벽을 즐겁게 만들기로 했다.
깜깜한 새벽에 노란 불을 켜자마자 토스터에 식빵을 넣는다. 차와 노릇하게 구워 쨈 바른 식빵을 쟁반에 받치고 책상 앞에 않으면 새벽시간의 품질이 달라진다. 늦잠 자는 날은 빵은 없다.
그냥 빵 먹고 싶어서 일찍 일어나게 된다.
작년부터 내 새벽시간을 남편이 침범하기 시작했다. 매일 신생아처럼 잠을 많이 자면서도 잠자는 시간이 너무 행복해서 줄일 생각이 없던 사람이었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자기도 새벽에 일어나겠다고 했다. 왔다 갔다 하는 남편이 고요한 새벽을 조금 부산스럽게 만들긴 하지만 이 시간의 행복함을 느끼는 남편을 보면 좋은 영향을 준 것 같아 내심 뿌듯하기도 하다.
'혼자 점심시간'과, '새벽 두 시간' 동안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한다. 그 시간에 엄청난 생산성이 있는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대가족과 부대껴 살면서 이나마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니 체력도 예전 같지 않다. 가끔은 '너무 빡빡한가, 지치는 걸까' 싶을 때도 있다. 그럴 때 조금 쉬어주고, 멍 때리는 시간을 갖기도 하지만 오래 쉰다고 피로가 풀리는 것 같지는 않다.
조금 부지런히 살려고 하고, 먹고사는 것 이외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으로 새로운 에너지가 충전되는 것 같다.
특히, 일하는 엄마로 사는 나에게 혼자만의 시간은 필수 영양소와 같았다.
가족은, 사랑하고 애틋하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지만 나에게 늘 휴식이 되어주는 존재는 아니었다. 안정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과 휴식이 되어주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가족을 더 사랑하고, 인생을 더 열심히 살기 위해서 나는 기꺼이 이기적인 자유시간을 가져야 했고, 앞으로도 '나만 생각하는' 이 시간들을 철저히 확보해 나갈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