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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춘 Mar 19. 2021

자식에 대한 의무와 욕심 사이에서

아이들 학교에서 임원을 뽑는 시즌인가 보다.

아들과 조카가 선거에 대한 대화를 제법 진지하게 한다.

"오빠, 회장 나갈 거야?"

"아니, 안나가. 너는?"

"나는 4학년이잖아. 회장은 5학년부터 나갈 수 있잖아."

"아, 맞다. 근데 난 5학년이어도 안나가."

"왜?"

"4학년 때 부반장 떨어졌어. 실망할 일은 안 하는 게 나아."


끼어들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실망하더라도 도전해 봐야지!"

"이번에 잘 될 수도 있잖아."

"선거 공약을 잘 짜 보면 어때?"

이런 말들을 할뻔했다.




반장선거 대화는 다행히 할머니들이 듣지 못하셨지만, 보통 아이들이 이런 얘기를 할 때마다 할머니들, 즉 나의 엄마와 이모는 매번 가르침을 주려고 하신다.

"용감하게 해야지. 나가서 말도 큰소리로 하고."


아, 나는 어렸을 때  '용감하게 해야지'가 정말 듣기 싫었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도 싫고, 주목받는 것도 싫은데 기회만 되면 자신 있게 앞으로 나가 잘하는 모습을 보여 주라는 어른들의 말이 싫었다.

게에 가서 물건을 바꿔 오라거나, 학원 선생님한테 불편한 얘기를 전달하라고 할 때마다 목구멍에 돌덩이가 걸린 것 같았다.


겁이 많아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 버스를 혼자 타지 못하는 나를 어딘가 모자란 것처럼 말하는 게 싫었다.

옆집 문이 잠겼을 때, 옆집 아줌마와 합심해서 옆집과 이어진 우리 집 구멍으로 몸이 작은 내가 살짝 들어가라고 할 때, 어두운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너무 무서웠는데 못하겠다니까 화를 내는 엄마가 내 친엄마가 맞는 건가 싶을 만큼 서러웠다.




자라고 보니 물건을 사고 바꾸는 것은 꼭 어려서 연습하지 않아도 다 하고 산다. 못하면 그냥 조금 손해보고 살면 된다.

버스 타고 지하철 타는 못하는 어른 없다. 모르면 물어보는 지혜가 생긴다. 길눈이 어두워서 늘 뚜벅이 내비게이션을 켜는 나도 대중교통 이용 못해서 불편한 일 없이 살고 있다.

겁이 많아서 무서운 영화를 못 본다 뿐이지 난도 높은 놀이기구도 잘 타고 대학 때는 번지점프도 해봤다.

성격이 활발하지 않아도 내가 필요할 때는 낯선 사람들에게 웃으며 말도 잘 건다.


한편, 발표 잘하기, 누구 앞에서나 또박또박 말하기, 어려운 일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기, 이건 어른도 잘 못하는 거 아닌가? 

학교와 회사를 수십 년 다니고 있지만, 발표할 때는 떨리고 실수한다. 환불이 불편해서 몇 만 원짜리 옷이 맘에 안 들어도 그냥 장롱 속에 넣어 놨다가 몇 년 후에 버릴 때도 있다. 낮에 어버버 대며 대꾸하지 못한 것이 잠자리에서 생각나 베개에 머리를 처박고 내가 내 욕을 하기도 한다.


자식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것.

예를 들어,

영양이 부족하면 잘 먹이고, 엄마를 그리워하면 함께 있는 시간을 늘려주고, 학교 숙제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책임에 대해 말해주고,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말로 표현하라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은 내가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사회성을 갖춘 인간이 되는 것, 적극성을 갖고 계속 도전하는 것, 서글서글한 성격으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 집중력이 높은 사람이 되는 것.

엄마인 내가 식을 이런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걸까?

이게 부모의 노력으로 될까?


자식에게 실패를 이겨내고 도전해야 한다고 말하려다 보니 조금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흔이 넘은 나도 못하는 것을 열두 살 아이한테 하라고 할 뻔했다.


내 자식이 뛰어나고 멋진 사람이 되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세상에 좋은 것들을 소개해 줄 수는 있다.

하지만 안타깝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식의 몫이다. 자식을 부모가 원하는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다. 중에 그들이 깨닫고 갖춰 간다면 감사할 것이고 안되면 받아들일 수밖에...


'바른 길로 인도는 것'과 '좋은 성향을 갖추라고 시키는 것'의 경계는 참 모호하다.

앞으로도 한참 동안 자식을 '키워야'하는데, 그동안 내가 의무와 욕심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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