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미국을 몇 번 가보지 않았지만 내가 가본 미국 도시 중 가장 멋진 곳이었다.
예쁜 건물들, 화창한 날씨, 포도밭과 와이너리, 랍스터, 인 앤 아웃 햄버거, 두툼한 스테이크와 초콜릿 공장.
그 출장을 떠올릴 때마다 '가족과 함께 꼭 한 번 더 샌프란시스코에 여행을 가봐야지'라는 생각을 한다.
물론, 어리버리 대던 나의 모습이 같이 떠올라 수많은 이불 발차기를 하긴 했지만.
국제공인 시험기관에 시험법을 배우러 가는 출장이었다.
규격에 맞는 평가설비를 견학하고, 그곳의 노련한 시험원들에게 어려운 부분을 물어보는 미팅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와 동행한 동료는 아버지가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신덕에 그곳에서 유치원 시절을 보냈고, 미국에 친척들이 살고 있어 수개월씩 미국 생활을 맛본, 미국이 익숙한 사람이었다.
물론 영어도 잘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나의 입장이 상상되지 않는가.
아마도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라면 조금은 이해할 것이다. 만일, 나 혼자 미국에 덩그러니 놓여있다면 손짓 발짓하면서 아는 영어를 다 끄집어내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아는 단어만 대충 던져도 상대방이 어느 정도 알아들으니까.
그런데 옆에 영어 잘하는 한국인이 나를 보고 있다면?
나는 영어를 한마디도 할 수 없게 된다.
갈 때까지는 좋았다. 현지 기관과의 정리도 동료가 해줬고, 현지에서 필요한 렌트며 숙소 예약도 모두 그 친구가 대화로 풀었다. 나는 몇 발자국 떨어져 그 과정을 지켜보며 미국 경치만 구경하면 됐으니 얼마나 편했겠는가.
아니다. 사실 편하지 않았다. 숙박과 교통은 맡기면 되지만 실제 회의 석상에서는 나의 영어실력이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 아니겠는가.
샌프란시스코의 꼬불꼬불 예쁜 길을 구경하다가도 다음날 있을 회의만 생각하면 '동작 그만'이 되면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회의 당일.
시험기관은 좋은 건물도 번화한 거리도 아닌 한가로운 전원의 농가 같은 곳이었다. 넓은 벌판에 아무런 꾸밈없는 단층 건물이 딱 하나. 그 안에서 사람들은 정형화된 방법으로 늘 같은 실험을 한다.
평화로운 건물 분위기답게 이직이 거의 없는 것인지 연구원들은 대부분 나이가 좀 들어 보였다. 50대 정도 돼 보이는 인상 좋은 연구원 두 명, 실험을 담당하는 그보다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이는 테크니션이 한 명.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의에 참석하신 분은, 노인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연세가 지긋하신 연구원.
실험의 구루(Guru)라고 할 수 있는 그분이 들어왔을 때, 나는 산타클로스를 연상했다.
하얀 얼굴, 하얀 머리, 적당히 보기 좋게 나온 배, 좋은 인상, 인자한 목소리. 그의 나이는 83세라고 했다.
'고문' 역할의 명예연구원이라는 그분은 유쾌한 표정으로 동양에서 온 젊은이들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셨다.
실험에 대하여, 업무에 대하여, 시험법의 원리와 요령에 대하여, 연구원으로써의 인생에 대하여.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내가 거의 못 알아듣지만 않았어도 나는 큰 깨달음을 얻고 왔을 것이다.
정말 거의 못 알아 들었다.
그나마 다른 분들은 짧은 문장으로 실험에 대한 얘기만 해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83세 실험의 구루는 온갖 은유법을 활용하여 조크를 섞어가며 이야기했고, 그 자리에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잦은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웃기는 웃었다. (농담 한두 개 정도는 알아들었는데 정말 위트 있어서 영화 대사 같았다.)
다행히 업무는 적절히 잘 마무리되었다.
회의를 마치고 연구원들과 악수를 할 때, 마음이 정말 홀가분했다.
하지만 친절한 노년의 연구원들은 먼 나라에서 배움을 위해 찾아온 젊은이들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았다. 늦은 점심을 대접하겠다며 자신들이 자주 가는 한적한 식당으로 안내했다. 현지인들만 가는 것으로 보이는 그 식당은 그림같이 예쁜 곳이었다.
우리를 비롯한 다섯 명이 함께 식사를 했다. 종업원은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나비넥타이에 조끼를 입은 상냥한 백인 남자였고, 같이 간 현지 연구원들에게 질문을 하거나 주문을 받을 때마다 "My friend"를 붙여주는 다정한 분이었다. 미드에서 보는 그런 장면이었다.
정말 이 사람들 친구인가? 잠깐 생각하며 메뉴판을 훑어보는데 그놈의 레이디 퍼스트 때문에 종업원은 나에게 가장 먼저 메뉴를 물어보았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비슷한 가격대의 간단한 음식인데도 나는 너무 오랫동안 메뉴를 고를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순간에 내가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냥 찍으면 될 것을 내 의지와는 별개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옆에 앉은 현지 연구원에게 무슨 메뉴가 맛있는지 추천을 해달라고 말했다.
내 질문을 받은 연구원이 조금 망설이며 자기는 '피시 앤 칩스'를 먹겠다고 했고 나도 같은 것을 주문했다.
그때 동료가 피식 웃었다.
왜 웃지. 내 질문이 이상했나. 추천을 원한 건 오바인가. 나보고 웃은 것이 아닌가?
그냥 두 번째로 싼 거 시키면 되지 뭘 얼마나 있어 보이겠다고 추천을 해달라고 했을까. 후회막심이었다.
식사를 하면서 간단한 대화가 오고 갔다.
"결혼하셨나요? 아이가 있습니까? 몇 살입니까?"
(사람 사는 게 거기서 거기네. 서양사람들은 그런 거 안 물어보는 줄 알았는데.)
"네, 4살이에요"
"그럼 아이는 누구와 있나요?"
"우리 엄마가 돌봐주고 있고, 킨더가든에 다녀요."
"아, 프리스쿨이에요."
같이 간 동료가 부연설명을 했다. 미국은 킨더가든이랑 프리스쿨이 다른가보다. 그냥 엄마가 봐준다고만 할 것이지 왜 킨더가든을 꺼내 가지고.
그 뒤로도 친절한 그들이 물어오는 별것 아닌 질문에 완벽한 답 문장을 생각해 내느라 반은 타이밍을 못 맞춰서 답을 못했다. 나 그런 사람 아닌데, 이놈에 언어가 나를 무뚝뚝한 사람으로 만드는구나.
식사를 거의 마쳤을 때, 나는 주문한 피시 앤 칩스를 반도 다 먹지 못했다.
맛은 있었지만 너무 양이 많았다. 나에게 메뉴를 추천해준 연구원이 혹시 맛이 없었냐고 물었고, 나는 과하게 손을 내저으며 맛있지만 배가 너무 부르다고 대답했다. 아임 풀, 아임 풀.
곧 종업원이 와서 후식으로 뭘 먹겠냐고 물어보았다. 이번에도 나한테 먼저 물어본다. 레이디니까.
그 순간 머릿속이 또 하얘졌다. 사실 전혀 먹고 싶지 않았다. 배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런데 문득, 이게 혹시 우리나라 세트메뉴처럼 식사에 포함되는 건가? 잠깐 갈등이 밀려와 조금 망설이다가 오렌지 주스를 달라고 말했다.
뒤이어 종업원은 'My friend' 들에게 디저트 메뉴를 물어보았고, 같이 간 연구원들은 당황스럽게도 모두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고 말했다.
아... 시키지 말걸. 쓸데없이 생각이 깊었다.
배불러서 다 못 먹겠다고 주문한 음식을 반이상 남겨놓고 주스를 또 시킨걸 이상하게 생각하겠네. 돈도 저쪽이 내는데.
다행히 같이 간 나의 동료가 콜라를 주문했다. 동료가 내 마음을 알아챈 것은 아닐까 또 곱씹어 생각했다.
주문한 음료를 마시고 우리의 식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친절한 미국인들은 마지막까지 둘러볼 관광지를 소개해 주었고, 나는 회의보다 더 힘든 점심식사가 끝났음에 감사하며 그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당시, 나는 영어학원을 다니고 있던 때라 이번 출장에서는 영어가 조금 편해지지 않았을까 약간의 기대도 있었는데 막상 외국인을 보니 간단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여간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몇 번 안 되는 대화중에도 당황해서 이상한 소리를 한껏 늘어놓은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에 열이 훅 끼친다.
후에 다른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줬더니 도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당황하고 부끄러웠던 거냐고 되려 물었다.
"야, 미국에 살았던 것도 아닌데 킨더가든인지 프리스쿨인지 알게 뭐냐, 그리고 백반집을 가도 이 집 김치찌개 잘하는지 된장찌개 잘하는지 처음 가면 물어보는 게 당연한 거 아냐? 또 배부르고 느끼하니까 오렌지 주스 먹었다고 생각하겠구만 뭘."
지금 생각해보면 뭐에 그리 주눅이 들고 당황했는지 모르겠다.
마흔이 넘은 지금은 30대 초반인 그때보다 여유가 생겨서 그런 걸까. 그저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될 것을 그때는 왜 그리도 내가 모자라 보일까 봐 불안해했는지.
그때의 나에게 그럴 필요 없다고 어깨를 토닥여 주고 싶다.
몇 번의 그런 경험을 겪고 나면 여유를 갖게 되고 나중에 보면 그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들은 니 영어에 관심 없다고. 못해도 흉보지 않고 흉봐도 별것 아니라고. 오히려 모른다고 솔직히 말하고 그 순간을 즐겼다면 한마디라도 더 들렸을 것이라고, 그리고 오렌지 주스 별로 안 비싸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