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조앤 롤링 (J.K Rowling)은 로버트 갤브레이스 (Robert Galbraith)라는 필명으로 성인용 탐정 소설을 냈다.
해리 포터의 후광 없이 평가받고 싶었던 작가의 비밀 작전은 언론의 참견으로 초창기에 실패해 버렸지만 아직도 로버트 갤브레이스라는 이름으로 책은 나온다. 네이버나 구글에 '로버트 갤브레이스'를 검색하면 바로 조앤 롤링이 뜨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의 첫 코모란 스트라이크 소설 Cuckoo's Calling 이 나왔을 때부터 2편 Silkworm, 3편 Career of evil까지 국내에 번역본이 발행되면 바로 구입해서 봤는데 어째 4편 Lethal white는 출시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국내 번역본이 나오지 않아서 답답하던 차였다. 벌써 5편 Troubled blood 도 작년에 출간되었다.
'그래, Lethal white도 원서로 한번 읽어보자'
작년부터 다니엘 스틸과 시드니 셀던의 소설을 열심히 읽었다는 이유로 잠시 자신을 과대평가한 나는, 읽고 싶던 이 책도 원서로 읽어보기로 한다.
종이책으로 원서를 사서 보려니 코로나 때문에 오래 걸린다고 하기도 했고, 가격도 파일에 비해 두 배가량 비쌌기 때문에 ePUB 파일을 구해서 크레마에 깔았다.
기다리던 책에 대한 기대감과 원서로 읽는다는 뿌듯함에 파일을 열었는데 열 페이지를 채 넘기지 못하고 자신감은 바닥을 치고 좌절이 밀려왔다.
그렇지, 한글로 읽어도 한 문장이 서너 줄이 되는 이런 소설을 어떻게 원서로 읽겠어.
아직 멀었구나, 다니엘 스틸이랑 시드니 셀던이 쉽긴 한가 보구나.
우선 단어가 너무 어렵다. 한 문장에 모르는 단어가 서너 개씩 나오면 내가 뭔 말을 읽고 있는지 모른 채로 멍하니 눈만 글씨를 따라간다.
그나마 단어는 그럭저럭 찾아서 본다 치고 더 큰 문제는 문장 구조가 굉장히 복잡하다. 한 문장의 길이가 엄청 긴 데다가 중간중간에 왜 그렇게 쉼표가 많은지.
주어가 나오고 나서 주어에 대하여 한참 부연 설명하다가 술어가 나오는데 또 그 뒤로 한참 늘어놓는 수식 문장을 읽다 보면 주어가 어디까지였는지 분간이 안 가서 다시 앞에서부터 읽기를 반복. 마침표가 대체 어디까지 가야 있는 건가 찾아볼 때도 있다.
아무튼 의기소침해졌고 Lethal white를 담고 있는 전자책까지 꼴도 보기 싫어져 포기해 버렸다.
포기했다가 궁금해서 다시 도전
이게 올 초 정도의 일이었고, 괜히 자만심에 어려운 소설을 붙잡은 것을 반성하면서 시드니 셀던 소설을 한 편 더 읽었더랬다.
그리고 나니 한 번 더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전작까지 너무 재밌게 읽어서 번역본이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데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았다.
'뭐 안되면 하루에 조금씩 몇 달에 걸쳐서 보면 되지 뭐. 그래도 로빈 결혼식장 장면은 대충 이해가 갔잖아.'
하루에 30페이지씩 읽기로 계획을 세웠지만 턱도 없었다.
점심시간 딱 1시간 이외에는 시간을 확보하기 어렵다보니 계속 진도가 밀려서 읽을 맛이 안 났다. 그래서 과감히 목표를 20페이지로 줄여보니까그런대로 1시간 내에 읽을만했다.
이번엔 지난번 포기했을 때와 달리 욕심을 버렸고, 한번 읽은 문장을 꾸역꾸역 몇 번이고 다시 읽고, 한 줄에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을 때는 따로 메모를 해가며 읽었다.
갑자기 킨들 오아시스 전격 구입
그렇게 크레마로 책을 읽던 중 느려 터진 사전 찾기 기능 때문에 더 진도가 안 나간다는 핑계를 만들어내 '킨들 오아시스'를 장만했다.
이건 Lethal white를 좀 더 효율적으로 읽어보자는 1번 이유와, 킨들을 사용하면 그날 찾은 단어를 메일로 바로 보내서 단어 공부를 더 적극적으로 할 것이라는 2번 이유에 근거한 구매였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데 거금을 들인 것이 왠지 꺼림직해 괜히 명분과 목적을 곱씹었지만, 굳이 저렴한 킨들 화이트를 두고 오아시스를 구입한 것만은 적절한 명분이 떠오르지 않아 그냥 갖고 싶었다고 당당히 말하겠다. 공부 열심히 할 것이다.
디자인이 너무 마음에 드는데 케이스를 씌워 버렸다. 이럴 거면 왜 굳이 비싼걸...
어쨌든 킨들로 읽으니 속도가 좀 더 붙긴 했다.
e북 카페에서 정보를 얻어 영한사전을 적용해 보니 구형인 크레마 카르타에 비해 단어가 뜨는 속도가 빨라 속이 후련하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뒤 페이지를 보고 돌아오는 것도 크레마에 비해 훅훅 빨라 마음에 든다.
아쉽지만 어려운 단어에 대한 힌트를 본문 위에 간략히 보여주는 킨들의 대표기능 'Word Wise' 기능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
일단 설명도 영어이고 (씁쓸하다) 행간이 너무 넓어져서 읽는데 방해가 된다.
신박한데 잘 안 써지는 Word wise 기능
킨들이 크레마와 다른 점 중 하나는, 기존 종이책의 페이지 수를 지키기 위해서인지 페이지 넘김 버튼을 눌러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도 페이지 수가 한 장씩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건 수정 방법이 있는데 내가 아직 못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면 25페이지를 읽고 한번 누르면 26페이지로 넘어가야 하는데 그대로 25페이지를 유지한다. 그렇게 3페이지 정도 읽어야 비로소 26페이지가 나온다.
그러니까 이 책이 651페이지짜리이지만 사실 내가 선택한 글자 크기로 킨들 화면상의 페이지는 1800페이지가 훌쩍 넘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크레마로 읽던 당시 하루 20페이지였던 나의 1일 목표는 킨들의 페이지 기준으로 10페이지로 바뀌었다.
다시 Lethal white로 돌아가서
플롯이 엄청 복잡하긴 하다. 끝까지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면 아무래도 그날그날 읽은 내용을 메모해 놓는 게 좋을 것 같다.
결혼 후 스트라이크와 서먹한 관계가 돼버린 로빈, 스트라이크를 찾아온 불안정한 남자를 둘러싼 사실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려운 과거의 살인사건, 런던 올림픽과 정치, 정치인들 간의 과거지사와 중간중간 죽은 사람들 이야기...
아직 3분의 1 정도밖에 못 읽어서 모두 미궁 속에 빠져있는 상황이다. 이후에 스트라이크의 헤어진 애인도 나온다고 해서 더욱 기대가 된다.
그나마 전작의 내용과 연결되는 부분들이 있어서 이해가 되고, 복잡한 설명을 반쯤 이해 못 해도 흐름을 따라잡을 수는 있어서 아직 다시 포기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백 퍼센트 이해가 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내용이 재밌어서 손을 놓고 싶지 않은 것은 역시 해리 포터를 만든 작가의 능력 덕분일 것이다.
정말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대충 읽고 넘기는 대목도 많다. 그럴때는 이 부분이 중요한 내용이면 어쩌나 걱정스럽고 이러다가 옛날처럼 이해도 못 하고 막 넘기는 읽기 스타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두려울 때도 있지만 두 번 이상 읽을 각오를 하고 맘 편하게 읽어보기로 했다.
이제 199페이지까지 읽었다.
하소연은 그만하고 다시 열심히 읽어보겠다.
의지가 약할 때는 과한 구매로 인한 죄책감에 질질 끌려가는 것도 중도 포기를 막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의외의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