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한 초록색 껍데기로 싸인 성문 기초 영문법은 당시 중학교 공부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교과서만큼이나 꼭 사야 하는 물건 중 하나였다. 뒤 이어, 구비해 놓지 않으면 큰 일이라도 날 듯이 성문 기본 영어와 종합 영어를 때에 맞춰 장만했다. 솔직히 말해서 저 책들을 한 챕터라도 제대로 공부한 적이 있었던가 싶다.
제대로 책을 본 적도 없으면서 성문 종합 영어를 사면 기본 영어는 안 사도 된다는 조언 따위에 엄청나게 고민을 하다가 세 권을 다 구비해 놓고 마음이 풍요롭기까지 했었다.
성문은 한물갔다며, 이제는 맨투맨이라며, 앞다투어 사들였던 맨투맨 시리즈도 있었다.
한 권 사서 공부 안 했으면 냉철하게 자신을 돌아봤어야 하는데 책꽂이에 고이 꽂아둔 기본 영어는 들춰보지도 않고, 일정기간이 지나면 종합 영어는 왜 그렇게 짝 맞추어 샀던 걸까.
뒤에 앉은 학생은 선생님 얼굴이 가물가물할 만큼 넓은 강의실, 낮은 천정, 쨍한 형광등 불빛인데도 푸르고 눈이 부셔 오히려 어둡게 느껴졌던 조명, 내가 기억하는 90년대의 대형학원의 모습이다.
그 큰 학원에서 선생님은 마이크를 들고 칠판에 예문을 써가며 성문영어, 맨투맨 영어를 강의했다.
방학 특강 단과반에서도, 밤늦게 셔틀버스로 학생들을 귀가시켜주는 대형학원에서도, 동네 보습학원에서 삼삼오오 모여 강의를 들을 때도 나는 '명사' '팔 품사'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문법책을 세워놓고 책머리면과 배면을 보면 맨 앞 약 1mm 정도만 새카만 손때가 묻어있었다. 영문법 책만 들고 다녔는데도 영문법과 담을 쌓는 아이러니한 고교과정을 마치고 다행히 대학에는 입학을 했다.
물론 대학에 가서도 영문법 공부를 제대로 한 적은 없는 것 같다. 토익 R/C 파트 찍기 요령을 익히면서 시험장에서 정확하지 않은 답의 번호를 느낌으로 선택하고는 빈틈이 있으면 오류가 날까 봐 연필로 정성껏 칸을 채웠던 것이 20대 영어문법 공부의 전부였다.
정답도 아닐 텐데 답안지 색칠 잘못할까 봐 뭘 그렇게 불안해했던 건지.
그렇게 하고 싶은 부분만 골라서 하는 반쪽짜리 영어공부는 당연하게도 늘 확신이 없었다. 어쩌다 영어로 말할 일이 있을 때는 내가 동사를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인지 자신이 없어 대충 어간 정도만 들리게 얼버무린 소리를 냈고, 영어 메일이라고 보내야 할 때는 비슷한 문구를 한참씩 찾아서 베껴 보내야 했다.
30대에 들어서 제대로 영어공부를 시작해보자 마음을 먹고 '뉴욕 의사의 백신 영어' 방법대로 소리 내어 읽기를 하다 보니 문법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딱 설명하기는 힘들었지만 문장의 구조가 이해되면서, 오래전 배울 때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던 문법이 이걸 말하는 것이구나 하는 희미한 깨달음 같은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영어교육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 중 순서가 뒤바뀌었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문법 공부가 쓸데없었던 것이 아니라 조금 나중에 배웠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하긴, 공부 안 하는 애들한테 뭘 먼저 가르치던 똑같이 안 하긴 했겠지만 그래도 제목이 한자로 쓰인 성문영어를 6학년 때 만나면 영어가 싫어질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본다.)
단어를 익혀서 어느 정도 내용 파악이 되면 그다음은 문장이 익숙해지고, 그 문장에서 문법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찾아보면 영문법과 들어맞는 것이 재미가 있었다.
그래도 기초가 너무 없었다. 그럼 학창 시절에 공부 잘하던 친구들은 이걸 다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어렸던 그 친구들 참 대단했다. 걔들은 좋은 대학 갈만했구나.
뭐, 서른 넘어서 십 대 때 공부 안 했던 걸 후회하면 무엇하랴. 지금이라도 깨달은 나를 기특해하자고 생각하며 문법 공부를 마음먹고 해 보기로 했다.
가장 쉬운 문법 책부터 끝까지 독파해보기로 했다. 캠브리지의 Grammar in Use 가 좋다는 것은 누누이 들어서 알고 있었고 몇 번 공부를 시도하면서 좋은 책이라고 생각했지만 너무 두껍고 지겨워서 반이상 진도를 빼기가 어려웠다. (평생 해온 끈기 없는 공부 습관이 뭐 그렇게 빨리 바뀌겠는가.)
그래서 해커스에서 나온 노란 표지의 얇은 책 Grammar gateway 베이직을 구입했다. 형식은 캠브리지의 Grammar in Use와 유사했지만 더 쉬웠고 매일 한 페이지씩 푸는 것이 부담되지 않았다. 그래도 너무 오래 걸리면 또 중간에 포기할까 봐 두려워서 시간이 나는 날은 하루에 몇 페이지를 풀기도 했다. 쉬운 책이다 보니 꽤 짧은 기간에 한 권을 다 풀 수 있었다.
내가 영문법 문제집을 한 권 선택해서 끝까지 풀어본 것은 생전 처음이었을 것이다. 한 권을 끝까지 다 봤다는 성취감이 꽤 컸다. 그리고 이런 것도 모르고 어떻게 영어공부를 했을까 싶을 만큼 문법에 무식했던 내가 신기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복잡한 문구들은 문법적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이 아직도 많았다. 조금 더 수준을 높이고 싶어 스마트폰 앱으로 판매하는 캠브리지의 'English Grammar in Use'를 사보았다. 문제들이 Grammar in Use Intermediate 정도 수준이었는데 정확히 종이책과 같은 내용은 아니었으나 구성은 유사했다.
Unit 별로 문법 설명, 연습문제가 종이책 정도 분량으로 들어가 있고, 매일 공부한 부분이 체크되어 있어 어디까지 진도를 나갔는지 어플을 열 때마다 파악할 수 있었다. 메일 체크표시를 늘리는 것도 동기부여가 되었다. 특히 종이책으로 풀면 지겨운 연습문제를 퀴즈 맞추듯 입력해서 다음장으로 넘어가는 것이 재미있었고, 본문의 예문도 대부분 소리로 들을 수 있게 되어 유용했다.
전체가 Unit 145까지 있었는데 매일 한 개 Unit 이상을 풀어서 약 3개월 정도만에 한 권을 다 풀 수 있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이걸 석 달이나 풀어서 언제 실력을 늘리나 생각했는데 사실 3개월은 넋 놓고 있으면 금방 가는 세월이 아닌가.
특히 스마트폰만 열면 문제를 풀 수 있기 때문에 따로 시간을 내지 않고 엘리베이터에서, 화장실에서, 식당 줄을 기다릴 때, 양치질할 때 몇 문제씩 풀면 시간으로 인한 부담을 받지 않고 매일 목표량을 채울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영문법 책을 끝까지 보고 나니 내가 꽤 달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책 몇 권을 봤다고 영어 실력이 눈에 띄게 향상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모르는 단어가 많았고 복잡한 문장은 한 번에 해석이 안되었다.
그래도 이제 영문법 책을 무슨 소린지 알면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마음먹으면 끝까지 교재를 마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었다는 것, 서른을 훌쩍 넘어 애 엄마가 되었지만 아직도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과정이었다.
아직도 영어 소설을 볼 때는 대체 무슨 구조가 이모양인가 싶은 것들이 많지만, 그래도 어설프게나마 영어 소설을 읽을 수 있게 된 나를 칭찬한다. 영문법도, 원서 읽기도, 회화도 천천히 늘려가며, 목적 없지만 과정이 즐거운 영어공부를 꾸준히 지속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