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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흑백필름 Jun 20. 2022

런던에서 한달살기 첫날

아시아 방문객을 반기는 런던 고양이

딱 3시간이 걸렸다. 


지난 2월 13일에 항공권을 예약하고, 에어비앤비에서 꼼꼼하게 숙소를 골라서 3월 5일에 마음에 드는 숙소를 예약했다. 그 후로 3달이 넘도록 런던에서 한 달 동안 살기로 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양 출발하는 전날까지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며 지내왔다.


아내에게 '2박 3일 제주도 여행 가는 사람'보다 더 준비를 안 한다는 타박을 듣기는 했지만, 오히려 숙소가 안정적인 장기 여행은 현지에서 생필품을 구입해가며 지내기가 더 편하다는 사실을 예전 중국 생활을 통해 익히 경험했기에 마냥 태평하게 지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내일이면 떠나야 하기에 금요일 퇴근 후 저녁을 먹고 슬슬 짐이나 싸볼까 마음먹으면서 어떤 걸 챙겨야 할 지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꼭 필요한 것 : 여권, 노트북, 국제운전면허증, 해외 신용카드(영국도 우리나라처럼 현금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국가다)

가져가면 좋을 것 : 책 몇 권, 속옷, 양말, 겉옷 두세 벌, 세면도구, 내가 애용하는 면도기

현지에서 사도 될 것 : 슬리퍼, 그 외 옷을 비롯한 모든 소모성 생필품


공항에서 숙소 가는 법 등을 검색해보며 생각을 정리하는데 1시간 정도. 막상 짐을 챙기는 데는 2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아내가 캐리어가 많다며 내일 타다를 예약해달라는 말에 타다앱을 들어가 보니 10분 이내 거리에 대형차들이 즐비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그건 내일 아침에 예약하며 된다'고 안심시켜 주었다. 짐을 대충 챙기고 10살이 된 우리 집 노견 '쿠키'를 이웃 동네에 사는 지인에게 맡기고 돌아왔다. 혹시 개를 데리고 갈 수도 있을 거 같아 애견동반 가능한 곳으로 숙소를 예약해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는데, 14시간 장거리 비행이 노견한테는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고, 개를 데리고 가겠다는 욕심은 이건 개를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욕심이라는 판단이 들어 아쉽지만, 우리집 막내는 지인 집에서 그만의 여행을 하는 걸로 결정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바로 여행이 시작되었다. 언제나 여행은 예측불허의 난관과 함께 시작된다. 뭔가 당황스러운 일이 생기면 그때부터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 여행은 타다와 함께 시작되었다. 아침에 준비를 마치고 호기롭게 타다앱을 켰더니 모든 차량이 '운행 중'이라고 나왔다. 새로고침을 아무리 해도 빈 차량이 조회되지 않았다. '타다가 이렇게 잘 되었나?'. 공항 렌터카를 부르기에는 시간이 촉박해 우선 내 차에 짐을 꾸역꾸역 싣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다행히 가는 중간에 인천에 사는 지인이 차를 보관해주겠다고 그래서 장기 주차요금이 아깝다는 아내의 컴플레인은 블로킹할 수 있었다. 


인천공항은 예전처럼 북적거리지는 않았으나 우리가 탄 비행기는 만석이라고 그랬다. 우리처럼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부터 바깥으로 떠나기 시작하나 보다. 공항 라운지 입구에서 만료 기간이 지난 PP카드로 어떻게 입장 좀 할 수 없냐고 부탁하다가 거절당한 후 김치찌개와 순두부찌개로 아침을 먹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항공권을 일찌감치 예약한 만큼 원하는 자리를 선택할 수 있었다. 최대한 앞쪽 좌석 중에 비행기 날개를 피해서 밤하늘도 구경할 수 있는 곳으로 예약했다고 생각했는데 창밖으로 보니 집채만한 날개가 하늘을 떡 가리고 있었다. 장거리 비행이라서 창문을 내내 닫고 있을 건데 뭐... 라고 위안으로 삼았다.


기내식으로 나온 쌈밥은 고도 때문에 기내 음식은 밥맛이 없다는 편견을 깨줄 만큼 야채는 신선했고 쌈장은 구수했다. 아내와 아들 모두 쌈밥에 감탄을 해 가며 첫 식사를 맛있게 했다. 공짜는 놓칠 수 없기에 맥주에 와인을 시켜 건배해가며 이번 여행에서 꼭 해보고 싶은 게 뭔지 얘기를 나눴다. 

 

음악과 공연, 전시회 관람을 즐기는 아들은 공연장과 미술관 등을 다닐 거고 아내는 명소도 찾아다니고 술집 투어도 하며 매일 매일 일상을 재미있게 보낼 거라고 그랬다. 나는 집 근처 노천카페에 앉아서 그냥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모습을 하염없이 구경하며, 한국에서 누리지 못했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속내를 밝혔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비행시간이 2시간 늘어나서 14시간이나 되는 통시간을 보내려고 가져온 이미예 작가의 <달러구트 꿈 백화점>은 처음부터 내용이 흥미로웠다. 기발하고 놀라운 상상력에 감탄해가며 읽다가 임종 직전의 사연들에 혼자서 끄억끄억 눈물을 참아가며 다 읽고 나니 비행의 절반이 지나 있었다. 놀라운 작품이다. 


화장실에 가서 눈물 자국을 지우고 의자 앞 모니터를 보니 재미있는 영화가 가득했다. 한국 영화는 거의 놓치지 않고 모두 보는 아내는 서비스하는 한국 영화들에 대해 브리핑은 쭉 한 뒤에 '뷰티 인사이드'를 첫 번째 영화로 추천해줬다. 그걸 보기 전에 잠시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 있길래 내가 본 스파이더맨 시리즈인가 아닌가 확인하려고 눌렀다가 끝까지 정신없이 다 보고 난 후, 역시 히어로 영화는 나랑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 옆에 이터널스가 있길래 이것도 내가 본 건가 싶어서 클릭하다가 '무슨 내용이 뭐 이리 뻔해'라고 생각하면서도 놀라운 액션에 빠져 정신없이 보다 보니 런던 히드로 공항에 거의 다 왔다는 기장의 안내 방송이 나왔다. 귀국할 때는 자극적인 할리우드 히어로물 대신 '뷰티 인사이드'를 꼭 보리라 마음먹으면서 비행기에서 내렸다. 
 

히드로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6시. 11시 50분 비행기로 출발했으니 14시간이 걸렸다. 오늘 하루는 8시간을 더 살 수 있다. 물론 귀국하는 날에는 16시간짜리 하루를 보내겠지만. 런던도 오래된 도시이다 보니 히드로 공항도 시설이 낡아 보였다. 해외에 나와보면 우리나라가 선진국인 걸 깨닫는다는 말에 완전 공감이 된다. 센스가 먹지 않아서 전자통관기계 앞에서 끙끙대다가 옆 기계에서 간신히 통관했다. 인천에서 수화물 맡길 때 취급주의 빨간색 유리컵 딱지까지 붙였는데 샘소나이트 가방 측면 모서리가 쑥 꺼져서 덜컹덜컹 무빙머신을 따라서 나오고 있었다.


수화물을 모두 찾은 후 아내가 영국은 우버보다 볼트를 더 많이 쓴다고 그래서 볼트에 카드 등록을 하고 차를 부르려고 공항 바깥으로 나섰다. 공항 바깥 날씨는 여름답지 않게 쌀쌀했다. 안내 표지판에 택시와 버스 타는 곳이 나뉘어 있어서 택시 타는 곳으로 이동했다. 어디에서 볼트를 불러야 기사님과 엇갈리지 않고 잘 만날 수 있을까 적당한 위치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어떤 젊고 키 큰 백인 남자가 어디로 가면 우버를 부를 수 있는지 묻길래, 우리가 궁금한 게 바로 그거라고 아들이 친절하게 답변해줬다. 


눈앞에 비어 있는 대형택시가 보이길래 택시나 볼트나 요금이 그게 그거겠지라는 생각으로 택시를 탔다. 숙소까지 1시간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는데 얼마 달리지도 않았는데 요금이 50파운드를 넘어서 이렇게 택시비에 눈탱이를 맞으면서 영국의 첫날이 시작되나 긴장했다. 런던의 택시비가 비싸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지만 이 정도 일 줄이야. 다행히 처음 출발 시에는 요금이 빨리 올라가고, 나중에는 천천히 추가되는지 숙소에 도착하니 총 요금이 100파운드가 나왔다. 비싸지만 눈탱이 정도는 아니었다. 카드 결제를 하는데 팁 10%, 팁 15%, 팁 20% 3개 옵션이 있길래, 디폴트인 팁 10%를 선택해서 결제하고 마침내 한달 동안 살 우리집 앞에 서게 되었다. 빗방울이 흩날리고 있었다.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알려준 대로 자건거 보관함 안쪽 키 보관함을 번호 키로 열고 현관문을 여는데 어디서 숨어 있다가 왔는지 세련되고 귀여운 고양이 한 마리가 잽싸게 열린 문 틈새로 우리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 집에 사는 고양이인지, 옆집 고양이인지 설왕설레 하고 있는데 고양이는 자기 집인 양 거실 바닥에 뒹굴며 애교를 떨었다. 낯선 이국땅에 처음 도착했는데 이렇게 고양이라도 반겨주니 마음이 포근해졌다. 집에 두고 온 우리 집 개를 대신해 배도 만져주고 놀아주다가 먹을 걸 좀 줄까 그러고 있는데 아들이 목줄을 보라고 그런다. Do not feed. 목걸이에는 Sydney. 고양이 이름은 시드니, 밥은 주지 마세요. 알아서 조금 놀더니 비가 그치자 다시 바깥으로 나갔다. 이번 여행 중에 다시 한번 만날 수 있기를. 
 
숙소는 아늑하고 평온했다. 1층은 주방과 거실, 야외에 조그마한 정원이 딸려 있었다. 2층은 침실 방이 2개 있고 하나에는 책상이 있어서 업무공간으로 활용이 가능했다. 2.5층에 욕실이 있었고, 3층에는 침실과 업무용 공간과 헬스기구가 있었다. 3.5층에 욕실이 또 하나 있고 4층에는 하늘이 보이는 침실이 하나 더 있었다. 4인 가족이 살기에 환상적인 구조다. 초승달 모양의 안쪽에 주거지역에 있어서 주변이 고요했다. 바깥으로 빗방울이 조금씩 흩날리고 있었고 창밖에 무화과나무가 바람에 흔들거렸다. 어느 다른 행성에 와 있는 기분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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