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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흑백필름 Mar 27. 2023

하루 12시간과 골프

신당동에 있는 화덕 피자집에서 먹은 마게리타 피자는 겉은 바삭거리고 속은 찰졌다. 이 집이 회사 인근에서 제일 맛있다는 자랑을 들으면서 동종업계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대표님과 점심 식사 겸 두어 시간 대화를 나눴다. 매출 볼륨도 있고 영업이익도 잘 내고 있어서 내년에 상장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운영하는 브랜드가 5개이고 본사와 사무실이 총 3군데, 이를 지원하는 물류센터가 3곳이 있단다. 

피자를 먹고 돌아가는 길에 시즌 당 디자인하는 신제품 아이템수를 물어봤다. 브랜드를 모두 합하면 봄에는 800여 종, 여름에는 1,000여 종의 신제품을 디자인해서 출시한다고 그랬다. 우리 회사에서 시즌에 200여 종을 디자인하는 비하면 4~5배가 더 많은 셈이다. 200여 종 신제품 개발도 벅차서 한번 만들면 오랫동안 판매할 수 있는 뷰티나 식품 쪽을 관심 있게 보고 있는데 1천여 종이라니. 


"어떻게 그 많은 아이템을 다 관리하세요?"

"대표님은 골프 치시나요?"

"예전에 잠깐 배우다가 지금은 치지 않습니다."

"그렇죠. 우리 업종은 골프를 칠 수 없는 업종입니다."


'골프를 칠 수 없는 업종'. 그 대표님의 설명에 따르면 신제품을 매일 개발해야 하는 패션 이커머스 업종은 챙겨야 할 디테일이 너무 많아서 골프는 엄두도 못 낸다는 것이다. 제품 기획부터 원부자재 준비, 생산, 그리고 비주얼과 마케팅, 재고운영에 조직관리까지 업무의 총량이 다른 업종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는 설명이다. 동의가 되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


동의가 되는 부분은 업무의 총량이 많다는 점이다. 같은 한 끼를 먹더라도 햄버거와 라면과 한정식이 식재료와 반찬과 설거지까지 주방의 일이 천차만별이듯, 같은 이커머스 비즈니스이더라도 취급하는 품목에 따라 업무에 총량이 크게 다르다는 주장은 백번 공감된다. 그 바쁨과 복잡도로 인해 꽤 높은 진입장벽이 존재하고, 그 덕분에 내가 지금까지 큰 어려움 없이 회사를 유지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동의가 되지 않는 부분은 이와 별개로 골프는 가치의 문제라는 점이다. 벌써 13년이 되었다. 매일 레슨을 받고 겨울 골프를 즐기러 해외를 다니기도 하며 한 2년 정도 열심히 골프를 친 적이 있었다. 차 트렁크에는 늘 골프백을 넣어 다니고 틈만 나면 스윙 자세를 연습하며, 싱글을 치는 날을 꿈꾸며 필드를 뛰어다녔다. 푸르고 광활한 대지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새소리와 함께 공을 치는 기분은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자웅동체처럼 붙어있던 회사와 나의 개념이 잠시나마 분리되고, 내가 자연과 하나가 되는 태초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한 형들과 골프를 친 후 목욕탕에서 샤워를 하던 와중에 불현듯 마음이 불편해졌다.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라는 의문이 불쑥 들었다. 


그날 운전을 하고 회사로 돌아오는 동안에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그리고 골프를 쳐도 되는 경우의 수를 몇 가지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당시 내 정리는 다음과 같다.


Q1. B2B 비즈니스를 하면 골프를 치는 게 낫다. 골프만큼 편안하게 대화하면서 사람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하는 운동도 드물다. B2B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가? 

A1 : No. 나는 100% B2C 비즈니스다.


Q2. 골프를 쳐도 될 정도로 구성원의 조직화가 잘 되어 있어서 대표의 역할이 미미하다. 회사에 미치는 대표의 영향력이 크지 않은가?

A2 : No. 나는 나의 에너지와 열정으로 회사를 리딩하고 있다.


Q3. 회사의 성장보다는 골프의 즐거움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회사는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다른 곳에서 즐거움을 찾고 있는가?
A3 : No. 나는 회사를 조금이라도 더 키워보려고 아득바득 최선을 다하고 있고 그곳에서 성취감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내가 왜 골프를 치고 있지?' 
골프는 좋은 운동이고 훌륭한 커뮤니케이션 공간이긴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다. 시간 투자가 많이 된다는 점이다. 연습장이나 스크린게임이 아닌 이상 필드를 나가야 하고 이동 시간과 경기시간을 감안하면 하루의 절반은 사용해야 한다. 내 경험적으로 그 이상의 가치는 분명 있다. 다만, 나의 비즈니스 환경이 그 가치를 제대로 느낄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이 문제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한 후 주변 분들에게 '사업에 집중하기 위해서' 골프는 잠시 쉬겠다고 선언했다. 처음에는 좀 아쉬워하던 멤버들도 어느새 저 친구는 공 안 치는 친구로 규정하고 이해해 주었다.


그렇다면 골프 치는 시간을 사업에 투자해서 회사가 더 잘 성장했는가? 그건 또 다른 질문이다. 골프를 안 쳐서 확보한 시간 동안 나는 책을 읽기도 하고, 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친구들을 만나기도 하고, 비즈니스 모임을 다니고,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데 사용했을 수 있다. 물론 일을 더 했을 수도 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무리하지 않고 지속가능한 선에서 사용할 수 있는 최대 시간은 12시간 정도 될 것이다. 수면 7시간(준비시간 포함), 삼시 세끼 식사 3시간, 세면&샤워 1시간, 이동 1시간을 기본으로 공제하면 딱 절반인 12시간이 남는다. 이 12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철학의 문제로 옮겨간다.


노멀 한 직장인의 경우 회사에서 8시간 근무하면 하루에 4시간이 남는다. 출퇴근 거리가 좀 멀 경우에는 3시간으로 줄어들 수도 있다. 프리랜서는 좀 더 유연하게 시간 활용이 가능하다. 이 4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 게 가장 좋을까? 나는 3가지 관점에서 하루의 시간 사용에 대해 고민해 본다.


1. 밤에 잠자리에 누워서 가슴에 손을 얹고 오늘 하루를 되돌아봤을 때, '아, 오늘 하루도 꽤 괜찮았어!'라고 회상하며 기분 좋게 잠들 수 있다면,

2. 아침에 눈을 떠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때 어제를 되돌아보면서 '어제 하루 참 괜찮았지.'라고 하루가 지났음에도 만족감이 유지된다면,

3. 은퇴한 이후 노년이 되었을 때,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면서 그 시절 그렇게 시간을 사용한 게 후회 없다는 판단이 든다면,


그렇다면 하루를 잘 산 것이다. 3번은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라서 상상일 뿐이다. '그 시절 열심히 골프를 치며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정말 즐거웠지. 그렇게 시간을 사용하길 정말 잘했어'라는 확신이 들었다면 나는 지금도 골프를 즐기고 있을 것이다. 당시 이 질문에 확신을 가지지 못했고, 그렇다면 다른 곳에 시간을 사용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판단했다.


화덕 피자를 함께 먹은 대표님도 결국 나와 같은 생각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우리의 시간 사용은 바쁨과 무관하게 삶의 우선순위로 결정되는 건 자명하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다쳤다고 연락오면 바로 달려가고, 꼼짝도 하기 싫은 주말이라도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갑자기 찾아오면 반갑게 마중 나가는 게 우리의 참모습 아닌가.


10년 전의 나의 의사결정 기준과 지금의 기준과 10년 후의 기준이 다를 것이기에 10년 후에는 어떤 의사결정을 하며 하루 12시간을 사용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때 지금의 시간을 되돌아보았을 때 '꽤 괜찮게 보낸 날들이었어'라는 충만감이 들길 꿈꾸며, 오늘 하루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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