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과 국제법의 상관관계
사랑을 제외하곤 지금의 내 인생을 설명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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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이 왜 좋은데?”
막막하다. 나의 방대한 사랑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란. 오세훈이 좋은 이유는 내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 같은데. 그래도 오세훈은 잘 생기고 키도 크고 어깨도 바다같이 넓고 춤도 기가 막히게 춘다고 친절하게 말해주면.
“그런 아이돌이 한둘이냐?”
하긴. 바야흐로 아이돌 전성시대라고 하기에도 이미 늦다. 전 세계가 열광한다는 케이팝의 흐름을 타고 오늘도 새로운 아이돌이 탄생하고 또 그만큼의 아이돌이 사라졌을 거다. 그러니까 이건, 모두 하나같이 잘난 그들 중에서 왜 꼭 세훈이어야 하냐는 질문일 거다. 이유도 예고도 없어 교통사고(일명 ‘덕통사고’)에 비유되곤 하는 팬심의 시작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황망하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이 ‘일반인의 순진하고 잔혹한 질문’에 정성스레 머릿속을 뒤져본다. 생각해 보면 세훈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그가 미남이라거나 춤을 잘 춘다든가 하는 외적인 이유들 때문은 아니었다. 우연히 본인의 연습생 시절 이야기를 가사로 녹여냈다는 담백한 노래를 들으면서, 부족한 것 없어 보이는 그 또한 지난 외로움이 있었구나 짐작할 수 있었고,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춤을 추지만 여전히 무대는 "미식거린다"는 고백에 그가 인간적으로, 아니 입체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참 오해 많이 샀을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서는 팬들에게 첫눈을 함께 보자 약속하고, 갑작스레 첫눈이 내리던 어느 날, 그는 겉옷도 없이 배터리가 깜빡이는 폰을 들고 밖으로 뛰쳐나가 라이브 방송을 켰었다. 그 잠깐이 이렇게 오래 설렐 줄 나도 몰랐다니까. 세훈이가 속한 그룹 엑소의 '첫눈' 노래에 맞춰 춤을 춰달라는 팬들의 막무가내에 또 그걸 춰서 올려주는 그. 그가 영상을 올리자 거짓말처럼 눈이 왔다. 그가 있어 나는 오늘도 낭만을 살고. 그러니까 오세훈도 진심이고 나는 그게 좋았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다.
“넌 진짜 오세훈을 모르잖아.”
그렇다면 묻고 싶다. ‘진짜 오세훈’을 아는 사람이 있긴 하냐고.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연인에게조차, 우린 편집된 모습만을 보여주지 않느냐고. 내가 좋아하는 오세훈은 필연적으로 내가 해석한 오세훈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사랑이 가짜라기엔, 오세훈을 향한 나의 마음은 이미 임계점을 넘었는걸. 임계점을 넘은 마음이란 오세훈이 만든 완벽한 무대를 멋지다고 좋아하는 한편 실수가 있었던 무대는 귀엽다고 예뻐하는 마음 같은 것이다. 완벽과 실수는 상반되는 개념이고, 멋짐과 귀여움은 공존할 수 없는 취향인데, 개념과 취향을 뛰어넘어 그가 좋은 이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면 뭐가 사랑인지. 내가 물이라면 그는 분명 100도인걸. 별의별 소문이 다 붙는 아이돌 11년 차, 그때마다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지금 세훈이를 안 믿으면 세훈이가 상처받아. 그런 마음으로. 흉흉한 세상, 시끄러운 사건 하나에도 팬들이 걱정된다고 연락을 해오던 보드라운 마음의 오세훈이 나를 상처줄리 없다고. 또는 그런 마음으로. 그러니까 오세훈이 내 첫눈이고, 내 100도이고, 내 이데아란 말이 하고 싶은 거다.
국제법 이야기를 하는데 왠 오세훈이냐고 묻는다면 이건 그냥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고 싶다. 사랑을 제외하곤 지금의 내 인생을 설명하기 어렵다. 스위스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교환학생으로 였다. 눈이 무릎까지 쌓이고 아침이면 자욱한 안개에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스위스의 산동네, St. Gallen에서 나는 국제법을 처음 만났다. 법 중에서도 헌법을 가장 좋아했던 내가 국제법에 빠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 같은 것을 노래하는 헌법은 나에게 시였고, 전쟁 속에서도 인권만큼은 보호해야 한다고 말하는 국제법은 나에게 낭만이었다. 1년이 지나 한국으로 돌아가며 결심했다. 꼭 제네바에 가야지. 국제법의 과거이자 현재라는 그곳은 나의 꿈이 되었다. 유학을 준비하는 몇 년간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무언가를 너무 사랑하면 고통스러워진다는 사실을 배웠다. 빨리 가고 싶어서 괴로웠고, 혹시 가지 못할까 봐 불안했다. 지난한 준비 끝에 마침내 제네바로 가게 되었을 땐 마치 오랜 짝사랑이 이루어진 것 같았다. 그곳에서 공부하고, 그곳에서 일하고, 그곳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죽겠다는 말을 하고 제네바로 향했다.
석사 시절은 눈코 뜰 새 없었다. 나는 사랑에 성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러다 죽겠다 싶은 순간에도 죽더라도 이건 끝내고 죽어야지 하며 숱한 밤을 새우고, 못 넘을 것 같은 허들을 하나씩 넘으며 매번 눈물을 쏟았다. 눈물로 얼룩진 그 시절조차, 사랑이었다. 나는 그로티우스의 후예인 게 자랑스러웠다. 전체가 유리로 된 학교 건물들은 미래에선 온 것 같았고, 수업시간에 동기들과 토론을 할 때면 우리가 세상의 미래인 것 같았다.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오고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우리들은 누구보다 닮아있었다. 마침내 내가 속한 가족을 찾은 기분이었다. 국제경제법은 오늘의 인권법이었고, 국제환경법은 내일의 경제법이었다. 국제법으로 세상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었다. 배우면 배울수록 진리를 깨우치는 기분이었다. 밤새 과제를 하고 아침에 기숙사 창 너머로 보이던 아련한 몽블랑은 잊을 수가 없다. 노을이 지는 시간, 도서관 창을 따라 기울던 그림자도... 그러니까 나는 지금 나의 사랑을 설명하려 애쓰고 있는 거다. 사랑하지 않은 것들을 설명할 순 없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 나의 사랑이 해피엔딩이었냐고 묻는 거라면. 나는 무사히 졸업을 했고. 다행히 취업을 했다. 전공을 살려 국제기구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졸업을 하기 전부터 회사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두 번의 인터뷰 후 곧장 오퍼를 받았고, 컨펌을 준지 한 달 만에 입사하게 되었다. 나의 경우 영어와 한국어, 그리고 프랑스어로 일했는데, 국제기구에선 흔한 일이었다. 무급으로 일을 시키는 국제기구도 존재하지만 난 운이 좋게도 처음부터 만족스러운 연봉을 받았다. 1년에 두 달 정도 휴가가 있었고 자유롭게 썼다. 원하면 매달 여행을 다닐 수도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살기도 했다. 그림을 보러 마드리드에 갔다. 햇살이 그리울 땐 시칠리아로 향했다. 크리스마스엔 스트라스부르행 기차를. 빈티지 쇼핑을 하러 베를린행 비행기를 탔다. 일하며 회사가 제공하는 다양한 수업도 들을 수 있었다. 언어부터 법학까지 분야는 다양했고 전부 무료였다. 나는 끊임없이 수업을 들으면서도 일을 잘했다. 입사한 지 8개월 만에 신입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팀에서 가장 빨랐다. 나중에 듣게 된 이야기지만 이때 나의 퍼포먼스에 대해 상사들 사이에선 이견이 없었다. 만장일치로 우수했다.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생각하면 설렜다. 머릿속이 놀이동산 같았다. 이게 엔딩이라면 해피엔딩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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