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한 도시, 캄폿
캄폿에 간다면 보코산(Bokor Mountain) 만큼은 꼭 방문하라고 추천하고 싶다. 어쩌다 보니 캄보디아에 머무는 동안 보코산을 두 번이나 방문했다. 그만큼 신비롭고 아름다웠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보코산의 정글에 올랐다 내려오면 뭐랄까, 빽빽한 정글이 내뿜는 공기를 거쳐 몸과 마음이 정화된 기분이었다.
심지어 보코산을 방문할 때마다 내가 약간 아픈 상태였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졌었다. 처음 보코산을 방문했던 이 날은 얼굴에 올라온 알레르기 때문에 병원에 방문한 직후였다.
보코힐 스테이션, 보코산 호수, 혹은 포폭빌 폭포(Popokvil Waterfall) 등 어디를 목적지로 정하고 가느냐에 따라 캄폿 시내로부터 걸리는 시간은 다르겠지만 편도로 약 한 시간 정도를 잡고 가면 된다.
분명 캡에서 캄폿으로 이동할 때까지만 해도 해가 쨍쨍했는데, 병원에 갔다 오니 구름이 해를 다 가려버렸다. 주유소 코너를 돌아 보코산 국립공원 입구가 보이는 길로 쭉 들어가니 국립공원 직원인지 경찰인지 알 수 없는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차량과 오토바이를 멈춰 세웠다.
캄보디아에서는 괜히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을 보면 긴장하게 된다. 뭐 잘못한 게 있어서가 아니고, 괜히 말도 안 되는 걸로 트집 잡아 돈을 뜯어낼까 봐 그렇다.
직원은 우리에게 여권을 보여달라고 했는데, 보통 우리는 여권을 들고 다니다가 잃어버릴까 봐 숙소에 두고 다니는 편이라 순간 당황했다. 다행히 이날 나는 병원에 간다고 여권을 챙겨 왔었다. A는 오토바이 렌탈 업소에 여권을 담보로 맡겨 둔 터라 여권이 없다고 했더니 직원이 단호하게 같은 단어를 반복해 말했다. 처음에는 둘 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는데 잘 들어보니 여권사진을 보여달라는 것 같았다. A가 휴대폰으로 보여준 그의 여권사진을 대충 확인한 직원은 가보라며 손짓을 했다.
약 15분에서 20분 정도를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올라가니 전망대 비스무리한 곳이 보였다.
아직 산 정상까지는 한참 더 가야 했지만 생각보다 캄폿 시내가 잘 내려다보였다. 신이 잔뜩 난 A가 오토바이를 멈춰 세웠다. 딱히 산이라고 할 만한 것 없이 평평한 영국 남부에서 자라와서 인지 A는 높은 산이나 빌딩을 정말 좋아한다. 반면 강원도가 고향인 나는 이 정도 풍경에 엄청난 감동까지 받진 않았다.
솔직히 이때 나는 큰 트럭과 자동차들도 함께 달리는 가파른 커브길에서 시속 70km로 달리는 A에게 짜증이 잔뜩 나 있었다. 이건 마리오 카트 게임이 아니라며 천천히 운전하라는 내 잔소리에 A가 풀 죽은 목소리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10분 정도 더 달려 산을 올라가는데 바람의 기운이 바뀌는 게 느껴졌다. 후덥지근하고 무거운 공기가 달리는 오토바이 뒤로 멀어져 갔다. 대신 깊은 정글이 우리 앞에서 차가운 숨을 불어내는 것이다. 그때, A가 흥분한 목소리로 "Monkey!"라고 외쳤다.
오른쪽으로 원숭이 무리가 보였다. A는 오토바이 속도를 줄이며 얼른 사진을 찍으라고 재촉했다. 아주 천천히 달리는 오토바이 위에서 우리는 몇 분간 야생 원숭이들을 구경했다.
야생 원숭이 무리를 지나쳐오자 부서진 다리의 잔해들이 보였다. 꽤나 멋진 풍경에 사람들이 잠시 오토바이를 세우고 사진을 찍는 곳인 것 같았다. 다른 관광객들이 떠난 자리에 우리도 잠시 오토바이를 세우고 잔해를 구경했다. 부서진 다리 아래로도, 뒤로도, 빽빽하게 이어진 정글을 보며 신비로운 기분에 휩싸였다. 흐린 날씨마저 정글과 멋지게 어울렸다.
다시 오토바이에 올라 조금 더 산을 올라가니 마오 할머니 동상이 보였다. 처음 여행을 계획할 당시 구글 지도에서 보았던 동상을 실제로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 신기했다. 왼쪽으로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올 것 같은 집이 보였다. 마오 할머니 동상은 밤에 보면 조금 섬뜩할 것 같다. 이런 대화를 나누며 우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 산을 올랐다.
'탄수르 보코 Thansur Bokor'로 가는 입구를 지나 정상에 가까워지자 옆으로 짓다만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뼈대만 남은 채 덩그러니 서 있는 건물들이 오싹한 기분을 들게 했다. 한 시간가량 오토바이로 산을 오르는 내내 이 정글 산을 감상하느라 지루할 틈이 없었다.
오른쪽으로 주유소가 보이는 큰 회전 교차로에 다다랐다. 보코힐 스테이션은 왼쪽, 포폭빌 폭포는 오른쪽으로 향해야 했기에 어느 쪽으로 갈지 잠시 고민이 됐다. 도로 한가운데에 서있을 수 없기에 A가 재빨리 결정을 내렸다. 그는 왼쪽으로 핸들을 돌렸다.
회전 교차로에서 왼쪽으로 가는 큰길을 선택하자 기이하고 거대한 호텔이 모습을 드러냈다. 엄청난 규모의 호텔이었다. 단순히 낡았다기엔 버려진 느낌을 주는 이 호텔이 신기해 우리는 오토바이로 호텔을 한 바퀴 둘러보기로 했다. 호텔 앞으로 펼쳐진 정원은 방치된 느낌이 가득했다. 칠이 벗겨진 동물 모형들과 꾀죄죄한 호텔 외관이 기괴한 느낌을 뿜어냈다. 지도를 살펴보니 이곳은 '탄수르 소카 호텔 Thansur Sokha Hotel'이었다.
누구도 돌보지 않은 것 같은 호텔의 외관과 텅 빈 공허만이 감도는 호텔 주위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래도 멀끔해 보이는 차 몇 대가 호텔 앞에 주차되어 있었다. A와 나는 이곳이 버려진 호텔, 혹은 버려진 카지노일 것이라 굳게 믿었다. 호텔 뒤로는 리조트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지만 모두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직 해가 지기 전이라 섬뜩하다거나 무섭진 않았지만 해가 졌더라면 아무리 오토바이가 있더라도 호텔 주위를 빙 둘러보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만큼 모든 것들이 기이한 곳이었다.
방치된 호텔 주위를 운전해 둘러본 후 우리는 다시 보코힐 스테이션 쪽으로 운전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광객 두어 명을 태운 택시가 멈춰 선 곳이 보였다. 차에서 내려 언덕 위로 이어진 계단을 오르는 관광객들 앞으로 버려진 가톨릭 성당이 보였다.
A도 오토바이를 세우고 올라고 보자고 했다. 기묘한 호텔과 버려진 성당까지, 거기다 산 정상이라 으슬으슬한 추위가 느껴지는 탓에 더더욱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폐가처럼 검게 변해 버린 성당은 외관보다 실내가 훨씬 더 신비로웠다.
녹아내린 촛농, 검게 그을린 선반, 말라버린 꽃들.
차갑게 느껴지는 공기 때문인지 규모가 작은 성당인데도 그곳이 주는 웅장한 기운에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이곳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 건설돼 사용되었던 성당이라고 한다. 보코산 국립공원은 예전부터 고산 관광지이자 휴양지였다고 하니, 성당 하나쯤은 있었겠지만 기묘하고 신기했다. 성당 외부는 하도 시커멓게 변해 건물 전체가 녹슨 것처럼 보였다.
다시 언덕을 내려와 차가 다니지 않는 틈을 타 길에서 사진도 찍었다. 오후 다섯 시 반쯤 되자 해가 슬슬 넘어가는 탓에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었다.
해발 1000미터가 조금 넘는 산이라는 걸 생각했어야 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얇은 옷을 입고 온 우리는 이때부턴 정말 추워서 오들오들 떨었다. 그때 A가 오토바이 안장 아래 트렁크를 확인했다. (우린 계속 이 공간을 영국 슬랭으로 boots라고 불렀는데, 한국어로는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캡에서 캄폿으로 이동하면서 넣어뒀던 내 바람막이가 안에 들어 있었다. A의 바람막이도 같이 넣어뒀다면 좋았을 텐데. 나만 따듯해진 것이 괜히 미안했다. A가 적어도 나는 춥지 않을 수 있으니 괜찮다더라.
다시 오토바이에 올라 조금 더 운전해가니 드디어 보코힐 스테이션이 보였다. 그래, 성당을 지나 우리 앞에 서 있던 그 건물이 바로 보코힐 스테이션이었는데, 정작 이때 우리는 이게 무슨 건물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산 정상에 있기엔 건축 양식이 너무 고급스러워서 궁전 같았다. 외관은 빛이 좀 바래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건물인가 싶은 우리가 오토바이를 타고 건물 입구로 가까이 다가오자 관리인 같은 사람이 문을 열고 나왔는데 뻘쭘해진 A와 나는 그냥 그곳을 빠져나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이 보코힐 스테이션이었고, 유령의 집 같은 외관으로 여러 공포 영화의 촬영지가 되었기도 했지만 리모델링 후 지금은 '보코힐 팔레스'라는 고급 호텔로 바뀌었다고.
보코힐 스테이션까지 보고 나니 우리가 서 있는 도로도 끝이 보였다. 저 아래 호수도 보였다.
도로는 끝이 보였지만 정글은 그렇지 않았다. 산 아래와 기후가 다르다 보니 정상에선 끝없이 갈대밭이 펼쳐졌다. 사람도 없고, 차도 없고. 주위는 고요했다. 바람이 주위를 감도는 소리를 빼면 우리 숨소리만 들렸다. 소리 없이 아름다운 풍경만 펼쳐졌다. 왜인지 유럽에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릴 둘러싼 풍경에 감탄하고 있던 그때, 중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 둘이 언덕에서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A는 본능적으로 우리도 저 언덕을 올라가 봐야 한다고 느꼈나 보다. 우리도 그들이 오토바이를 세워둔 곳에 오토바이를 세우려고 가파른 언덕을 운전해 올랐다. 얼굴에 선함이 묻어나는 남학생 둘이 우리를 보고 반갑게 웃었다.
그들이 내려온 길을 따라 올라가자 잊지 못할 풍경이 펼쳐졌다.
가파른 정글 아래 태국만이 보였다. 저 멀리 내가 그렇게 가고 싶었던 베트남의 휴양섬 푸꾸옥까지 볼 수 있었다. 해발 1000미터의 정글이 내 발아래로 빈틈없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나무들이 정말 멋졌다. 웅장하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여기서는 식물들도 강인하다. 내가 압도될 만큼 크고, 믿기지 않을 만큼 그 무엇보다 살아있다.
A도, 나도, 연신 감탄을 내뱉으며 사진을 찍었다. 발 밑으로 펼쳐진 생명들이 제각기 너무나 강렬하게 살아있었다. 아찔했다.
얼굴에 올라온 알레르기 때문에 속상했던 마음이 다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그래, 이런 기분을 느끼려고 한국을 떠났지-하고 벅차올랐다. 차갑고 습한 공기에 괜히 피부도 한결 진정된 느낌이 들었다. 하하
흐린 날씨가 아쉽긴 했지만 멋진 노을을 배경으로 사진도 많이 찍었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풍경도 한껏 감상하고 내려오니 시간이 거의 여섯 시에 가까워졌다.
해가 지면 꼬불꼬불한 도로를 운전하는 게 위험할 것 같아서 우리도 발걸음을 재촉했다. 게다가 A가 너무 추워하는 게 안타까워 왔던 길을 다시 운전해 내려가는 내내 손으로 그 애 팔을 문질러줬다. 약간 어둑해진 도로를 따라 내려가는데 올라갈 때보다 내려가는 여정이 훨씬 더 짧게 느껴졌다.
어느 정도 산에서 내려오자 다시 따듯한 공기가 우리를 반겼다. 구불구불한 국립공원 도로를 다 내려오자 그제야 해가 완전히 지고 깜깜한 밤이 되었다. 캄폿 시내로 돌아가는 길은 생각보다 더 어두웠지만 잊지 못할 풍경을 본 터라 나는 한껏 들떠 있었다.
시내에서 수제버거로 저녁을 먹으며 거울을 확인하는데, 얼굴의 붉은기가 확실히 줄어든 것이 느껴졌다. 병원에서까지만 해도 꽤 울긋불긋했는데 보코산에 올랐다 내려오자 상태가 엄청 좋아진 거다. A도 내 피부를 보더니 갑자기 확실히 좋아졌다며 놀랐다.
저녁을 먹은 뒤 우리는 마트에 가서 간식거리를 사들고 숙소로 향했다. 왜인지 초코파이가 너무 당겨서 작은 박스로 하나를 샀다. 피곤했지만 단 1분도 허투루 쓰지 않은 날이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마스크 팩을 해주고 일찍 잠에 들었다.
캄폿에 온 뒤로 모든 게 잘 풀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안정감을 줬던 그곳이 벌써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