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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켠서 Oct 20. 2022

캄보디아 이민국에 다녀왔다

우당탕탕, 프놈펜

앞으로 열흘, 캄보디아 로드트립은 꼼짝없이 그렇게 한번 더 길어지고 말았다.


다음날이면 프놈펜 공항으로 떠나게 될 거라 생각했던 우리의 예상이 빗나가게 되면서 곧 기한이 만료되는 관광비자 문제부터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의 여행 계획까지 생각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아져 버렸다.


이때 얼마나 막막했는지, 나는 내가 앞으로 캄보디아에서 보내게 된 열흘을 손에 꼭 쥔 채 길을 잃어버린 어린애처럼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기분이었다. 다행인 건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서로를 위해 떠났던 로드트립이 속절없이 길어지는 바람에 우리는 또 한 번 좌절했지만 그럼에도 가슴 한 구석이 설렘으로 간질거렸던 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서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우린 다시 또 함께 모험을 떠나야 했다.


일단 가장 먼저 비자 문제를 해결해야 했는데,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만족할 만한 정보가 나오지 않았다. 물론 저번에도 말했듯 캄보디아는 만료된 비자로 출국하더라도 초과일 수당 10달러의 벌금을 부과할 뿐 크게 문제 삼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미 예상보다 훨씬 길어진 여행을 감당하고 있던 우리는 두 사람 벌금 몫으로 160달러를 쓸 만큼 여유가 있는 여행객이 아니었다.


찾아보니 관광비자(Type T)로 캄보디아에 입국했을 경우 1회 연장이 가능하고 30달러의 수수료가 든다. 호텔이나 식당, 혹은 오토바이 대여 업체에서도 비자 연장 대행 서비스를 하는 듯했지만 터무니없는 수수료에 우리는 고개를 저었다.  

결국 모든 건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우리는 직접 공항 이민국(Cambodian Immigration Department)을 방문해 해결하기로 했다. 당장 월요일에 이민국이 문을 여는 대로 바로 방문하기로 했는데 바로 그날이 우리의 비자 만료일이었기 때문에 한시가 급했다.


일단 가장 중요한 준비물은 여권(잔여 유효기간 6개월 이상)이다.

안 그래도 한국으로 출국할 거라 생각했던 우리는 오토바이를 딱 일요일까지만 대여하기로 했었고 그날 업체에 오토바이를 반납하러 가면서 담보로 맡겨두었던 A의 여권을 찾을 수 있었다.


이민국에 방문하기 전까지 가장 걱정되었던 준비물은 바로 사진이었다. 비자 연장 신청을 위해서는 사진이 필요하다는데 여권 사본은 여러 장 가져왔어도 여권사진은 따로 가지고 온 게 없기에 난감했다.


게다가 비자가 해결돼야 프놈펜을 떠나 어디라도 갈 텐데. 다들 대행업체의 도움을 받아 비자를 연장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절차가 많이 까다로운 건지, 혹시나 여행비자 기한이 만료되는 날 이민국을 방문했다고 비자 연장이 거절되는 건 아닐지, 다시 이런저런 걱정이 밀려왔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이곳, 캄보디아에서는 직접 부딪혀보지 않고서는 알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그저 맞닥뜨려보는 수밖에.


나는 또 그 와중에 식중독에 걸려 몸상태가 좋지 않았다. 증상이 심하진 않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화장실에 계속 들락날락거려야 했고 구토감까지 일었다. 알레르기부터 코로나 바이러스, 그리고 이제는 하다 하다 식중독이라니. 쉴 틈 없이 아픈 몸에 이골이 날 지경이었다. 별 수 없다고, 또 어쩔 수 없이 이겨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계속 아프기만 한 스스로가 너무 지겨워서 다시 한번 더 한국이 그리워졌다.


캄보디아에 온 후로 A가 늘 주의를 줬던 게 있었다. 바로 수박을 먹지 말라는 것.

도대체 어디서 본 건지 A는 캄보디아 여행과 관련된 정보를 찾다가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수박을 먹을 때마다 식중독에 걸렸다는 여성분의 사연을 읽게 됐다고 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여행 내내 수박을 멀리해 왔는데, 며칠 전 PCR 검사를 받고 호텔로 돌아와 조식을 먹던 내가 유혹을 참지 못하고 수박을 먹었고, 그 후 정말 식중독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거다.


A와 모든 식사를 함께 했는데 유일하게 달랐던 것이 있다면 그건 수박이었다. 솔직히 A가 해준 이야기를 듣고도 수박을 먹고 탈이 날 거란 걸 믿지 않았지만 믿었어야 했나 보다.


월요일 아침. 일기예보에는 우산 이모티콘이 떠 있었다.

우리는 또 한 번 체크아웃을 하고 짐을 바리바리 짊어진 채 거리로 나왔다. 이젠 이 나라를, 이 도시를 마주하는 게 너무 익숙했다.


이민국 점심시간이 오후 2시에나 끝난다길래 우리도 밥을 먼저 먹고 찾아가 보려는데 구비해야 할 준비물로 명시되어 있는 '사진'이 마음에 걸렸다. 인터넷을 뒤져봐도 한국에서 사진을 따로 가져가지 않았을 경우에 대한 정보는 딱히 없었던지라 어디 사진관을 찾아가서라도 사진을 찍어야 하나 고민이 됐다.


계속 이런 고민으로 끙끙거리던 내게 A가 말했다.

-그냥 가보자.


가보고 안 된다고 하면 사진 찍으러 가면 되지. 번거롭기는 하겠지만 또 납득이 가는 단순한 그 말에 어쩐지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비자 연장을 받을 이민국은 프놈펜 공항 근처에 있다. 시내에서 약 15분에서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인데 공항 바로 앞이 3번과 4번 국도가 합쳐지는 길목인 탓에 그쪽은 늘 자동차와 오토바이, 대형 덤프트럭들로 바글바글하다는 걸 우리도 겪어봐서 알고 있었다.


공항 이민국을 목적지로 입력하고 배차받은 툭툭을 기다리는데 머리 위로 굵은 빗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툭툭에 오르자마자 빗방울은 더 거세졌다. 돌돌 말려져 있던 비닐 커튼을 내리고 지퍼를 닫았는데도 억수같이 내리는 비에 툭툭 안으로도 비가 들이칠 정도였다. 이런 날씨에 멀리까지 운전을 해야 하는 툭툭 아저씨에게 괜히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오토바이를 우리끼리 직접 타고 나가야 했다면 비가 그칠 때까지 꼼짝없이 실내에 묶여 있어야 했었을 테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놈펜 시내를 가로질러 달리는 20분 동안 비는 점점 잦아들더니 이내 맑게 씻긴 하늘이 얼굴을 드러냈다. 툭툭 아저씨가 경로를 착각하신 바람에 이민국 주위를 빙빙 돌아야 했고 시원하게 퍼부었던 비 때문에 바닥이 전부 웅덩이로 가득했지만, 우리는 어찌어찌 목적지에 도착했다.


다른 나라 관공서가 다 그렇듯 왜인지 외국인을 기죽게 만드는 분위기 속에 반가운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VISA EXTENSION(비자 연장)"이 큼직하게 적힌 표지판에는 친절하게도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에 서 있는 건물이 우리가 찾던 곳이었다.


해당 건물 안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내부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우리가 작성했던 서류는 찍을 수 있었다. 무엇 때문에 왔냐는 질문에 관광비자를 연장하고 싶다고 말하니 먼저 서류를 작성하라며 경찰관이 이날 날짜 도장이 찍혀있는 종이를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서류를 다 작성한 후에 여권과 함께 경찰관에게 건네주니 혹시 가지고 온 사진이 있냐고 묻는다. 없다는 말에 그녀는 자신의 휴대폰을 꺼냈다. 흰 벽으로 붙으라는 말과 함께 A와 나의 사진을 차례로 찍은 뒤, 잠시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을 덧붙일 뿐이었다. 결국 미리 사진을 준비해가진 못했지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잠깐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다시 경찰관이 우리를 부른다.

-여권은 딱 일주일 후에 비자가 나오는 대로 와서 찾아가면 됩니다. 찾아갈 때는 이 서류를 꼭 가져와야 해요.


그녀는 우리에게 아까 작성한 서류의 사본을 건네주며 비자 연장 비용을 청구했다. 한 사람당 30달러.


-그럼 여행하면서 여권이 필요할 때는 이 서류를 보여주면 되나요?

내가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덧붙였다.

-해당 복사본 잃어버리시면 안 됩니다. 여권 찾을 때 꼭 필요하니까요.


단호하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 때문에 우리는 손에 받아 든 종이를 괜히 더 조심스럽게 쥐었다. 일주일째 되는 날 와서 여권을 받아가면 비자 연장 작업은 마무리된다. 줄이 없어 대기할 필요도 없이 일이 순식간에 마무리된 덕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한바탕 비가 쏟아지고 간 프놈펜은 언제 그랬냐는 듯 멀끔해졌지만, 밤부터 다시 비가 예보되어 있었다.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이민국에서 나온 우리는 우리가 늘 이용해 온 오토바이 대여점으로 향했다. 딱 하루만 더 오토바이를 빌리기로 한 거다. 여권을 이민국에 제출했기 때문에 이민국에서 준 서류를 여권 대신 오토바이 대여점에 맡기고 불과 이틀전까지 우리가 탔던 오토바이를 다시 골랐다.


내가 식중독 증상 때문에 속이 좋지 않았던 터라 A가 중간에 나를 새로 예약한 숙소에 데려다 주어야 했다. 뒤에서 늘 지도를 봐 주던 내가 없어 다시 오토바이 대여점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가 길을 잃었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이렇게 미안할 수가.


그치만 몸 컨디션이 너무 좋지 않았다. 온몸에 힘이 다 빠져 침대에 널부러지듯 누워있어야 했다. 증상은 끔찍한 숙취와 비슷했달까. 결국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밖에 나갈 힘을 낼 수 있었다.


메스꺼운 속에 뭔가를 집어넣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지만 뭐라도 먹어야 빨리 몸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나는 닭으로 만든 맑은 수프와 쌀밥을 주문했다. 고등학교 때 급식으로 나오던 닭곰탕과 비슷한 맛이 나는 것도 같았다. 수프는 맛있었지만 아픈 속 때문에 그릇을 다 비우지는 못했다.


A는 밤에 비가 온다는 소식에 신이 나 있었다. 숙소에 돌아와 힘없이 침대에 픽-하고 누워버리는 나를 본 그가 물었다.

-비 오는데, 드라이브 안 갈 거야?


비 오는데 오토바이를 왜 굳이 타러 나가고 싶냐고 물을까 했지만 아이처럼 잔뜩 신난 그의 표정 앞에서 나는 또 그냥 피식 웃음이 났다. 그가 유난히 비를 좋아하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내가 음식에서 고향 땅과의 연결고리를 찾게 되는 것처럼 그애는 비가 오면 자기가 나고 자란 곳의 정취를 느낀다는 걸 나는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는 비를 맞아도 좋다며 A는 내게 자기 우비를 건넸다.


전날까지 40도를 웃돌던 더위도 비 앞에서는 자취를 감췄다. 시원한 밤공기와 비 냄새에 기분이 좋았다. 드라이브를 할 겸 차를 마시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가려던 카페를 포기하고 물이 가득 찬 도로를 달리게 됐다.

신발이 다 젖을 만큼 들어찬 물을 가르며 야경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재밌어서 계속 웃음이 났다. 우리는 완전 물에 젖은 생쥐꼴인데 캄보디아 사람들은 정말 아무렇지 않게 도로를 누볐다. 뭐가 그렇게 웃겼는지 우리는 빗속에서 드라이브를 하는 내내 웃음을 멈추지 못했었다. 도시의 반짝거리는 조명이 찰랑거리는 도로 위로 춤추듯 반사되고 있었다.


결국 우리가 찾아간 곳은 버블티 카페였다.

숙소로 돌아와 포장해 온 버블티를 마시는데, 우와. 오랜만에 마시는 버블티는 어쩜 그리 맛있는지, 나는 내가 아프다는 사실도 잊고 두 눈을 반짝거리며 달달한 음료를 만끽했다. 원래 토핑이 들어간 음료를 싫어하던 A도 입맛이 바뀐 건지 연신 맛있다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역시 나갔다오길 잘했다.

나는 빗물에 젖어버린 신발을 드라이기로 대충 말린 후 벽에 비스듬히 세워두며 생각했다.


이제 귀국까지 9일.

어디서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은지 계획도, 마음도 채 정해지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지금까지 그랬듯 흘러가는 대로- 그때그때 우리의 마음을 따라가겠지.


그날의 버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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