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가득히 (3/12)
#3. 고귀한 야만인
미령이 침대에서 빠져나갈 때 박은 잠에서 깨어났지만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디가 미령이 화장실 문을 닫았을 때에야 눈을 떴다. 어두운 방안에는 보이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없었다. 온 세상이 이렇게 암흑이라면 나는 나를 어떻게 인식할까, 먼 미래에 우주의 팽창속도가 빛의 속도보다 빨라져서 아무리 좋은 망원경으로도 아무것도 관측할 수 없는 때에도 여전히 시간과 공간이 존재할까 그리고 그때 만일 인간 아니 지적생명체가 존재한다면 그들은 스스로가 존재하고 있음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박은 손과 발을 움직여 보았다. 이불이 작게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머리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감각기관들에서 약간 까칠한 것으로 해석되는 신호를 보내왔다. 먼 옛날 이런 감각을 가진 생명 종은 그렇지 않은 종에 비해 어떤 진화적 이익이 있었을까 생각하고 있을 때 화장실 문을 실눈 뜨듯 살짝 열어 놓고 나온 미령이 밖으로 삐져나온 박의 발을 이불로 덮어주고는 소리 안 나게 불을 끄고 호텔 방을 빠져나갔다. 박은 미동도 하지 않았고 닫힌계는 서서히 다시 평형을 찾아갔다.
회의 시작을 30분 남기고 갑자기 프로젝트 종료보고가 비공개로 전환되었고 장소도 변경되었다. 프로젝트의 규모가 클 뿐 아니라 줄줄이 후속 프로젝트들이 있을 것이라서 참석을 원하는 연구소 외부 인사들이 많았다. 평소에 사용하던 50명 들어가는 대회의실 대신에 강당에서 프리젠테이션을 위한 장비를 설치하고 마이크 같은 음향장비 점검은 물론 외부에서 온 손님들의 동선이 보안구역을 거치지 않도록 동선도 미리 짜놓았던 터라 오늘 회의를 준비했던 연구원들은 패닉 상태가 됐다.
장관이 회의장소로 이동하는 차량 안에서 오늘 회의가 강당에서 진행되고 참석자가 100명을 넘는다는 말을 듣자마자 소장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당장 외부인들 다 내보내고 연구소 내에서 가장 도청에서 안전한 곳에서 장소를 변경하라고 지시가 있었다.
직접 나서서 몇 번이나 준비상황을 확인했던 소장은 좀 실망한 듯했지만 이내 연단으로 올라가서 마이크를 잡고 장관의 지시로 불가피하게 종료보고를 비공개하게 되었다고 헛걸음하게 된 외부 손님들에게 사과를 하며 그들에게 지금 바로 연구소 밖으로 이동해 줄 것을 요청했다.
연단에서 내려오자마자 실무 최고책임자인 미령과 백엔드 개발과 실험을 담당했던 박 그리고 연구부장만 데리고 외부에서 도청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되는 음향실험실에 들어갔다. 곧 도착한 장관은 보좌관 한 명만 대동하고 들어왔고 다른 수행원들은 밖에 있도록 했다.
"자료 읽어봤습니다. 화면 띄우지 않으셔도 됩니다."
노트북을 화면에 연결하느라 케이블을 끼우고 있던 미령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하며 장관이 말을 시작했다.
"전송효율 9%는 획기적입니다. 중간보고에서 6.8%를 프로젝트 목표로 한다고 했을 때도, 속으로 해 볼만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죄종 결과가 9%대라는 전언을 듣고 솔직히 잠을 설쳤습니다. 우리나라의 미래가 바뀔 수도 있습니다. 뭐가 달라진 거죠? 어떤 부분이 변경됐는지와 지속시간과 스케일 그리고 후속 작업에 대해 상세하게 말씀해 주시죠. 그리고 혹시 다른 나라들의 진척상황을 알고 계시면 그것도 같이 말씀해 주십시오."
"저고도태양광 발전에 사용될 소재와 전기를 지상으로 보내는 전송방법은 6개월 전과 차이가 없습니다. 일부 개선이 있지만 유지보수성을 높이는 쪽이었습니다. 효율을 향상시킨 주된 변경은 소프트웨어 쪽에서 있었습니다. 기존의 인코딩 병렬화 루틴을 완전히 새로 만들면서 미들웨어를 레이어드 어레이로 만들어 n 차원 동적최적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드가 입체화되어 집적된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오버헤드와 스탠바이에는 좀 더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됩니다. 지속시간은 프로세서 성능과 숫자에 리니어 하니까 결국 무게의 결정하는 핵심이 됩니다. 타겟 용량이 결정되면 발사체의 페이로드를 감안한 최적값을 산출해서 적용할 계획입니다."
"스케일 하다는 말씀인가요? 양쪽에서 모두 그런가요?"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온도가 문제입니다. 위성 쪽에는 외부가 2.5 캘빈 이하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직 실험이 더 필요하기는 해도, 효율이 낮아지는 지점에서 디멘션을 정의하고 미들웨어를 추가하면 해결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다만 리시버 쪽에 상당한 열이 발생할 텐데 아직 효율적인 방안을 못 찾았습니다."
박은 점점 장관과의 대화에 빠져들었다. 박의 눈이 반짝이며 빛나기 시작했다. 오래전 인파 속에서도 미령이 박을 한눈에 찾을 수 있게 했던 그 빛이었다. 박은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무력감과 좌절감 그리고 미령에 대한 죄책감에 빠져있었다.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하루라도 일찍 집에 가서 쉬고 싶어 하는 미령을 끌고 와서 미친 듯이 섹스를 해댔던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미안했다. 이 세상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해 주고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온 힘을 다해 도와주는 미령에게 열패감과 질투를 느끼는 자신을 박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2년 전, 자신이 아니라 미령이 프로젝트의 전체 책임자로 승진했을 때 박은 진심으로 미령을 축하하고 앞으로의 성공을 축복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끊임없이 자신이 승진하지 못한 이유를 찾고 있었다. 그 추적의 끝에는 미령에 대한 질투와 시기가 있음을 깨닫고 박은 놀랍고 부끄러웠다.
미령은 정말 좋은 여자였다. 미령은 모든 면에서 박보다 우월했다. 만일 그녀의 부모가 어린 시절에 미령을 과보호하지 않았다면 미령은 보스톤에 도착해서 처음 만난 남자에게 빠지지 않았을 것이었다. 미령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었다. 미령이 모든 것을 버리고 한국으로 왔을 때 박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아름답고 지적으로 뛰어난 여자가 아무리 정략결혼이라고 해도 버젓이 아내와 자식까지 있는 자신을 만나기 위해 보장된 미래를 포기한 것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박은 미령에게 빠져들었다. 미령은 헌신적이었다. 어제처럼 연구소에서 박이 고집을 부려서 다른 연구원들과 트러블이 생길 때면 티 나지 않게 당사자들을 중재해서 박의 체면을 지켜주었고, 논문을 쓸 때마다 조금이라도 박이 기여하도록 해서 반드시 그의 이름을 공동저자들 사이에 끼워 넣었다.
박은 22살 여름에 입대를 한 달 앞두고 결혼식을 올렸다. 큰 사업체를 운영하는 두 집안의 결혼은 마치 M&A 같았다. 조건이 합의되자 모든 것이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박과 아내는 결혼식장에서 세 번째 만났다. 1살 연상이던 아내는 벌써 꽤 큰 사업을 하고 있었고, 한 집에 사업가는 한 명이면 충분하다면서 시아버지를 설득해서 박이 아버지 때문에 억지로 다니던 경영학과를 그만두고 천문학과로 옮길 수 있도록 해주었다. 최소한 1명의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박에게 요구하지 않았다. 그녀는 모든 것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참견하지 않고 필요한 모든 재정 지원을 할 것이지만, 딴 여자와 애를 낳아서 재산관계 복잡하게 만드는 것만은 절대 안 된다고 했다. 모든 면에서 박은 자유롭고 여유로웠다.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부모의 압박에서도, 미친 짓만 하지 않는다면 돈으로부터도 자유로웠다.
"발사체 관련은 아직 유동적입니다. 항공우주연구원에서 최종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독자적으로 추진하기는 어렵다는 쪽으로 결론이 날 것 같습니다. 예산문제이기도 하고 기술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개발한 차세대발사체 엔진이 뛰어난 성능을 보이고 있지만, 메탄을 연료로 사용한 스타쉽 랩터엔진은 아직까지 그 누구도 구현하지 못한 소형화와 경량화 그리고 효율화 모두에 성공한 사실상 퀀텀 점프에 가깝습니다."
"5년 안에 극복할 기술격차가 아니라는 말씀이신 거죠? 중국과 일본의 발사체 상황은 어떻습니까?"
"발사체 선도국이었던 일본 JAXA의 최근 행보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하야부사로 인류 최초로 소행성 샘플 채취에 성공하고 이어서 회전폭발로켓엔진의 테스트를 성공했음에도 실험데이터조작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서 논란이 지속되고 후속 연구를 위한 투자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원천기술을 가지고 있는 분야가 많아서 여전히 영향력을 유지하겠지만 일본도 독자추진은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박은 24평 아파트의 작은 방보다 작은 음향실험실에서 보낸 세 시간이 자신의 인생을 바꾸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박은 내내 똑똑하다는 사람들과 공부하고 일을 해왔지만 오늘처럼 치열하고 활력이 넘치는 보낸 것은 처음이었다. 박은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모든 것을 이해하고 다음 질문을 하는 장관의 해박한 지식과 직관에 감탄했다. 늘 윗사람에게 잘 보이는 일만 하려고 하는 간사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소장이 이 연구에 소요되는 연구비와 각종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특히 지난해 카르텔이라는 오명과 함께 일률적으로 연구개발 예산이 삭감되었을 때에도 리솦 연구소가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연구소장의 노력 덕분임을 알게 되자 그동안 뒤에서 소장을 욕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박은 반드시 이 일을 성공시키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보스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회의 내내 반복된 '우리'라는 말이 박의 마음에 걸렸다. 사실상 정치인인 정무직 공무원으로서 장관이 말하는 '우리'는 대한민국 일 것이다. 연구소장이 말하는 '우리'는 리솦 연구소와 직간접으로 연결된 사람들 일 테고, 미령이 말한 '우리'는 프로젝트팀만을 의미하는 아주 좁은 범위이거나 아니면 반대로 아주 넓고 많은 사람들을 포함할 것이다. 박은 세 사람이 말한 세 개의 서로 다른 '우리'에 모두 포함되지만, 미령은 어떤 '우리'에 속할 것인가.
박은 행크스 빌에서의 며칠이 생각났다. 퀴즈대회 결승 토너먼트에 참석하기 위해 퀴즈클럽 멤버 넷과 LA로 가는 중이었는데 기상악화로 비행기가 비상착륙을 했었다. 결국 슬라이드를 타고 탈출하느라 승객들은 비행기에서 가방 하나도 못 가지고 나왔었다.
한 밤중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 맨몸으로 떨어진 박은 문명이 한순간에 붕괴한 것처럼 생각됐다. 보안관과 지역경찰들이 비추는 플래시를 따라 버스를 탈 때도 사막 주변을 걸을 때도 믿을 사람은 우리 밖에 없다는 생각에 클럽 멤버 다섯은 손을 꼭 잡고 다녔다. 그들은 순전히 낯선 사람의 호의에 기대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이 두려워하던 낯선 사람은 처음 보는 조난자들을 위해 자신의 식당 문을 열고 냉장고에 있는 모든 음식물을 꺼내 줬다. 다른 낯선 사람은 담요와 수건을 줬고 또 다른 낯선 이는 집에서 마실 물을 가져다줬다. 어떤 여자애가 고기를 굽기 시작하자 클럽 멤버들의 손을 잡고 있던 미령이 일어나서 처음 보는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식탁을 닦고 의자를 옮겼다. 누군가는 청소를 하고 다른 사람은 모닥불을 피우는 사이에 다들 ‘우리가 되었다.
그날 만난 사람들 중에 유카와 교수도 있었다. 박은 대학원 전공을 결정하고 지도교수를 찾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 끼었다가 우리라는 개념과 국가 그리고 연대와 같은 말을 듣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뭔가 큰 충격을 받거나 깨달음을 얻은 듯 말했지만 박에게는 와닿지 않았다. 지금 같은 위기 상황에서야 어쩔 수 없다지만, 능력에 따라 살고 가지는 것이 가장 공정한데 왜 자신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이룬 것을 나누고 양보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다.
장관이 몇 시간 동안 음향실험실에 나오지 않자 바깥에 있던 일정비서관은 연신 다음 일정을 취소하거나 변경하는 연락을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마침내 문이 열렸고 일정비서관은 장관에게 차량이 대기하고 있다며 빨리 이동하자고 재촉했다. 그러나 장관은 잠깐만요 하면서 소장과 구석으로 가서 또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만족한 표정으로 보안등급 상향과 자료관리에 대해 이야기하며 차량에 탑승했다. 출발하는 듯하던 차가 다시 멈추더니 뒤창문이 내려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선 소장을 향해 장관이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아까 두 친구 훌륭하네요. 특히 여자분은 앞으로 정말 큰 일을 할 사람인 것 같습니다. 소장님께서 각별히 신경 써서 잘 이끌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발음이 좀 이상하던데 교포인가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