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가득히 (4/12)
#4. 빈칸을 채우려는 욕망
동료들은 그를 스미스 요원이라 불렀다. 영화 매트릭스를 본 몇몇이 시작하더니 그 명칭이 모두에게 굳어졌다. 예전처럼 그냥 코드명으로 부르든지 아니면 콜이라고 하라고 했지만 한번 시작된 밈은 계속 됐다. 사실 이런 장난은 위험한 것이었다. 말은 어느 순간에 생각의 빈틈을 파고들기 때문이다. 콜이 평소와 다르게 영화 속 인물처럼 행동하거나, 팀원들이 그런 모습을 기대할 경우, 팀 전체가 위험해질 수 있었다.
CIA 현장요원으로 산 지 벌써 30년이 됐지만 그동안 랭글리에 가본 것은 단 세 번이었다.
마지막 방문은 위장신분으로 들아가서 죽은 것으로 처리된 콜 자신에 대한 훈장 수여식에 참석해서 추서 된 훈장을 수령하는 친척 역할을 했다. 그 후로 콜은 국장에게서만 명령을 받고 단독 작전을 수행한 결과를 오직 국장에게만 보고하는 아웃바운드 OB가 되었고, 현장에서 그를 만난 사람은 모두 죽었기 때문에 콜이 액티브 상태임을 아는 사람의 숫자는 늘어나지 않았다.
다행히 콜에게 죽어야 할 사람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은 뉴 올리언즈 교외에 있는 아름다운 TPC 루이지애나 골프장의 그린을 관리하고 레슨을 원하는 사람에서 골프 스윙을 가르치는 티칭 프로이자 골프 프로페셔널로 지냈다.
만족스러운 생활이었다. 단독작전이 있는 경우에는 골프 투어에 참가하기 위해 레슨 일정을 바꿔달라고 하면 다들 쉽게 날자와 시간을 맞춰줬고, 일반인으로 보기에는 과한 평소의 운동량과 근육에 대해서도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았다. 살아서 은퇴를 할 수 있다면 이렇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콜은 알고 있었다. 일상이 소중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현장요원에게는 위험신호라는 것을.
국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을 때 콜은 누군가의 어설픈 작전이 아닌가 의심했었다.
자칫하면 그동안 콜이 수행했던 미제사건들과 CIA과의 연관성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국장이 직접 OB를 만나자고 하는 일은 없었다. 국장은 물론 CIA 전체에도 매우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곰곰이 따져보던 콜은 회사 내부에 무슨 문제가 있음을 직감했다.
누군가가 콜을 제거하려고 했다면 굳이 이렇게 번거로운 일을 꾸밀 이유가 없고, 그들이 콜을 미끼로 국장을 유인하려고 했다면 이 바닥의 생리를 모르는 초짜 멍청이일 테니 콜 자신이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일세. 나올 줄 알았어."
"그렇죠. 그들이 저를 노렸다면 멀리서 총을 쐈을 겁니다. 저는 국장님을 유인할 수 있는 미끼가 아니니까요."
"그래, 바로 그거야. 요즘에 자네 같이 경험 있고 침착한 요원을 찾을 수가 없어. 다른 요원들이었다면 여기에 안 나타나고 도망을 쳤거나 저기 멀리서 저격총을 들고 설치다가 우리 편 총에 맞아 죽었을 거야. 콜, 할 일이 있네. 자네가 팀을 맡아줘야겠어."
"공작팀을 맡으라는 말씀이신가요? 너무 위험합니다. 저는 단독업무만 수행한 지 너무 오래돼서 팀 프로젝트에 감이 떨어집니다. 미션도 실패하고 팀 전체를 위험하게 할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 그리고 자네가 팀프로젝트를 피하려는 이유도. 하지만 요즘 요원들은 자꾸 영화를 찍으려고 해. 심지어 교관들도. 미합중국의 미래가 달린 일이네. 자네가 필요해."
사실 그랬다. 현장은 영화나 소설과 달랐다. 요원들은 격투나 사격의 천재적 실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복잡한 암호나 비밀문서를 한번 보고 바로 외우는 그런 사람들도 아니었다. 존 윅 같은 능력을 한번 보여줄 수는 있는 요원은 있을지 몰라도 그런 행동을 계속하는 요원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일찍 감치 죽어버리니까.
현장에서 중요한 것은 영화 같은 전투능력이나 천재적인 두뇌가 아니었다. 보통 사람 한 명, 많아야 두 명을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피지컬이면 충분했다. 두뇌보다는 관찰력이 중요했고, 미션을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질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끈기가 가장 중요였다.
콜이 공작팀을 떠났던 이유도 영화처럼 일하려고 했던 팀원들이 다 죽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현장은 누구에게나 어렵고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자원을 쏟아부어도 미션의 성공률은 낮았다. 혼자서 하는 단독임무든 팀 프로젝트든 결국은 끊임없이 오류를 수정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솔레이 Solei 작전 기억나나? 완벽하게 준비했는데 완벽하게 실패했던?"
"네 기억합니다. 제가 비행기 옆자리에 앉으려고 했는데 그 교수가 30분 전 비행기를 타고 출발해 버렸죠. 그래서 LA팀이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비행기는 다른 공항에 내렸고, 나중에 다시 시도하려 했는데 그 교수가 우리가 건드리면 안 되는 중국 쪽 블루핀과 같이 있는 바람에 작전이 취소됐었죠. 몇 번 더 시도했지만 성공적이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맞아. 그 교수가 다시 수면에 떠올랐어. 그 교수가 미국이 아닌 다른 채널로 연결될 가능성이 커졌어. 저쪽 채널에는 우리가 회피했던 블루핀이 있어. 위험한 상황이야. 교수는 제거하고, 블루핀은 우리 쪽으로 확보해야 해."
20년 전의 사건이었다. 미국의 차세대 에너지 개발에 핵심역할을 하던 일본인 교수가 모종의 사건으로 미국을 떠나려는 조짐이 보였을 때 콜의 팀에게 그를 사고나 자연사로 위장해서 제거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모든 준비가 완벽했는데 그 교수가 갑자기 일찍 출발해서 놓치고 말았다. 비행기 도착지에서 다른 팀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비행기가 난기류로 LA가 아니라 행크스빌 공항에 착륙하는 바람에 작전 실행이 안 됐다.
결국에는 LA공항에서 버스로 밀어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보호대상인물이 교수와 함께 있는 바람에 외교문제를 우려한 당시 국장이 작전을 취소했었다. 당시 콜은 소방대원으로 위장하고 행크스 빌에 갔었는데, 그의 눈에 교수와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참가한 사람들처럼 보였었다.
"바바라가 상세한 정보를 줄 걸세. 그리고 공작팀이 자네를 기다리고 있네."
국장은 명함 하나를 건네주고 돌아갔다. 콜에게 선택권은 애초에 없는 것이었다. 콜은 자신이 없는 동안 누가 골프장 관리와 레슨을 대신해 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갑자기 몸이 굳어졌다. 자신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일상에 욕심이 생기고 돌아올 생각을 하는 것은 사치였기 때문이었다. 마치 영화에서 가족사진을 보여주는 사람이 반드시 다음 전투에서 죽어 버리듯이. 콜은 자신이 그동안 너무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나약해진 탓임을 알면서도 새로 만든 소중한 인생을 버리기 아쉬웠다.
콜에게 자신을 우주항공학 박사라고 소개한 바바라는 위험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럴듯하게 포장했지만 바바라의 목적은 미국의 힘을 빌어 우주태양광사업을 독점하는 것이었다. 그녀를 움직이는 것은 돈이었기 때문에 바바라가 국가적 이익을 위해 일하는 콜과 공작팀에게 적합한 카운터파트인지 의문이 들었다.
바바라가 원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미국보다 앞서 있는 한국이 중국이나 일본과 협력체제를 구축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과 주요 인물을 미국으로 데리고 오는 것이었다. 세계 최강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미국이 사람을 훔쳐오지 않으면 미국이 한국과의 기술격차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바라라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콜은 그런 판단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첸 메이링을 미국으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기술 자료를 가지고 온다면 최상이지만 첸 메이링을 온전하게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 비어 있는 빈칸들을 모두 채울 수 있습니다.”
첸 메이링이라는 이름에 콜의 머릿속에는 빨간 불이 켜졌다. 솔레이 작전을 취소하면서까지 회피했던 블루핀이 바로 첸 메이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바닥에는 아무런 규칙도 없어 보이지만 실상은 등가교환이라는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법칙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상대에게 어떤 피해를 입힌다면 반드시 상대에게 다른 무엇인가를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일 주고받은 것의 등가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누군가가 치명적인 손해를 입을 때까지 사건은 계속 커지게 된다는 것이 이 바닥의 법칙이자 나름의 정의였다.
누가 첸 메이링을 블루핀으로 보호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녀를 본인의 의사에 반해 미국으로 데리고 오려면 상대방이 만족할만한 등가물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콜이 볼 때 바바라는 자신의 빈칸을 채우는 것에만 급급할 뿐이지 어떤 희생도 할 사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