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

태양은 가득히 (5/12)

by 달을보라니까


#5.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


리솦 연구소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예산 확보에만 1년 이상 걸릴 거라 생각했던 후속 연구 통합 프로젝트가 바로 발주되었고, 연구소 운영 전반에 걸쳐 변화가 일어났다.


보안등급이 재조정됨에 따라서 모든 연구원들의 자료 및 기기에 대한 접근권한이 새로 업데이트되었고, 물리 보안 장치들도 요소요소에 설치되었다. 규정은 있으나 잘 지켜지지 않던 중요 자료와 결과물의 통합관리가 철저하게 적용되기 시작해서 이제는 누구도 자신의 개인 컴퓨터에서 자료를 독점하거나 관리할 수 없었다. 서버에 올라간 모든 자료는 접근권한에 따라 차등관리되었고 언제 누가 자료에 접근했으며 어떤 작업과 변경이 있었는지가 명확했다.


더구나 서버는 실시간 크로스 백업하도록 구현되었기에 예상치 못한 사고나 정전 등으로 인한 자료의 손상이나 손실을 염려할 필요가 없어졌고 만의 하나라도 연구소가 폐쇄되거나 접근이 불가능해지는 비상시에는 원격지에서 모든 업무를 중단 없이 운영할 수 있는 재해복구체제도 갖춰졌다. 일이 늘어난 만큼 연구원 숫자도 늘어났고 옆 건물의 일부도 임대해서 필요한 연구공간을 확대했다.


불과 석 달만에 일어난 깜짝 놀랄만한 변화였다. 특히 모든 연구원들이 기뻐했던 이유는 예전처럼 자본예산은 늘이면서 인건비는 고정하거나 오히려 줄여서 사람을 갈아 넣는, 눈에 보이는 성과만 챙기는 얄팍한 변화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변화였다. 불과 몇 달 사이에 이 모든 것이 진행되는 것을 보고 박은 혀를 내둘렀다.


특히 지금 대통령과 집권 여당이 과학계를 R&D 예산을 끼리끼리 나눠먹는 카르텔쯤으로 취급하는 시점에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모두에게 좋은 소식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모든 연구원들은 당연히 미령이 이 후속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저녁 무렵에 내부망에 공지된 새 업무분장을 본 연구원들은 술렁댔다.


미령이 그동안 자신이 해오던 연구주제나 관심사와는 동떨어진 발사체 관련한 국내 현황과 전망을 파악하고 향후 국제 동조를 조율하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동안 미령이 해냈던 성과들을 생각하면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미령을 대신한 사람은 바로 박이었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이 모니터에서 고개를 들어 서로를 바라봤다. 두 개의 서로 다른 당혹감이 엇갈려 지나갔다.


"축하해요. 잘할 거예요. 성공을 빌어요"


먼저 미령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박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박이 채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인사발표를 본 몇몇이 박에게 다가와서 악수를 하고 축하하느라 주변이 분주해졌다. 사람들 사이로 미령은 가방을 챙겨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본 박은 사람들에게 고맙습니다 고마워요를 연발하며 자리를 벗어나 미령의 뒤를 쫓아갔다.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에 진동과 함께 미령의 메시지가 왔다.


'오늘 컨디션이 좀 안 좋아서 논문 서치는 못할 것 같아요.'


논문 서치는 두 사람이 밤을 같이 보내기로 할 때 쓰는 두 사람만의 암호였다. 주차장까지 뛰어가서 미령에게 집까지 운전해 주겠다고 했지만 미령은 어차피 운전은 거의 자동이기 때문에 괜찮다고 사양하며 차에 올랐고 차는 곧 전기차 특유의 가상 엔진소리를 남기고 연구소를 빠져나갔다.


자동차 키를 가지러 다시 사무실에 올라가는 사이에 박의 핸드폰에는 축하 메시지들이 쏟아졌고 사무실에 들어서자 아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축하한다며 저녁에 축하주를 하자며 박을 둘러쌌다.


박이 미령의 아파트에 도착한 것은 9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막무가내로 손을 잡아 끄는 실험팀의 진박사를 비롯한 십여 명의 연구원들과 저녁과 함께 술 몇 잔을 함께 했다. 다들 즐거운 분위기였다. 취기가 돌자 차기 연구소장으로 발탁된 소감을 말하라는 진박사의 짓궂은 장난도 있었다. 모두가 달라진 연구소의 위상과 정부의 적극적인 투자에 고무되어 앞으로의 연구와 발전방향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나눴다. 간간이 미령의 이름이 언급되기도 했지만 누군가 얼른 대화의 주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고, 누군가는 다음에 진급하면 된다고 했다. 누구도 미령이 자신의 연구를 뺏겼다는 사실은 대놓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박은 주차장에서 아파트 도어벨을 누르려다가 멈칫했다. 몇 호였더라 생각하다가 미령과 연인으로 지낸 지 7년 동안 미령은 자주 박의 집으로 와서 밤을 보내곤 했지만 자신이 미령의 집에 들어가 본 게 몇 번 되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미령은 박의 집에 머리끈 하나도 남기고 가지 않았었다. 그동안 박이 만났던 여자들이 박의 집에 클렌징 크림부터 마스카라 같이 자주 쓰는 물건은 물론이고, 빨래할 때 같이 돌리라며 벗은 속옷을 두고 가기도 했던 것을 생각하면 미령은 참으로 꼼꼼하고 배려심 있는 사람이었다. 박은 자신은 이미 정략결혼의 조건들을 충족했으므로 드라마처럼 자신의 아내가 들이닥쳐서 머리채를 잡을 일은 없을 것이라며 살림을 합치고 같이 살자고 여러 번 말했었다. 그때마다 미령의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건 옳지 않다고.


"그래요. 화가 난 것은 맞아요. 내 것인 줄 알았던 것이 내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됐으니까요. 그렇지만 당신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누구에게나 이건 인생을 걸만한 기회잖아요. 다른 사람보다 당신이라서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해요. 나에게 미안해하지도 사과하지 않아도 않아도 돼요."


꽤 오랫동안 대화를 하는 동안 미령은 언젠가처럼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녀의 기품이 힘들고 어려운 날 더욱 돋보였다. 미령이 피곤하다고 말했을 때 그만 가 달라는 뜻인지 알았지만 박은 못 알아들은 척 주방으로 가서 죽을 끓였다. 고기나 달걀 같이 미령이 기운을 차릴 수 있는 것을 넣고 싶었지만 미령의 냉장고에는 생수밖에 없었다.


내내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지 미령은 박이 만들어준 맛없는 죽을 끝까지 다 먹었다. 옆에 앉아 미령이 먹는 모습을 보던 박의 눈에 딱딱해 보이던 미령의 목덜미가 조금씩 부드워지는 게 보였다. 박이 빈 그릇 들고 일어서려고 할 때 미령이 손을 뻗어 박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온기가 돌아온 것인지 죽그릇을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따뜻해진 미령의 손이 얼어 있던 방 안의 공기를 일순간에 녹이는 것 같았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미령의 눈을 바라보던 박의 얼굴이 점점 미령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미령은 아직 자고 있었다. 밖으로 드러난 미령의 어깨에 이불을 덮어주고 손을 뻗어 휴대폰을 잡았다. 휴대폰에 쌓여 있는 많은 메시지 중에 그중에 잠시 이야기 좀 하자는 연구소장의 메시지가 있었다. 인사발표가 내부망에 뜬 직후에 온 메시지였다. 화들짝 놀랐지만 회신을 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일 뿐 아니라 잠이 든 미령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소장은 조경 공사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공사 장비와 식재를 기다리는 나무들과 잔디 떼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곳이었다. 굳이 왜 여기서 보자고 했을까.


"바로 회신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어제 팀원들과 같이 있느라 아침에야 메시지를 봤습니다. 인사발령에 깜짝 놀랐습니다. 높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얼떨떨합니다. 절대로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래요. 고민이 많았어요. 하지만 잘하시리라 믿습니다. 아시겠지만 저 혼자만의 결정은 아닙니다. 장관님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 프로젝트에 거는 기대가 큽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천박사와 어떤 관계입니까?"


박은 당황스러웠다. 언제 가는 이런 질문을 받게 될 것을 알았기에 머릿속으로 여러 상황에 맞을법한 대답들을 준비해 뒀지만 막상 질문을 받다 말문이 막혔다. 어쩌면 자신의 인생과 커리어에 가장 중요할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책임을 맡게 된 날에 직속 상사에게 이런 질문을 받는다는 시나리오는 없었었다.


사내 연애 그리고 품위유지가 해고와 기타 인사조치의 대상이었던가 하는 생각과 인사발표를 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왜 이걸 공식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이렇게 으슥한 데로 불러내서 물어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푸드덕 새가 날아가는 소리가 났다. 소장은 잠시 기다리다가 말을 이어갔다.


"사실 천박사가 처음 리솦에 지원했을 때부터 많이 이상했었어요. 최연소 교수가 되었을 뿐 아니라 테뉴어를 받을 게 거의 확실했는데 갑자기 그동안 이룬 모든 것을 버리고 여기로 와서요. 물론 인터뷰에서 천박사가 설명을 아주 잘했어요. 강의나 이론연구보다는 현장에서 일하고 싶고, 아시아가 좋을뿐더러 리솦의 우주태양광발전 연구가 다른 곳에 비해 훨씬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정말 조리 있고 흥미 있는 게요. 하지만 그때 말하지 않은 게 있어요. 천박사의 부모님이 누군지 알고 있었나요?"


상황을 보니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당장 인사조치되는 일은 일어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만일 그랬다면 검증 위원회에서 사전에 박을 후보 명단에서 제외시켰을 테고, 나중에 알았다면 인사발표를 며칠 미룰 수 있었으니까.


"하이커우 미션힐즈에 천박사와 골프 치러 갔다가 천박사 부모님을 우연히 마주친 적 있습니다. 두 분 모두 과학관련한 일을 하신다고 하셨는데 원창 우주 센터에 민간 로켓 발사 관련해서 출장을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삼사 년 전 코로나가 막 끝나던 때였습니다."


한 때 세상에서 가장 큰 골프리조트로 이름났던 미션힐즈는 입구부터 장엄했다. 8개 코스 144홀을 완주한 사람에게만 준다는 아이언 맨 증서를 꼭 받기로 다짐하며 박과 미령은 오래간만의 휴가를 시작했다.


오고 가는 시간을 빼면 4일이 채 안 되는 동안 8 라운드를 하기 위해서 둘은 아침 일찍 일어나 18홀을 마치고 돌아와서 찬물로 샤워하고 아주 잠깐 쉬었다가는 점심 먹고 오후 라운드를 시작해서 해 질 무렵에야 리조트에 돌아오곤 했다. 강행군이었지만 둘은 모두 즐거워했다. 문제는 박이 밤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면 언제나 미령을 가만두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3일째 되는 날에 미령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한 사람이라도 아이언맨 증서를 받아야 한다며 등을 떠미는 미령을 혼자 두고 라운드 하는 박의 마음도 편하지 않았지만 한 홀 두 홀을 지나면서 미령의 생각은 까맣게 잊고 오전을 보냈다. 박이 오전 라운드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새 몸이 좀 나아졌는지 미령은 로비 라운지에 앉아서 박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에는 골프 대신에 오래간만에 둘이 꼭 끌어안고 낮잠을 자자는 박의 말에 기분이 한층 나아진 미령은 그러자고 하면서도 슬쩍 눈을 흘기며 박에게만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정말 손만 잡고 자는 거야 하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봐도 행복한 신혼부부 같이 꿀 떨어지는 모습이었다. 웃음과 농담을 주고받던 미령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해 지더니 엄마, 아빠라고 외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천박사의 부모가 왜 이슈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분들과 점심을 같이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나눴는데 스마트하시고 유머 있는 분들이었다는 것 말고는 딱히 기억나는 게 없습니다."


"첸 쉐첸 박사가 누군지는 아시죠? 첸 쉐첸의 손녀가 천박사 아니 첸 메이링 박사입니다. 천박사의 어머니는 현재 중국 국무원 총리이고 전직 국가안전부 국무위원입니다. 우리로 친다면 전직 국정원장에 현직 국무총리의 딸입니다. 첸박사 아버지 공식 직함이 없을 뿐 미국 항공모함들이 중국 본토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만든 둥펑을 만든 사람이고요. 그런 사람들이 딸과 딸의 애인을 우연히 만난다는 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두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겁니다"


소장과 이야기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박은 혼란스러웠다. 미령이 자신의 부모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이해할 만했다. 이미 모든 면에서 돋보이는 미령이 굳이 그런 걸 내세울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런 미령 앞에서 정략결혼 운운하며 자신의 부모가 대단한 사람인 척했던 자신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렸다. 중국 국가 서열 10위 안에 드는 권력자를 부모로 둔 미령의 눈에 자신의 그런 돈자랑이 얼마나 같잖게 보였을까 싶었다. 비록 그런 허세가 연구원 월급으로는 부담될만한 여행을 가거나 비싼 음식을 먹을 때 돈을 내려는 미령을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미령의 부모가 자신과 미령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면 오싹하기도 했다. 트루먼 쇼의 주인공처럼 지금까지의 그들이 이룬 성취 뒤에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자 바지 지퍼가 열림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돌아다닌 것 같았다. 그에 비하면 소장이 자신과 미령의 관계를 아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미령은 평소처럼 출근해서 평소와 다르지 않게 행동했다. 마음을 정리한 듯했다.


업무 인수인계를 위한 회의에서 깔끔하게 인계 대상과 절차 그리고 일정을 깔끔하게 정리해서 박을 포함한 모든 참석자에게 다음 주까지 해야 할 등등을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회의 시작 전에는 미령의 눈치를 살피던 사람들의 눈빛이 회의장을 나설 때가 되자 박이 저 정도의 업무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눈빛으로 바뀐 듯했다. 박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미령에게 자신이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모두에게도 그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미령을 다른 업무로 발령 낸 이유가 업무 능력이 아니라 국가적 사업을 외국인에게 맡길 수 없다는 장관의 의지 때문이었다는 소장의 말을 생각하면 더마음이 급해졌다.




"지금까지 했던 거 폐기하고 이 데이터 가져다 써요. 그러면 충분히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래프의 스케일을 조정해서 차이가 눈에 보이도록 하고, 축을 하나 더 넣어서 히스토그램을 추가하면 모든 정보가 그래프 하나에서 요약되기 때문에 심사하는 교수님들이 연구가 적절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게 될 거예요."


미령은 박의 박사학위 논문 준비를 도와줬었다. 박이 계속 실패하던 실험을 몇 가지 조건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성공시켰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실험결과를 어떻게 요약하고 정리해서 발표할지에 대해서도 지도교수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짚어줬다. 엄청나게 많은 데이터를 정리하기 위해 끙끙대고 있던 박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미령이 펜을 들어서 선을 하나 그어 주기도 했다. 그러면 혼돈의 카오스였던 데이터가 아름다운 추세를 그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러 번의 고비마다 미령이 나타났다. 어떤 문제에 대해 박이 며칠째 고민했지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점심을 먹으러 나간 사이에 우연히 연구실에 들린 미령이 박의 책상 위에 흩트려져 있는 자료와 메모들의 순서와 방향을 바꿔 놓은 적도 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박은 질서를 발견했다.


미령의 도움을 받았다고 해서 박이 멍청하거나 남들보다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학사 정책상 별도의 명칭을 부여하지 않았을 뿐이지 Summa Cum Laude 같은 최우등 졸업에 해당하는 Dean’s list에 박은 항상 최상단에 있었다. 전 세계에서 온 수재들이 모인 곳에서 늘 박은 제일 앞쪽에 있었다. 박은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만만했으며 어느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박사학위를 마칠 무렵에는 가끔씩 툭툭 던지는 미령의 한 두 마디가 자신이 해결하지 못해서 끙끙대는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미령의 존재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연구실에 있는 사람들 다 들리도록 농담을 자주 하고 가끔은 그들을 다 끌고 다니면서 밤늦도록 파티에 가기도 했지만 언제 선가부터 미령이 있는지 슬쩍 살피곤 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자신이 미령을 견제하고 있거나 아니면 주눅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박이 박사 학위를 마치자마자 사업가인 아내는 한국에 있는 리솦 연구소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모든 상황을 고려했을 때 에너지 분야가 유망하고 아직 외부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한국이 미국이나 다른 나라들보다 앞서 있으며 향후 10년을 생각한다면 그 격차가 뛰어남을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이라는 사업가다운 판단이었다. 연구소의 위치가 집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도시에 있어서 따로 살아야 한다는 것과 연구원 월급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점은 아내 입장에서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람들을 보내서 자동차고 뭐고 다 처리하도록 할 테니 짐 싸고 그런 거 하지 말고 당장 필요한 물건만 몇 개 여행가방에 챙겨서 일주일 후에 한국으로 들어와서 사무실로 출근하라는 아내의 지시에 박은 기가 막혔지만 이미 모든 세팅이 완료된 상태였다.


일주일간 박은 매일같이 환송파티를 했다. 젊은 날의 기억을 함께 했던 모든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들과 언젠가 어디선가 다시 만나자고 악수를 하고 술잔을 기울이고 부둥켜 안기도 했다. 어느 파티에서 미령을 봤지만 박의 옆에는 FWB였던 젠이 있었다. 박은 어쩐지 미령에게 젠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미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 날에는 잊지 못할 기억을 만들자는 젠과 젠의 친구들과 클럽과 바를 오가며 환락의 밤을 보내다가 머리가 아파서 눈을 떠보니 박의 아파트였고 젠과 대여섯의 남자와 여자가 아무 데나 쓰러져 자고 있었다. 지난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얼굴을 찡그리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려 할 때 커튼 사이로 아침 햇살이 새어 들어왔다. 갑자기 모든 것이 역겹게 느껴졌다. 벌거벗고 있는 자신의 모습도, 젠도, 이름 모르는 젠의 친구들의 벗은 몸도 다 메스꺼웠다.


갑자기 미령이 보고 싶었다. 만나서 무슨 말을 할지 몰랐지만 미령이 미친 듯이 보고 싶었다. 박은 바닥에 떨어진 셔츠와 바지를 찾아 입고 내려가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