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가득히 (6/12)
#6. 기억은 독점이다
미령은 1학년이 수강할 수 있는 유카와 교수의 수업을 찾아봤다. 선수과목 없이 바로 수강할 수 있는 고전역학과 양자역학 중에서 양자역학을 신청했다. 고전역학은 이미 고등학교 AP로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수강생이 숫자가 좀 적을 것 같았다. 공과대학 특성상 기본 물리학과목들은 모든 학생들이 수강했기 때문에 수백 명이 듣는 대형 강의가 많아서 질문 하나 제대로 하기 어려웠다.
미령의 기대와는 달리 양자역학 역시 수강생이 200명이 넘었고 앞자리에 앉기는 하늘에 별따기였다. 하필이면 강의실이 이전 수업 장소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수업이 끝나자마자 뛰어가도 제시간에 도착할 수 없었다. 미리 자전거를 사서 달려보면서 실제 이동시간을 확인까지 하는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캠퍼스를 가로질러 첫 수업에 도착했을 때 이미 수업은 시작했고 강의실은 꽉 차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살금살금 뒷자리로 향하는데 저쪽 끝에 앉아 있는 박의 얼굴이 보였다. 퀴즈클럽 멤버들과 함께 추수감사절에 LA 퀴즈 대회 결승에 갔다 온 후 두 달 만에 처음이었다.
"이 수업 들으시는지 몰랐어요. 오랜만이네요. 겨울에는 한국에 갔었나 봐요?"
"응 미령 잘 지냈어? 집에 일이 좀 있어서 기말 시험 마치자마자 서울에 갔다가 어제 돌아왔어. 과를 바꾸다 보니 들어야 할 1-2 학년 수업이 많아. 천문학과 하고 물리학과 겹치는 게 꽤 있어서 이번 학기에 같이 듣는 수업이 몇 개 될 거야. 친구들이 점심 같이 먹자고 해서 가봐야 하는데 다음 주에 수업 끝나고 점심 먹으면서 얘기하자."
잠깐 박과 이야기하는 사이에 유카와 교수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인사를 드리면서 지난겨울 방학 동안 도서관에서 찾을 수 있는 모든 유카와 교수의 책과 글을 읽었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수업은 재미있었다. 리처드 파인만이 모든 물질의 구성요소이자 영원히 운동하고 있다고 말했던 원자에 대해 닐스 보어의 모형과 에너지 준위의 불연속성에 대한 개요와 왜 보어 모형을 확장하려고 하면 에너지 보존과 운동량 보존의 법칙을 위반하는가에 대해 유카와 교수가 칠판에 모형의 그림을 그리고 간간히 아인쉬타인과 막스 플랑크, 맥스웰 등의 이름을 적어가면서 설명했다.
지난겨울 행크스빌의 모닥불 주변에 둘러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는 나이도 하는 일도 다 다른 스무 명 남짓이었고 지금은 지금은 이백 명이 넘은 전 세계에서 온 수재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지만 유카와 교수는 마치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따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는 듯 편안하고 다정해 보였다. 비록 수업이 끝난 후 칠판에 적혀 있는 숙제 목록은 그렇게 다정해 보이지 않았지만.
리솦2가 시작된 지 넉 달이 지났다. 설비 확장과 프로젝트가 동시에 진행되었고 발사체 관련도 별도로 추진해야 했기 때문에 아무리 인력과 자원을 충원했다고 해도 인력과 시간은 늘 부족했고 연구원들이 당연한 듯 야근을 거듭하면서 연구소는 24시간 내내 불이 꺼지지 않았다. 박은 미령에게서 인수받은 리솦2의 단기 목표와 중기 목표 그리고 36개월 후에는 최종적으로 어디에 도달할 것인지 체계적으로 구분하여 각 단계에 맞는 세부 목표와 체크포인트를 설정했다.
관련된 연구원들과 장관을 포함한 주요 의사결정자를 모두 초청해서 킥오프 행사를 하면서 박은 앞으로의 3년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을 여러 차례 강조했고, 앞으로의 1년 동안은 다음 단계에서 바로 쓸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데 전념할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리솦1에서 나온 결과라고 해도 그냥 넘기지 말고 반드시 다시 검증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기 위해서 디테일에 숨어있는 악마를 피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 것을 모두에게 거듭 강조했다.
일부에서는 이미 검증된 것을 왜 재검증해야 하냐는 푸념이 나왔지만 박은 물러서지 않았다. 리솦1에서 자신이 했던 실험과 검증을 본인이 다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다른 방법으로 검증하여 최소 2명 이상이 four eyes principal에 따라 확인된 것만 리솦2에서 적용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더 많은 사람이 웅성거렸고 한 연구원이 손을 들고 그건 엄청난 노력과 비용을 들여서 같은 일을 반복하는 소위 바퀴를 새로 만드는 inventing the wheel이라며 반대했으나, 박은 우리는 바퀴를 새로 만드는 게 아니라 바퀴가 잘 만들어졌는가와 얼마나 많은 짐을 싣고 달릴 수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라며 반대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박이 덧붙였다. '우리는 이 방향으로 갑니다. 동의하지 않는 분은 지금 바로 리솦2 프로젝트를 떠나 주십시오.'
"박사님,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어떤 것을 먼저 말씀드릴까요?"
"저는 언제나 좋은 소식을 먼저 듣고 싶습니다. 그래야 즐거운 시간의 비율이 조금이라도 더 크지 않겠어요?"
"좋은 소식은 리시버 쪽의 발열 이슈를 리솦1에서 과대 계상했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 샘플데이터를 외삽했기 때문에 발열 예상치를 실제보다 상당히 많이 잡았습니다. 물론 당시의 예산과 일정을 감안하면 옳은 선택이었습니다만 지나치게 보수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이번 재검증은 몬테카를로 시뮬레이션을 사용해서 샘플의 숫자를 충분히 확보했고 소볼 프로세스를 이용했기 때문에 평균회귀로 인한 착시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아직 최종 결과를 예측할 단계는 아니지만, 리솦1에서 발표했던 최종 효율이 더 개선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 그거 정말 좋은 뉴스네요! 진 박사님 팀이 해냈군요! 천 박사가 보고서 각주에서 '과대 평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지적한 리시버 발열 문제를 해결하다니!"
"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나쁜 소식도 들어보시죠."
박은 진박사의 중간보고를 마치고 나오면서 착잡한 심정이 들었다. 진박사가 말한 나쁜 소식은 좋은 소식의 정확히 반대였다. 위성이 있는 곳의 온도가 평균 2.5 캘빈이기 때문에 송신 쪽의 발열 문제는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위성이 자리 잡을 저궤도의 온도는 그보다 높았고 완전한 진공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발열 요소가 더 높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비록 낮은 확률이기는 해도 태양의 흑점활동이 예상치를 상회하는 날 수가 연속으로 8일을 넘어가게 되는 경우에는 우주태양광패널 전체가 손상될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 전체 시스템이 붕괴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발전효율을 높이기 위해 패널의 민감도를 높였기 때문에 급격한 온도변화에 취약하고 태양에서 방출되는 고에너지 입자에는 더더욱 취약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의 합이 0이라면 다행이지만 이번 경우에는 나쁜 소식이 좋은 소식을 압도했다. 아무리 낮은 확률이라고 해도 궤멸적 피해를 입게 될 수도 있는 시나리오를 배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이 포인트도 미령의 각주에 적혀 있었다. 미령을 만나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미령은 어제 발사체 관련 미팅을 위해 고령에 출장 가서 저녁 늦게나 돌아올 예정이었다.
박은 핸드폰을 꺼내서 문자를 보냈다. ‘발열문제 논문 서치 요망’.
유카와 교수는 매주 퀴즈를 봤다. 교수가 미리 준비한 문제를 OHP에 띄우면 5분 내에 답을 적어서 조교에게 제출해야 했다. 5분이 지나 땡 하고 스톱워치가 울리면 제일 뒤에 서있던 조교들이 빠른 걸음으로 교단 쪽으로 걸어가면서 학생들이 들고 있는 답지를 거둬다가 채점해서 수업이 끝날 무렵 유카와 교수에게 전달했다.
교수는 조교가 뽑은 가장 좋거나 의미 있는 답안들을 쓱 훑어보고는 그중에서 하나를 골라 OHP에 띄워서 학생들에게 설명하는 것으로 수업을 마무리했다. 퀴즈는 항상 정말 어려웠다. 책이든 뭐든 참고해도 된다고 했지만 적어도 1-2 분은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써야 했기 때문에 책을 뒤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답안지에 아무것도 적지 못한 학생들이 부지기수였고 몇 주 연속으로 백지를 낸 몇몇은 울기도 하고 벌떡 일어나 강의실을 뛰쳐나가기도 했다.
미령과 박 그리고 인도계 학생이 제출한 답안지가 번갈아 OHP에 올라갔다. 박의 답안은 교과서를 예술처럼 요약했고, 인도계 학생의 답안은 수열을 덧셈과 뺼셈으로 푼 듯 어마어마한 계산능력과 암기 능력을 보여주었다. 유카와 교수는 미령의 답안에 대해 "독창적이며 확장 가능성이 돋보인다"라고 평가했다. 누가 강의실의 슈퍼 스타인지 모든 사람이 알게 되었다.
약속과는 달리 박은 미령에게 점심 먹으러 가자고 하지 않았다. 매번 수업 시작 시간에 간신히 맞춰서 도착해서 서둘러 자리를 찾아가는 미령의 눈에는 항상 빛이 나는 곳이 보였지만 박은 미령에게 관심이 없었다. 수업이 진행되면서 미령의 주변에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모르는 문제를 물어보기도 하고, 정기적으로 같이 모여서 공부하고 시험준비도 나눠서 하자는 제안도 많았다.
미령은 그들에게 친절하려 노력했다. 그들도 고향에서는 수재로 통했을 것이기 때문에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 조심했다. 정기모임은 사양했지만 시험기간에 서로 도울 수 있도록 같은 도서관에서 공부하기로 했다. 기말 시험을 준비하던 어느 날 박과 가까운 친구에게서 지난겨울에 박의 아기가 태어났고 한국의 전통에 따른 100일 잔치라는 것을 하기 위해 기말시험이 끝나면 바로 한국에 간다는 말을 들었다.
기말 시험이 끝나고 미령은 양자역학을 같이 수강했던 인도계 학생과 함께 플로리다에서 열린 전미고등물리학회에 참석했다. 미령 같은 학부생이 참석할 자리가 아니었으나 유카와 교수의 강력한 추천으로 학교에서 모든 비용을 부담해서 학부생 2명을 학회에 보냈다.
최신 물리학의 동향을 유명 교수들로부터 직접 들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기에 미령은 정말 기쁜 마음으로 참석했었다. 사실 유카와 교수는 한참 고민을 하다가 미령과 박을 추천했지만 박이 개인 사정으로 참가하지 못한다고 해서 인도계 학생이 오게 되었다.
삼 일간 계속된 많은 발표들 중에서 미령은 에드워드 위튼 교수의 초끈이론 강연에 감명받았다. 사실 참석한 모든 학생들이 지루해서 미칠 뻔했다고 투덜댔고 심지어 자료를 그대로 읽을 거면 위튼교수가 아니라 목소리 좋은 성우가 왔어야 한다며 불평을 토로했었다. 그러나 한 시간 남짓한 강연동안 미령의 머릿속에는 자연계의 모든 입자와 기본상호작용을 매개하는 초대칭적인 끈의 진동이 다차원으로 그려졌고 양자중력이론의 희미한 뒷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던 중 오래전 미령이 어렸을 때 미령의 집에 자주 오던 리청 박사를 만났다. 리칭 박사는 세계 최고의 대학을 다니는 미령을 대견하다며 어깨를 다독여 주었고 헤어지면서 미령의 손에 용돈을 쥐어주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언젠가 중국에 돌아와서 국가와 민족에게 크게 기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리청 박사를 만난 후 미령은 지난 1년간 잊고 있었던 국가, 조국, 민족, 인민 같은 말들이 더 까마득히 느껴졌다.
"발사체 연구단계가 생각보다 훨씬 앞서 있어서 놀랐어요. 6개월 전에 우주항공연구원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했던 것보다 많은 분야가 실용화를 앞두고 있어요. 내년에 발사될 한국형 GPS 위성은 완전히 다른 발사체에 실릴 거예요. 문제는 규모라고 생각해요. 한국에서 발사하는 발사체의 숫자가 너무 작다 보니 테스트 사이클이 너무 길어요. 스페이스 X는 몇 달마다 새로운 발사체를 발사하기 때문에 테스트 사이클이 6개월을 넘지 않는데 한국은 적어도 1.5년에서 2년이 걸리기 때문에 랩터엔진과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질 것 같아요."
"미령이 지적하는 개발 디테일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최종적으로 몇 개의 발사체가 어느 정도 기간 동안 사용할지가 결정되어야만 개발에 필요한 비용과 기간을 추산할 수 있고, 그래야만 발사체 프로젝트의 추진 전략을 결정할 수 있지 않겠어? 내 입장에서 중요한 건 규모와 시간이거든."
"그래요. 이렇게 앞뒤 다 자르고 말하기는 싫지만 제 의견은 독자 추진 불가예요. 리솦2의 프로젝트 기간 3년 이후의 1단계 실행 기간 3년을 감안한 최대 6년 이내에 발사체를 확보해야 한다는 점을 냉정하게 받아들여야 해요. 따라서 우항연이 특정 부분을 담당하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 국제 공조를 해야만 해요."
"후보가 될 나라들은 뻔하지 않아? 미국, 중국 그리고 ESA. 그 외에 다른 옵션이 있을까?"
"제 생각에는 중국과 일본이 1 순위이고, 미국이 2순위예요. ESA나 러시아는 선택 가능한 옵션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쪽은 스케일 하지 않아요. 단기적으로는 미국이 가장 빠르고 쉬운 선택이지만 의존관계가 명확해서 우주태양광 부문에서 상당한 양보를 오랫동안 해야 할 거예요. 그래서 미국을 선택하는 것은 정치적으로는 옳은 결정이라고 평가받겠지만 결국은 탈탈 털릴 걸로 예상돼요."
"아 어렵네. 미국을 2순위로 놓는 것은 프로젝트를 정치적으로 만들 우려가 있어. 게다가 1순위가 중국과 일본 두 나라와 공조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라면 역사와 이념 그리고 감정의 강을 모두 건너야 하는 일이라서 우리가 하는 프로젝트가 통째로 날아갈 수도 있어. 우리 입장에서는 2순위가 1순위보다 더 위험해."
밤늦게 도착해서 피곤할 텐데도 미령은 박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미령과 박 둘 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기 때문에 둘만의 암호인 논문 서치는 정말 논문 검색과 토론이 되었다. 미령은 지난 몇 달 동안의 조사와 이틀간의 고흥 나로호 우주센터 출장 동안 실무자들과의 회의를 통해 얻은 정보를 종합한 자신의 잠정 결론에 대한 박의 의견을 구했지만 박이 보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특히 미령의 국적과 배경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지만 차마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발사체에 대한 열띤 토론이 끝나자 박은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위성의 송신 발열 문제에 대한 미령의 의견을 물어봤다. 미령은 이미 예상했던 이슈이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연히도 송신 쪽에서 효율이 떨어지는 만큼을 수신 쪽의 개선이 상쇄한다는 것이지만, 극단적인 경우에 발생할 수도 있는 시스템 전체의 붕괴를 막을 뾰족한 대안은 현재 없다고 했다.
한참 이야기를 하던 중에 미령에게서 쪼르륵하는 소리가 났다. 미령이 부끄러운 듯 배시시 웃자 박이 인류를 구하기 전에 우리 둘 다 굶어 죽겠다며 웃었다. 당신 냉장고에는 물밖에 없을 테니, 씻는 동안 얼른 나가서 뭐라도 사 오겠다며 박이 손에 잡히는 대로 테이블 위에 있는 자동차 키를 들고나갔다. 주차장에 도착해서 보니 박이 들고 나온 것은 미령의 전기차 열쇠였다.
아파트 입구를 지나갈 때 박의 눈에는 어두운 골목에 주차되어 있는 차 두 대가 언듯 보였다. 주차 공간이 여유로운 지방 소도시에서 왜 저렇게 주차했을까 생각하는 순간 그 차들의 헤드라이트가 동시에 켜지며 출발하는 게 보였다. 뭔가 이상했지만 문을 연 가게가 있을 법한 소도시의 중심가로 향했다. 조명이 어두운 길을 지나는데 차 한 대가 박을 추월하여 앞에 정차하고 다른 차 한 대는 뒤에 멈췄다. 영화 같은 장면에 놀란 박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려는 순간 앞 차에서 내린 정장 차림의 남자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운전석 창문을 노크했다. 경찰에 신고하고 기다릴까 하다가 박은 창문을 조금 내리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박의 얼굴을 본 남자는 당황한 듯 뒤로 물러서며 사람을 잘못 봤다며 미안하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고 황급히 차로 돌아갔다. 남자가 차 문을 닫으며 중국어로 뭔가 말하는 것을 박은 똑똑히 들었다.
박은 밝은 곳에 차를 세우고 잠시 생각했다. 몇 가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은 미령을 만나러 온 중국 사람이라는 것과, 사전에 미령과 접촉은 없었다는 것, 나름 정중하게 행동했다는 점 그리고 전화나 메시지 같이 도청되거나 흔적이 남는 것을 꺼린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산업 스파이거나 중국 정부 측 사람인 것 같았지만 당장 위험한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한 박은 24시간 영업하는 음식점에서 설렁탕을 사서 미령의 집으로 돌아갔다.
박이 음식을 들고 들어오자 미령이 웃으며 달려와 박을 안았다. 박의 어깨에 기댄 미령의 머리에서 어떤 향수보다 상큼하고 자연스러운 냄새가 나자 박의 남성이 반응했다. 음식봉투를 들지 않은 박의 손이 미령의 등을 안았다. 미령의 등을 쓰다듬는 손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자 신호가 더 강해졌다. 미령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 너무 오래 걸려서 걱정하고 있었다며 박을 더 세게 안았다. 몸이 박에게 밀착되자 그제야 박의 변화를 눈치챈 미령이 깔깔거리며 박의 눈을 바라봤다. 눈을 맞추던 미령의 얼굴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고 박의 몸이 꿈틀 움직였다. 박의 머릿속에서 조금 전에 있었던 수상한 정장 남자에 대한 생각이 옆으로 밀려났다.
거친 파도에 흔들리던 미령이 침대에 엎드리자 박은 미령의 등에 바짝 붙어 파도를 탔다. 연이어 닥쳐오는 파도를 타고 넘은 박이 마지막 큰 파도를 뛰어넘자 미령의 등이 따뜻해졌다. 미령의 옆에 쓰러졌던 박이 조용히 일어나 따뜻한 물을 묻힌 수건으로 미령을 닦아주었다. 미령이 이불을 끌어당기며 옆으로 눕자 박은 한 팔을 미령의 목 밑으로 넣고 등뒤에서 미령을 안았다.
태풍이 지나간 잔잔한 바다에서 두 사람은 잠든 듯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박의 손이 미령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다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옆으로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 키스하던 미령이 몸을 돌리며 천천히 밑으로 내려가자 등을 침대에 대고 똑바로 누운 박의 머릿속에 바람이 점점 거세졌다. 몸을 일으켜 세운 미령은 평원을 달리는 말을 타듯 바람을 가르며 세상의 끝까지 달려 나갔다.
"천박사를 접촉하려는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목적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중국 쪽인 듯합니다."
"천박사 부모 쪽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국정원에서 우리 연구소를 해킹하던 해커를 검거했어요. 대담하게도 국내에서 해킹을 시도하면서 사설망으로 위치를 숨기려고 했습니다. 점조직이라서 상부를 캐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들이 해킹한 자료에 천박사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박박사님과 진박사님 이름도 있었고요. 단순 스카웃 시도는 아닐 것으로 생각합니다. 리솦2의 위상을 감안해서 이 사건은 국정원까지 올라갔습니다. 주요 포지션에 있는 분들께는 경호가 붙을 것입니다."
주간보고가 끝나고 참석자들이 소장실을 나가기를 기다려 박은 소장에게 일을 보고했다. 소장은 이미 뭔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미령뿐 아니라 다른 책임자급들에게도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박은 놀라움과 두려움을 느꼈다.
미령은 점심시간에 안경점에 들렀다. 새로 맡은 발사체 자료를 읽느라 눈이 쉽게 피로해졌다. 오전만 지나도 두통이 잦아 이참에 안경을 새로 맞추기로 했다. 시력 검사를 하고 기다리는 동안 2층으로 올라가 안경테를 고르고 있는 미령의 옆에서 누군가 옆에 다가오더니 갑자기 영화에서 나올법한 말을 했다.
"천박사님, 고개 돌리지 말고 그냥 들으세요. 박사님과 박박사님께 중요한 정보가 있습니다"
박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면 미령은 두말없이 자리를 벗어났을 테지만 상대방은 미령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잠시 이야기를 하자는 남자의 어깨는 미령의 두 배는 되어 보였고 미국 남부 억양이 섞인 영어를 쓰고 있었다. 여기서 이야기하라는 미령의 말을 웃어넘기며 안경점 길 건너 1층 커피숍에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기서 기다리겠다며 계단을 내려갔다.
창문 밖으로 길을 건너는 그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미령은 온몸이 떨렸다. 박에게 전화를 할까 했지만 단순히 어떤 미국인이 박과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어떤 대책도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해칠 생각이었으면 아무도 없는 안경점 2층을 두고 사람들 오가는 길가의 카페로 가지는 않았을 테니 지금 당장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긴박한 일이라서 그리고 여러 사람 앞에서 이야기하기 곤란한 일이라서 불쑥 찾아왔습니다. 저는 스미스 요원입니다. 미국 CIA를 위해 일합니다. 미국 정부는 천박사님과 박박사님이 차세대 에너지 문제 특히 전력 생산과 공급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분들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연구성과가 현재는 좋은 것으로 보이지만, 리솦2 프로젝트와 관련한 인사발령과 이어진 일련의 조치들을 보면 천박사님의 자리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것이라 믿습니다."
"무슨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네 이해합니다. 한국 국정원 보안 프로토콜을 따르시고 있다는 거 잘 압니다. 그러나 박사님 자신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잘 파악하고 계실 겁니다. 리솦1의 종료보고가 있은 후부터 리솦프로젝트는 과기부 장관에게 직보 되고 있고 장관은 천박사님의 국적과 배경을 문제 삼았습니다. 발사체를 담당하라는 것은 결국 한국의 독자추진을 포기시키고 중국이나 미국과 협력하도록 하는 일인데 박사님 입장에서는 두 가지 모두 자살행위라는 것을 모르지 않으실 겁니다. 한국은 천박사님을 버린 겁니다. 박박사님도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하고 버려질 것이고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그리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왜 제가 제 나라도 아닌 미국과 손을 손을 잡습니까."
"중국 상황 특히 천박사님의 부모님 상황이 예전과 많이 다릅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마윈을 만들어 준 사람이 천박사님 어머님이십니다. 대규모 정책자금 집행을 실질적으로 주도하셨고요. 그러나 지난 몇 년간 상황은 어머님께서 생각하셨던 것과 완전히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앤트 그룹과 헝다 그룹은 표면에 드러난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박사님 아버님께서 막대한 자금을 사용해서 개발한 무기들이 파키스탄과 우크라이나 같은 실전에서 기대하던 성능의 반도 못 보여줬습니다. 지금은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천박사님 가족에게 중국은 이제 안전하지 않아요."
이때 미령의 눈에 검은 옷을 입은 짧은 머리의 남자 두 명이 카페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걸음걸이와 주위를 살피는 모습에서 그들이 부모님을 경호하던 사람들과 같은 부류임을 눈치챘다. 금방이라도 총을 꺼내 들 것 같아서 미령의 손이 떨렸다.
"못 들은 것으로 하겠어요. 사람 잘못 보셨고 시간 낭비하셨습니다."
"아닙니다. 또 뵐 날이 있을 것입니다. 제 명함입니다. 필요하다고 생각되실 때 꼭 연락 주십시오. 그리고 미국은 자유와 기회의 나라임을 꼭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천박사님과 가족분들 그리고 천박사님이 원하는 누구라도 미국이 안전을 보장하고 원하시는 모든 조건을 들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