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가득히 (7/12)
#7. 달라서 싸우는 사람들과 같아서 싸우는 사람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리솦2의 1단계가 마무리될 시점이 되자 단위 업무에 집중하던 연구원들이 그동안의 성과를 다른 업무와 공유하고 결합하고 조정하는데 집중하면서 프로젝트의 성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해결해야 할 일들은 여전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종 전송효율은 14%에 육박했다. 한 달 남짓 남은 1단계 종료 시점까지 튜닝을 통한 최적화를 수행하면 효율이 지금보다 약간 더 상향될 것으로 기대되면서 리솦2 프로젝트에 관여한 모든 사람들이 흥분 상태에 빠졌다. 비록 실마리를 찾지 못했던 이슈들의 상당수는 여전히 문턱을 못 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어느 나라나 연구소도 자신들의 현황을 솔직하게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비교는 어려웠지만, 연구원들의 개인적 네트워크와 국정원의 첩보 그리고 관련 업계에서 나오는 전망을 종합해 추정되는 중국의 8%와 미국의 5%에 비해 압도적인 차이를 보이는 것이었다. 게다가 아직 2단계와 3단계가 남아있기 때문에 그 격차는 더 벌어질 것으로 예측되었다.
우주태양광발전에 가장 핵심인 전송기술에 대해 확신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관심은 발사체로 옮겨갔다. 발사체 기술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도가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었지만 사실 아무리 전기를 잘 만들고 전송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고 해도 태양광패널과 관련 위성을 쏘아 올리지 못하면 말짱 헛일이었다. 게다가 한 번 발사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서 유지보수해야 하기 때문에, 발사체를 확보하고 안정적으로 유지관리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중요한 과제였다.
리솦2에서 발사체를 맡게 된 미령의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우주항공이 미령에게 새로운 분야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관련 부서와 담당자들이 미령을 대하는 태도였다. 한국 위성 발사 수요는 적었다. 국내에서 제작되고 발사되는 로켓의 숫자는 민간용과 군사용을 더한다고 해도 한 자릿수를 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발사체 관련자들은 모두 우주태양광발전사업을 위한 발사체를 한국이 독자적으로 할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주산업은 태양광발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 우주 개발 능력을 확보하고 유지하는 것이 당장의 사업성과 수익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정부는 지금까지 꾸준히 투자해 왔다. 문제는 우주태양광발전사업의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것이고 미령이 이 일을 맡은 책임자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미령이 발사체와 관련한 모든 것을 중국에 넘길 것이라고 짐작했다. 더구나 미령이 중국 국적자일 뿐 아니라 그의 부모가 중국 방위산업의 핵심인물이라는 것이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가면서 상황은 더 나빠졌다. 미령이 요청하는 자료의 제출을 거부하거나, 제출한다고 해도 중요 정보를 누락하거나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의 얼기설기 편집된 자료를 몇 번의 지연 후에 제출하곤 했다. 사람들은 한국 우주항공 산업 전체가 미령으로 인해 뿌리째 뽑힐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다른 국가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그들도 한국과 비슷하게 정보기관과 연구자들의 개인적 친분까지 동원해서 리솦의 정보를 수집했고 리솦프로젝트가 현실화될 날이 불과 몇 년 남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자, 자국 우주항공산업의 강점과 약점을 분석해서 직접 한국에 방문해서 공식적으로 한국정부에 제안을 넣는 국가들이 많아졌다. 유럽은 관련된 모든 논의를 ESA를 단일 채널로 한다는 공식적으로 발표했으나 실제로는 모든 EU 국가들은 자국의 정보기관을 동원해서 개별적으로 한국정부와 접촉을 시도했고 이스라엘은 발사체 기술 전부를 제공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함과 동시에 모사드 요원들을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에 상주시켜서 리솦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적극적으로 수집하도록 했다.
당장 우주항공산업이 없거나 시작단계인 나라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같이 적도에 가까운 나라들은 발사기지 부지를 영구 임대하고 필요한 모든 지원을 하겠다며 우주태양광사업에 꼭 끼워주기를 염원했다.
리솦 프로젝트는 단순히 에너지 산업을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장차 국제 경제 구조를 바꾸게 될 것이기 때문에 모든 나라들은 이 판에 끼고 싶어 했다. 발사체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이 쏠렸다. 한국이 독자적으로 발사체를 추진하기는 어렵고 국제공조를 할 수밖에 없다는 공감대가 있었지만 대상과 조건 같은 구체적인 사항에는 진전이 더뎠다.
"교통정리가 시급합니다. 국내에서는 다수의 관련 기관과 업체를 단일한 소통 및 의사결정 채널로 연결해서 실질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법률을 제정하거나 기존에 있는 법령과 규정을 정비해야 합니다. 동시에 다양한 경로로 들어오는 타국의 공조 요청을 동일한 채널에서 통할 수 있도록 정부 기관 간 업무 영역을 조정해야 합니다."
"천박사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 정도 규모의 변화는 과기부 장관을 업무범위를 상회합니다. 국무회의를 거치고 궁극적으로는 대통령의 승인과 국회를 동의를 받아야 하는데 문제는 타이밍입니다. 대통령이 사실상 궐위상태인 지금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도 의결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국회를 통과한다고 해도 권한대행이 이 정도 결정을 내릴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자칫 일사부재의 원칙에 발목을 잡히거나, 여당과 야당의 정치 싸움의 대상이 되어 아무것도 못하게 가능성이 큽니다. 자칫 리솦3 추진까지 영향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의 비효율적인 구조가 6개월 혹은 1년 이상 지속된다면 전체 프로젝트가 동력을 잃습니다. 그 사이에 각 부서와 이해관계자들이 자신들이 책임질 수 없는 것들을 누군가에게 약속하게 될 터이고요."
소장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미령은 맥이 빠졌다. 리솦 프로젝트는 이미 단일 국가를 넘어서 지구적 프로젝트가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맞도록 제도를 새로 만들거나 손봐야 하지만 관료제의 허들은 너무 많고 너무 높았다.
그렇다고 미령이 중국처럼 소수가 국가와 사회에 대한 모든 결정을 독점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었다. 미령은 지극히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필요한 일을 필요한 시점에 하지 못하게 되는 비효율과 이해관계에 따라 참과 거짓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을 싫어할 따름이었다.
미령은 일상 업무에서 답답함과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리솦 연구소의 보안등급이 최상위로 변경되고, 모든 사람의 권한과 책임이 재조정된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미령은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접근 권한이 비합리적으로 통제되고 있다고 느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이 제도를 악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담당자들은 보안 등급을 핑계로 미령의 자료 요청을 거부했다. 심지어 미령에게 허용될 정보도 보안등급을 일부러 높여서 열람 자체를 막는 일도 잦았다.
무엇보다도 미령을 힘들게 만든 것은 제도의 빈틈을 이용해서 미령 자신에 대한 악의를 표하던 사람들도, 실제 만나서 대화를 나눠보면 보통 사람들이었고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평범한 연구원들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들도 미령이 자기의 일터와 전문 분야를 없애 버릴 것이라는 누군가가 퍼뜨린 루머를 완전히 믿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나서서 미령의 일을 도와줬을 때 주변의 다른 연구원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했고, 술자리나 회식에서 누군가 중국과 미령의 유착관계에 대해 떠들어 댈 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쪽을 택했을 뿐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침묵과 암묵적인 동조는 전체 시스템의 동작을 방해하고 심지어 파괴하고 있었다.
미령의 마음속에 있는 두 개의 기둥 중에서 하나가 흔들리면서 미령은 자신이 계속 한국에 있는 게 옳은 일인지 여러 번 생각했다. 미령에게 일은 연구자이자 생활인으로서의 일 이상이었다.
자신이 하는 일은 인류를 포함해서 지구에 있는 모든 생명체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신념이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미령이 지치거나 쓰러지지 않게 했었다. 그리고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어렵고 누구도 납득시키지 못하지만 박에 대한 사랑은 미령이 모든 어려움을 견딜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미령은 알고 있었다. 박이 유부남이라는 데서 오는 죄책감을 그는 정략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고 실제 부부가 아니라는 것을 되뇌며 미령은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을.
"스페이스 X가 발사체 제안을 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주요 책임자 중에서 국적 문제가 있는 사람이 있다는데 말씀 좀 해주십시오."
"2단계에서는 리솦 연구소가 우항연의 상위기관이 된다는 게 사실입니까? 총괄 책임자는 누가 됩니까?"
프로젝트 예산이 점점 커지자 국회에서 업무보고와 비공개 청문회를 요청했다. 복도를 가득 메운 기자들은 오후에 재개되는 청문회 출석을 위해 지나가는 과방위 소속 국회의원들에게 기자들은 녹음기를 든 손을 뻗으며 질문을 던졌지만 국회의장이 직접 나서서 절대 기밀을 유지해 달라고 요청한 사안인 만큼 의원들은 기자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지나갈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증인으로 출석한 미령은 오전 내내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최선을 다해 대답하려 노력했지만 질문을 한 의원들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간사를 맡고 있는 의원과 과방위원장이 여러 번 제지하고 경고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미령에게 쏟아진 질문들은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 것이었거나 아니면 미령이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하고 싶은 말만 줄기차게 하고 끝나는 식이었다. 질의는 미령에게 집중되었고 소장이 발언기회를 요청해서 보충설명을 했지만 증인으로 함께 출석한 박과 연구소장에게는 아무 질문 없이 오전 청문회가 끝났었다.
"春博士,请告诉我您的国籍"
갑자기 한 국회의원이 중국어로 미령의 국적을 밝혀 달라고 요청했다. 오전 내내 한국어로 질의응답을 했던 미령에게 갑자기 중국어로 질문하는 의도를 뻔히 아는 미령은 기가 막혔다.
"의원님, 저는 한국어로 일하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오늘 오전 청문회에서도 한국어로 답변드렸고, 지금까지 7년간 리솦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제가 작성한 모든 문서는 한국어로 되어 있습니다."
"국적을 이야기해 달라는데 왜 다른 소리를 합니까? 천박사님의 국적이 어디입니까. 묻는 말에만 답을 하세요!"
"의원님, 저는 중국에서 태어나서 18년을 살았고, 성인이 된 후 미국에서 13년 그리고 한국에서 만 7년 8개월을 살았습니다. 저는 과학을 하는 사람이고 과학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동료 의원 여러분, 대한민국의 미래가 걸려 있는 중차대한 프로젝트의 주요 책임자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이러고도 발 뻗고 잠을 잘 수 있습니까?"
한 국회의원이 박과의 관계를 소명하라는 요구를 했다. 제발 이 질문만은 나오지 않기를 미령은 소원했지만 정치인들은 원하는 답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가리지 않았다.
소장은 증인 출석을 요구받은 미령을 따로 불러서 이 질문이 나오면 증언을 하지 말라고 조언했었다. 미령도 그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기에 증언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다른 국회의원도 가세하여 답변을 촉구했고 증언거부에 따른 법적책임을 지우겠다며 윽박질렀다. 미령은 녹초가 되었고 청문회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천박사님 부모님의 직업에 대해 말씀해 주시고, 부모님과 얼마나 자주 만나거나 이야기하는지 그리고 주로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 아버지는 베이징에 있는 대학교에서 실험물리학 교수로 재직하고 계십니다. 실험에 필요한 자재를 생산하는 공장도 운영하고 계십니다. 어머니는 과학과 국방 관련 공무원입니다. 어떤 일을 하시는지는 제가 소상히 알지 못합니다만 기술개발 정책수립과 집행을 담당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두 분 모두 바쁘시고 저 역시 그랬기 때문에 자주 뵙지는 못했습니다. 가장 최근에 만난 것은 3년 전에 해남도에 여름휴가를 보낼 때였고, 통상적인 부모와 자식이 하는 대화 이상은 없었습니다."
"아버님께서 운영하는 공장이 실제로는 무기공장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 실험 자재가 아니라 중국군에서 사용하는 살상무기를 만드는 공장입니다. 알고 계셨어요?"
"처음 들어봅니다. 제가 미국으로 유학 가기 전에 2개월 동안 공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제가 일하는 동안 어떤 무기도 보지 못했습니다. 입자가속기에 사용될 강력한 자기장을 만들기 위한 부품들을 생산했고 그 외에는 직선 가속관과 반사판 그리고 케이블을 특수제작했습니다. 최종 완성된 입자가속기에 사용된 부품의 절반 정도는 외국에서 만들었고, 원자재의 대부분은 한국 회사들이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 사진들은 최근에 천박사님의 아버님이 운영하는 공장을 찍은 것입니다. 저기 보이는 게 뭐 같아 보입니까? 미사일입니다. 대기권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재진입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실제 무기에 적용시킨 게 천박사님의 부친이고 저 공장은 살상무기를 만들고 있는 겁니다!"
미령은 더 이상 자신이 한국에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비공개라 하더라도 오늘 청문회에서 나온 말들은 어떤 형태로든 외부에 흘러나갈 테고 사람들은 자신을 공격할 뿐 아니라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파괴하려 들 것이기 때문에 자기 때문에 박과 연구소까지 위험하게 되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한국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박을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서로가 조금만 양보하고 도우면 처음에는 한국이 이익을 보겠지만 결국은 그 이익이 다른 나라들에게도 전파돼서 모두에게 도움이 될 텐데 정치인들은 왜 당장의 작은 이익 때문에 엄청나게 큰 이익을 희생시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침내 청문회가 끝나고 모든 국회의원들이 나가고 나서야 미령과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온 자료들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며칠에 걸쳐서 준비해 온 설명 자료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고 쓸모가 없었다.
미령은 울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울어도 남들이 없을 때 울어야 한다고 다짐하던 그때 국회의원 한 명이 다시 들어와서 미령의 손을 잡더니 말없이 미령을 안아주었다. 더 이상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아니야, 오늘은 꼭 같이 있고 싶어"
청문회가 끝나고 박은 미령과 미령의 집으로 갔다. 괜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고 미령이 몇 번이나 거절했지만 박은 미령을 불 꺼진 컴컴한 집으로 혼자 들어가게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꺽지 않았다. 조금만 쉬었다가 뭐라도 만들어 먹자며 침대에 누운 박은 금세 깊은 잠에 빠졌다.
청문회가 끝난 다음 날부터 연구소 앞에는 시위대가 자리 잡았다. 구호와 플랭카드는 모두 미령에 대한 것이었다. 예상한 일이었지만 시위대의 존재는 위협적이었다. 미령은 저들이 자신의 아파트까지 들이닥칠 것 같았다.
소장은 미령에게 당분간 연구소에 출근하지 말고 재택근무를 하라고 했고 원한다면 며칠 휴가를 다녀오라고 했다. 그러나 미령은 갈 곳이 없었다. 박은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했지만 박의 집에 있다가 기자들에게 사진을 찍히거나 시위대가 박의 집까지 온다면 상황은 더 나빠질 것 같았다.
박이 매일 밤마다 미령의 집으로 오지 않았다면 미령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공항으로 달려갔을 수도 있었다. 비록 박은 늘 일거리를 한 아름 들고 왔고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내내 자료 검토와 원격회의에 매달렸지만 미령은 자신을 혼자 두지 않으려 노력하는 박이 고맙고 믿음직스러웠다. 예전보다 자주 가지게 된 잠자리에 미령도 박도 만족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찍 눈을 뜬 미령이 늦게 까지 일하다 잠든 박을 깨우지 않고 조심스레 방에서 나가려다가 박의 서류가방을 넘어뜨렸다.
쏟아져 나온 서류들 중에서는 박이 먼저 사인한 이혼서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