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가득히 (9/12)
#9. 언젠가는 그리워질 오늘
귀령의 결혼식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미령과 귀령의 부모가 모두 중국 관계와 과학계의 주요 인물인 만큼 과학계는 물론이거니와 산업계와 정치권 그리고 관료 등 거의 모든 분야의 사람들이 결혼식에 참석했다. 부모는 미령이 박과 꼭 함께 오기를 바랐지만 미령은 혼자 베이징 공항에 내렸다. 마치 20년 전 혼자서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도착했던 것처럼.
귀령의 결혼식은 전통 양식으로 축하행사와 피로연을 포함해서 3일에 걸쳐서 진행되었고, 귀령의 부모는 호텔 하나를 통 채로 빌려서 하객들이 편하게 머물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술과 음식을 나누며 밤늦도록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예식이 시작하기 전날부터 먼저 도착한 과학계 사람들도 자연스레 모이게 됐는데, 유카와 교수와 중국의 우주태양광팀도 있었다. 미령은 신부의 언니로서 하객들을 두루두루 챙겨야 했으나 번번이 과학계 사람들과 열띤 토론에 끼곤 해서 언니로의 의무를 잊는다며 귀령에게 책망을 들었다.
미령의 가족과 하객들이 연회를 즐기는 동안 각국의 정보기관에는 비상이 걸렸다. 미령의 부모님이 워낙 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는 바람에 마치 국제 심포지엄처럼 우주태양광 연구를 하거나 발사체를 제공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나라의 주요 인물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미령도 그 사실을 늦게서야 깨달았고 다른 사람들도 거의 동시에 같은 사실을 깨달았다. 잠시 당황했지만 앞으로 3일간 다 함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이야기 나눌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천귀령의 결혼식에 참석해 주신 하객 여러분 감사합니다. 저는 귀령의 언니인 천미령입니다. 오늘부터 축하행사와 결혼식 그리고 피로연이 열리는 3일간 여기에 계신 모든 분들께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미리 의도하거나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자리에 계신 하객분들의 상당수가 우주태양광발전 그리고 발사체 및 위성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놀라고 당황했지만, 많은 분들께서 오히려 서로 흉금을 터놓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하셨고, 감사하게도 양가의 부모님께서도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셨습니다.
오늘부터 앞으로 3일간 결혼식 행사가 없는 시간에는 이 호텔에서 가장 넓은 장소인 로텐더 홀에서 자유토론을 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는 종교도 국가도 그리고 소유도 없습니다. 진행과 사회는 저와 천 귀령이 맡도록 하고 세부 사항은 차차 맞춰가도록 하겠습니다."
거의 동시에 하객들이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본국에 연락하여 상황을 알리고, 반드시 참석해야 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 지금 당장 베이징으로 오라고 하기 연락했다. 미령은 리솦의 연구소장에게 지금 바로 베이징으로 와 달라고 요청하면서 가능하면 과기부 장관께 연락해서 동행여부를 타진해 달라고 부탁했다.
연락을 받은 장관은 지금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냐며 향후 며칠간의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그날 밤에 베이징에 도착했고, 그날 베이징 공항에는 수많은 개인 혹은 기업용 소형 제트기들이 도착했다.
토론을 위한 두 가지 규칙이 정해졌다. 첫 번째 규칙은 모든 참여자는 동등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자존심은 입구에 있는 보관함에 넣어두고 입장하도록 했다. 두 번째 규칙은 누구도 국가를 대표하지 않으며, 모든 발언과 합의 혹은 선언 또는 결의는 각 분야의 전문가로서의 개인들이 행한 것으로 어떠한 법률적 구속력을 갖지 않는다였다. 실무적으로는 수행원이나 경호원은 입장할 수 없으며, 어떤 형태의 무기도 반입할 수 없고, 그 이외의 모든 것은 상식과 합리성에 따라 결정하기로 했다.
컴플레인도 많이 있었다. 특히 미국에서 여러 부서와 학교와 기타 단체들로부터 무수한 요청사항과 컴플레인 등등이 들어왔다. 모든 요청사항들은 요약 정리되어 행사 전체의 호스트인 미령의 부모에게 전달되었다.
미령의 부모는 미국의 요청사항 대부분이 지나치게 미국중심적이거나 무례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면,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 제기한 요청사항은 대부분 받아들여졌고, 결혼식에 초청받은 사람이 없는 나라에서 요청한 추가 초대도 모두 받아들였다. 베이징 주재 미국 대사까지 나섰지만 미령의 부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혼식은 중국 전통에 따라 행운과 행복을 상징하는 붉은 천에 금색 실과 장식한 홍콰(红褂)를 입은 귀령을 신랑이 맞이하여 데리고 오는 인친(迎亲)을 시작으로 귀령과 신랑이 부모님께 감사와 존경을 표하는 징차(敬茶)를 올리고, 참석한 모든 하객이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고 기꺼이 결혼 증인이 되는 것으로 성대하고 절도 있게 치러졌다. 중국의 전통 결혼식을 처음 보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자진해서 옷 색깔부터 혼례 순서 등에 숨겨진 수많은 상징의 의미와 염원들을 설명해 주어서 그 자체로서 대단한 구경거리였다. 미령의 부모는 축의금을 정중히 사양했지만 수많은 홍빠오(红包)가 쌓였다.
혼례가 끝나고 민간 국제 심포지엄이 미령의 짧은 기조연설로 시작되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같은 자리가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여기에 있는 모든 분들은 항공우주와 에너지 그리고 과학과 생명의 미래를 연구하고 고민해 온 전문가 개인입니다.
누구도 무엇을 대리하거나 대표하지 않으며 모두가 동등합니다. 앞으로 이틀간 우리는 어떤 합의를 하거나 선언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전문가 개인들의 의견이며 어떤 구속력도 가지지 않습니다.
조금 전에 일본에서 오신 유카와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아주 오래전에 ‘사랑, 평화 그리고 음악의 3일’로 지금까지 기억되는 페스티벌에 참석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어제부터 시작한 이 토론이 후일 ‘평화, 우정 그리고 도약의 3일’로 기억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신청한 순서대로 30분간의 발언이 있은 후에는 30분간의 토론이 이어진 후에 그다음 신청자가 다시 30분을 발언하는 순서로 오후부터 새벽까지 쉬지 않고 발언과 토론이 이어졌다.
지친 사람들도 로텐더 홀을 떠나지 않고 벽에 기대앉거나 잠시 바닥에 누웠다가 다시 토론에 참가했고, 배가 고파지면 로텐더 홀 바깥 복도에서 요리사들이 만들어 내는 음식과 음료수를 들고 다시 회의장으로 돌아왔다. 세계 최고의 부자도 바닥에 앉아서 춘권과 딤섬을 먹었고, 장관이나 총리도 바닥에 누워서 쪽잠을 잤다.
"저는 오늘 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본 세상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밝은 8시간을 봤습니다. 아마도 여기 계신 모든 분들과 스트리밍 혹은 다른 모든 형태로 함께 하시는 분들도 같은 생각이시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일정을 마무리하면서 모두들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몇 가지 주요 사항을 업데이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리솦 프로젝트에서 목표로 하고 있는 발전량은 일간 150 GWh입니다. 인구 5천만 명의 대한민국의 작년 평균 일일 사용량에 약간의 버퍼를 둔 수치입니다. 지상에 약 250평방 km의 면적에 꽉 채워서 솔라패널을 설치한다면 목표 발전량을 충당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부천시 혹은 김해시 면적입니다.
지상이 아닌 저궤도에 설치한다면 지상보다 약 5배 이상의 효율을 낼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필요한 면적은 50 평방 km가 되고 약 2만 5천 개의 솔라패널이 필요하고 솔라패널의 무게로 약 500톤입니다. 여기에 위성과 유지보수를 위한 것은 제외했습니다. 이 장비를 저궤도에 올리기 위해서 필요한 발사체의 페이로드는 현재 기준으로 미국의 스타쉽이 100톤, 중국의 창정 5가 25톤, 아리안 6은 22톤입니다.
다만, 여기에 전송손실을 감안해야 합니다. 즉, 일간 150 GWh의 발전량은 태양을 따라서 위성체가 이동하면서 24시간 발전한다고 하면 시간당 6 GWh의 전기를 생성하는데, 이 전기를 지상으로 보내면 몇 퍼센트가 실제 지상 안테나에 도착하는가입니다. 따라서 별도의 상수를 감안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전송기술을 확보한 연구소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누구도 신뢰할만한 정보를 공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누구에게나 극비사항인 만큼 이 자리에서 공유는 어려울 듯합니다.
이 정도 정보를 같이 공유해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최적의 조합을 찾아보도록 하지요."
자정 무렵 8시간에 걸친 토론을 마치며 미령이 참가자 모두가 동일 기준에서 비용과 일정 등을 구상할 수 있도록 그간의 논의에서 공유된 발전부문에 대한 주요 숫자를 요약했다. 대한민국을 기준으로 했으며 평균적인 솔라패널의 효율과 무게를 사용했으나 약간의 버퍼가 포함된 숫자였다.
미령이 말한 대로 이제 중요한 것은 전송기술 보유 여부와 전송효율이었다. 그러나 개발을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진 모든 나라가 정보를 공개하기를 거부했다.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고 심지어 일부는 실시간 방송이 되는 환경이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결국 지금까지의 진행과는 다르게 실제 전송기술을 확보했거나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고 있는 국가들만 따로 비공개 협의를 하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맥주를 마시거나 침실로 돌아가는 와중에 미령과 연구소장 그리고 과기부 장관은 원탁에 앉았다. 곧이어 미령의 부모와 귀령, 유카와 교수 그리고 미국에서 온 바바라가 연구원 한 명과 자리에 앉았다. 조금 전의 세계평화적인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되었다.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긴 하루가 끝나는 자정 무렵에 새로운 회의 테이블에 앉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다들 자신의 카드는 감추면서 상대방의 카드를 읽으려 하는 세븐 포커 게임 같았다.
다만 이 판에는 기적 같은 히든카드가 없을 뿐이었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연구소의 규모와 장비 그리고 실험의 대상과 빈도 등은 감추기 어렵기 때문에 바닥에 깔린 네 장의 카드를 보면 플레이어가 어떤 카드를 손에 감추고 있는지 거의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더구나 아무리 정부와 기업이 비밀을 유지하려고 해도, 이익이 아니라 발견과 성취를 주된 목적으로 하는 학계는 뭔가를 감추는데 서툴렀다. 거대 프로젝트도 따라가다 보면 결국 개인들이 하는 것이고 그런 개인들은 공식적인 직함과 여권의 색깔로 정확하게 나눠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개인들의 삶은 결국 생활의 말단 어딘가에서 만날 수밖에 없었고 같은 일을 하는 전문가들이 맥주나 커피를 마시면서 하는 이야기는 결국 서로가 가장 관심 있어하는 것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같은 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원칙을 말하고 싶습니다. 미국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나라입니다. 누구나 노력한 만큼 잘 살 수 있고 자신의 능력에 따른 경제적 자유와 권리를 가지게 되는 공정한 사회입니다. 이 원칙이 에너지 부문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모인 나라들은 우주태양광발전이라는 에너지 혁명을 이룩하기 위해 오랜 시간 많은 투자를 해왔습니다.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들은 합당한 가격을 치러야 합니다."
"바바라, 그 원칙은 미국 내에서만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미국이 아닙니다.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장기적으로 에너지는 모든 사람이 원하는 만큼 쓸 수 있게 됩니다. 지난 몇 세기동안 구축된 헤게모니가 붕괴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문 앞에서 과거의 권력관계를 유지하려는 시도는 착취이자 폭력입니다. 저는 평생을 중국에서만 살아온 물리학자입니다. 그리고 제 아내도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나고 자라서 지금은 정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국의 패권을 원하지 않듯이, 남들도 중국이 패권국가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이 인류의 미래를 바꾸는 시점입니다. 가진 것을 내려놓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천박사님의 말씀은 너무 낭만적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여야 합니다. 그 개인의 총화가 바로 국가이고, 국가는 국익을 위해 움직입니다. 국민의 세금을 투자해서 만들어진 기술은 그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자원을 기술개발에 투입했고 지금까지 미국이 만들어낸 수많은 성취물들을 통해서 모든 인류의 삶이 개선되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국의 등에 업혀 있었습니다. 더 이상 그래서는 안됩니다."
"거대 담론은 지금 필요하지 않습니다. 몇몇이서 작당해서 만든다고 해도 유지될 수도 없고요. 누구도 이 호텔의 화장실에서 휴지를 훔쳐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화장실에는 휴지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굳이 가져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휴지를 가져가면 안 된다는 규칙을 화장실에 크게 써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눈 덮인 넓은 벌판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벌판을 걸으면서 나는 어디로 가겠다고 외치는 것은 의미 없는 욕심일 뿐입니다. 뒤를 돌아봤을 때 보이는 발자국이 우리가 가는 방향인 것입니다. 지금 제일 기쁜 것은 인류가 변곡점에 도달했고, 제 오랜 제자인 천미령 박사가 제일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천미령 박사는 중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천박사에게 국가와 민족이라는 낡은 틀이 가지는 의미는 저처럼 은퇴한 사람이나 중국에서만 살아온 천박사의 부모님 그리고 미국에 갇혀 있는 바바라와 다르리라 믿습니다."
"아니, 무슨 말씀들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에너지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에너지는 돈이고 권력이고 국력입니다. 우리 미국은 지구에서 가장 뛰어난 발사체를 이미 운용하고 있습니다. 전송기술도 가지고 있고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을 비싼 값에 파는 것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과학기술부 장관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제 책임이고 의무입니다. 그러나 바바라의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미래 세대에게 20세기의 낡은 유물을 물려주고 싶지 않습니다. 유카와 교수님 말씀처럼 우리는 화장실에 휴지를 둘 수 있습니다. 휴지가 떨어지면 얼마든지 다시 채워 놓을 수 있습니다."
"오래전 제가 탄 비행기가 악천후로 시골 공항에 비상착륙한 적 있습니다. 유카와 교수님을 포함한 200여 명의 조난자들과 함께 한 행크스빌에서의 3일이 제 인생의 방향을 결정했습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저만의 결의이자 비밀이었습니다. 오늘 저는 제 부모님께서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시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장관님께서도 같은 생각이셔서 더 놀랐습니다. 그리고 감동했습니다. 우리는 다들 다른 방향에서 걸어와서 여기에서 만났습니다. 이제 와서 뒤를 돌아보니 우리 발자국들은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바바라가 말도 안 되는 로맨티시스트들이라며 소리를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원탁에 남은 사람들은 일어나서 악수했다. 오랜 세월 동안 나누고 싸우고 경쟁하며 살아온 동북아시아의 세 나라가 다시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