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서로 꼬리를 물고 살아온 괴물들

태양은 가득히 (10/12)

by 달을보라니까

#10. 서로 꼬리를 물고 살아온 괴물들


"언니, 이런 말을 해서 정말 미안해. 하지만 왜 혼자만 온 거야? 엄마 아빠도 마음속으로 백만 번 같은 질문을 했을 거야."


너무 당연하고 평이한 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웠다. 며칠간 이 질문을 가슴에 품고 있었을 부모님을 생각하는 미령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나 미령도 박의 요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미령에 대한 억측이 국회 청문회 과정에서 깔끔하게 정리되면서 내내 자신을 힘들게 해 왔던 외국인에 대한 경계와 텃세가 허물어졌다. 한참 여론이 들끓을 때에는 어디에 가도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었다. 미령에게 들리도록 혀를 차고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거기 잠깐 있어 보라며 따라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매일 저녁마다 자신의 집으로 퇴근하는 박에게 매번 배달음식과 인스턴트 음식을 주는 게 미안해서 장을 보러 마트에 가고 싶었지만 누구를 만나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써야만 했었다. 그러나 방송이 나간 후에는 모든 것이 달라졌었다. 길가에 있는 가게에서 과일을 사고 있는 미령의 과일 값을 지나가던 사람이 대신 내주기도 했다.


미령은 박의 변화를 금방 알아차렸다. 국회 청문회가 끝나고 자신에 대한 오해가 풀려가던 어느 주말에 박이 부모님을 만나고 온 이후부터였다. 퇴근 후 미령에 집에 와서 뭔가 어색하게 앉아 있다가 돌아가기도 했고 친구를 만난다며 연구소 주차장에서 손을 흔들고 사라지기도 했다.


가장 큰 변화는 잠자리에서 느껴졌다. 따뜻하고 부드럽게 보듬어주던 박의 손길과 몸짓이 급해지고 거칠어졌기 때문에 아무리 모르는 척하려고 해도 모를 수가 없었다. 미령이 아프다는 표정을 지어도 알아보지 못해서 아프다고 말을 해야 박은 하던 것을 멈췄다. 박이 자신과 관계하면서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은 미령에게 큰 충격이었지만 가족과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 박이 말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박이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을 뿐 아니라 점점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귀령이 학생들을 데리고 리솦 연구소에 견학을 왔을 때 미령은 박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박은 갑자기 바빠졌고 일정표에는 없는 약속들이 자꾸 생겼다. 귀령이 한국에 머무는 며칠 안 되는 날 중에서 다른 교사가 학생들을 인솔해서 나간 두 시간에 박을 맞추어 넣으려 안달하던 미령이 마침내 약속을 잡고 보석처럼 빛나는 박을 동생에게 보여줄 생각에 들떠서 계속 동생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문득 박이 단답형 대답을 반복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행히도 박은 사회성이 좋은 사람이었다. 미령과 있었던 일들을 재미있게 꾸며서 이야기해서 귀령이 배꼽을 잡고 웃게 했고 쇠젓가락이 익숙하지 않은 귀령에게 따라 해 보라며 젓가락질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원래 젓가락은 중국에서 왔을 거라며 미령과 귀령을 추켜세워 주기도 했다.


오랫동안 같이 있고 싶었지만 귀령을 곧 학생들이 있는 곳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귀령은 박에게 곧 있을 자신의 결혼식에 꼭 미령과 같이 오라고 신신당부했다. 귀령을 보낸 후 오래간만에 박과 시내를 다니며 쇼핑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박은 피곤한 듯 커피만 마시자고 했다. 미령은 서운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보스톤에서 그들과 함께 한 학기를 보냈던 김이 나타나 반갑게 박의 어깨를 쳤다.


"너희들 TV에서 봤어. 야 정말 대단한 일 하더라. 내 친구들이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다 자랑했어."


김은 경제학과 교환학생으로 한 학기만 보스톤에 있었지만 우연히 박의 친구와 기숙사를 같이 쓰게 되면서 과학자 친구들과 같이 어울리게 되었다. 미령이나 박이 과학과 공학 관련 이야기를 할 때도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며 이해하는 만큼의 솔직한 의견을 말해주곤 했는데, 연애상담을 잘해줘서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었다.


하지만 그가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에 거의 이십 년이 지나도록 연락 한 번 없었고 사실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김이 마치 헤어졌던 형제를 만난 듯 반가워했기 때문에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는 박과 미령이 잊고 있던 예전 일들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한참 지난 이야기로 웃으며 수다를 떨었다. 박이 전화 통화를 한다며 밖으로 나가는 박의 뒷모습을 보며 김이 미령에게 말했다.


"너희 둘이 이렇게 될 줄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너희만 몰랐지 남들은 다 알았어. 잘 돼 보여서 다행이다. 근데 어쩐지 너희 관계에는 뭔가 빠진 것 같아. 아닌가?"


곧 박이 돌아와서 대화가 끊기고 옛날이야기를 좀 더 하다가 김과는 곧 헤어졌다. 미령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김은 아이가 없어 보인다는 뜻으로 그런 말을 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랬다면 지금 자신과 박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었을까. 돌아오는 길에 미령은 김이 한 말을 떠올리다가 정말 뭔가 빠진 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미령은 소파에 앉아서 TV에 연결된 게임을 하며 아이처럼 웃고 있는 박의 무릎 위에 올라앉았다. 놀란 듯했지만 박은 게임컨트롤러를 내려놓고 미령의 셔츠 속으로 손을 밀어 넣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게 있다면 그건 바로 당신 가슴이라고 속삭였다.


곧 뜨거운 바람이 솟구쳤고 미령은 바람을 타고 산 위를 날아다녔다. 가장 뜨겁고 강한 바람이 불자 박은 미령을 들어 올리려고 했지만 미령은 박을 끌어안았다. 박은 다시 미령을 떨어뜨려 놓으려 했지만 미령은 있는 힘을 다해 더 세게 박을 끌어안았다. 잠시 후 박은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하다가 아무 말없이 옷을 주워 입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침 일찍 심포지엄이 시작되기 전에 미령의 부모와 유카와 교수와 새벽에 일본에서 날아온 사토시 관방장관 그리고 미령을 비롯한 장관과 소장이 로텐더 홀 무대 위에 놓인 원탁에 앉았다.


미령의 아버지는 지난밤에 많은 생각을 했으며 주요 인사들과의 의논을 거쳐서 중국은 우주태양광발전 프로젝트를 한국과 일본 양국과 같이 하기로 결정했으며, 이를 위해 중국이 먼저 모든 기밀사항을 한국과 일본에게 공유할 테니, 두 나라도 동참해 주기를 요청했다.


파격적인 제안에 다들 깜짝 놀랐다. 협상을 시작하는 마당에 중국이 먼저 나서서 자신들의 결정사항을 알려줄 뿐 아니라 자국이 가진 모든 비밀을 공개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유례없는 결정이었다.


"중국이 먼저 손에 들고 있는 카드를 내려놓도록 하겠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전문가들께서 충분히 검토하시고 결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큰 결단에 대단히 감사합니다. 예상을 훨씬 초월하는 제안이라 무척 놀랍습니다. 대한민국 과기부 장관으로서 저는 그 정도의 결정을 내리지는 못하지만 중국의 진심 어린 제안을 이해하고 감사드립니다."


중국이 먼저 양보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중국의 연구기관들에서 제공할 기술자료를 검토하기에 앞서 리솦 연구소장이 한국이 채택한 위성에서 지상까지의 전송 방식의 간략한 설명에 덧붙여 현재까지 마이크로파를 이용한 전송효율이 15% 라는 것과 향후 개발 목표를 공유했다.


자리에 있던 미령의 부모와 유카와는 리솦의 결과에 깜짝 놀랐다. 중국의 전송률은 현재 9~10%대이지만 안정성이 떨어져서 보완작업을 하고 있지만 낙관적이지 않음을 공개했고, 유카와 교수는 일본 작사의 전송률은 그에 크게 못 미치는 6%대라고 했다. 솔라패널 대량 생산과 발사체는 중국이 압도적이었고, 위성 제작과 전기설비는 일본의 개발단계가 높았다. 자연스럽게 3국간 국제 협력을 위한 주된 방향이 정해졌다.


심포지엄이 다시 시작되었을 때 다들 밤새 생각을 많이 했는지 자유 발언과 토론이 어제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명확했다. 게다가 한중일이 국제공조체제에 원칙적 합의에 이르렀으며, 각 국가가 중점적으로 진행할 역할에 대해서 공감대가 만들어졌다는 소식에 심포지엄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토론은 점점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토론 내용을 요약하면 실제 실행 가능한 계획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참석한 사람들 모두 진심이었다. 다만, 바바라와 미국에서 온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가장 많은 관심이 몰리고 열띤 토론이 있었던 분야는 위성에서 전송한 마이크로파를 수신할 리시버를 어디에 설치하고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에너지 레벨이 높은 마이크로파를 정기적으로 수신할 장소를 선택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안전에 대한 사안이지만 사실 국가적 이익이 달려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안전만을 생각한다면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사는 도시와 떨어져 있으면서 비행기나 기차 등 사람의 이동이 적은 중국 서부의 사막지역을 높은 순위로 고려하겠지만 고압의 전류를 한국과 일본까지 송전하기 위해서는 넓은 중국대륙을 가로지르는 파워 그리드를 새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비용과 안정성에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모든 전기를 중국 본토에서 공급받는다면 정치적이거나 외교적인 문제가 있을 때 중국이 전기 공급을 무기화할 수 있다는 우려였다. 또한 전기는 속성상 저장할 수 없으며 실시간으로 소비되지 않으면 소실될 뿐 아니라 자칫 생산시설이 파괴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모든 리시버를 중국 본토에 설치하는 것에는 한국과 일본 모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한국이나 일본 중 한 곳에 리시버를 설치하는 방안은 중국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결국 세 나라의 중간 지점에 있는 제3의 장소가 필요했다. 그러나 한중일의 중간 지점인 서해바다는 여름철마다 태풍이 북상하는 경로이기 때문에 해상 리시버를 설치했다가 자칫 대규모 정전 사태를 맞을 수 있으며,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에는 복구에 많은 시일이 소요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결국 육지가 아니라면 단단한 암반이 있는 섬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사토시 관방장관은 일본이 나가사키 서쪽 160km 지점에 일렬로 늘어서 있는 작은 열도 중 하나에 리시버를 설치하고 다른 섬은 필요한 전기설비와 비상장치를 운영하는 데 사용하는 것을 제안했다. 한국이 동의했으나 중국은 자국 본토에서 너무 멀고 사세보의 군항과 너무 가까워서 위협적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지진대에 너무 가깝게 있어서 구조물 자체의 안정성을 보장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대신에 중국은 상하이 앞바다의 유인도를 제공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혔다. 지진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오랫동안 군사용으로 사용해 왔기 때문에 항공기 착륙이 가능하고 전기나 수도 등 필요한 인프라가 이미 잘 구축되어 있어서 리시버와 관련한 부대시설 설치와 유지에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한국과 일본도 긍정적이었으나 중국 본토에서 불과 2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비상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경비병력 배치와 각국의 숫자 및 무장 정도에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특히 일본은 리시버 사이트에서 500km 이상 떨어져 있습니다. 긴급사태가 발생하는 경우에는 즉각 대응이 어렵기 때문에 일본의 경비 병력과 무장 정도가 많고 높아야 합니다. 특히 해상 지원을 위한 함정이 상시 배치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건 가능하지 않습니다. 섬 주변에 군함을 배치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경비정은 3국이 공동운영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중국은 평화적인 목적을 위해 자국의 영토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경비와 비상사태를 위해서 3국이 동일한 수준의 무장을 갖춘 동수의 병력을 배치하는 것은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국이 군함을 배치하여 상시적인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공조를 깨트리는 행위입니다."


"중국 본토에서 불과 2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상시적 군사 우위는 군함 몇 척을 배치하는 국가가 아니라 중국에 있습니다. 중국은 항구적 군사 우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상사태가 발생하는 경우에 먼저 섬을 장악하는 쪽은 중국이 아닌 나라가 되어야만 합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야 합니다. 샹하이는 사실상 중국의 경제 수도입니다. 지역 내 총생산인 GRDP으로 보면 중국 내 1위입니다. 그런 도시의 외곽 20km밖에 외국 군함이 상주한다면 일본은 동의하시겠습니까? 지금은 150 GWh 규모지만, 우리는 모두 향후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의 거의 모든 전기를 우주태양광발전으로 충당할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그 시점이 되면 리시버에 대한 의존도가 모두에게 치명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군사적 개입 여지를 없애야 합니다."


"그 시점이 되면 전기 수요가 더 늘어날 것이고 위성의 숫자와 솔라패널 면적 그리고 리시버 숫자도 더 많아지고 넓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복수의 리시버가 각 국에 몇 개씩 설치되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러나 그건 이번 프로젝트가 잘 되는 경우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리시버를 중국의 직접 영향권 안에 두기 위해서는 일본과 한국이 필요시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있어야 합니다."


"그 대응조치가 중국입장에서는 공격 혹은 침략의 징후로 읽힐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하십니까? 샹하이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난징이 있습니다. 역사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난징이 언급되자 사토시 관방장관이 벌떡 일어났다. 얼굴이 시뻘게진 그는 큰 소리로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했고 이에 지지 않고 미령의 부모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사토시 장관이 하는 말을 하나하나 반박했다. 한참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다가 미령이 잠시 휴식 시간을 갖자는 제안을 하자 서로 쳐다도 보지 않고 퇴장했다.




한중일이 다시 만난 것은 한 시간 후였다. 귀령이 직접 와서 사람들을 데리고 간 곳은 호텔의 옥상이었다. 급조한 티가 역력히 나는 햇빛가리개만 설치되어 있을 뿐 테이블과 의자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갑자기 장소를 바꿔서 죄송합니다. 회의장에 침투와 도청 시도가 있었다는 믿을만한 이유가 있어서 미리 말씀드리지 않고 누구도 접근하기 어려운 곳으로 장소를 변경했습니다. 다행히 날씨가 좋으니 이곳에서 이야기를 계속해도 될 듯합니다. 더불어 강조드리고 싶은 것은, 여기 모이신 분들의 안전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를 포함한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작전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저희가 안전을 책임지겠습니다만, 저들의 음모는 오늘내일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본국과 연락하셔서 특별한 경호조치를 꼭 하시기를 바랍니다."


순간 미령은 얼어붙은 듯했다. 디테일에 집중하다 보니 한중일의 공조가 직접당사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결국 국제질서와 국가 간 역학관계 그리고 거대 자본의 이해관계를 변화시킬 것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 특히 선진국 지위를 누리며 권력을 행사해 온 미국과 유럽이라는 변수를 결코 배제할 수 없었다.


미국과 유럽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을 것이 없기 때문에 협상과 거래라는 방법이 아닌 다른 수단을 동원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미령의 손에 땀이 났다. 로컬이라 생각했던 일이 사실은 가장 국제적인 함의를 가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연구소장과 장관 그리고 유카와 교수와 사토시도 같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격렬했다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호텔 옥상에서의 회의는 첨예했다. 리시버 사이트 위치와 관리 방식, 송전 채널 구성, 비용 할당 등 많은 주제들이 구체적으로 논의되면서 더더욱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누구도 판을 깨려 하지 않았다. 아까의 난징 같이 민감한 주제를 회피하면서 필요에 따라 해당 분야 전문가의 의견을 참고하면서 하나하나 정리하려 노력했지만 진전은 쉽지 않았다.


마침내 미령의 어머니가 손을 들어 발언권을 요청했다.


"31°47'58.4"N 125°31'21.1"E 입니다. 이 지역은 TNT 5천 톤에 해당하는 작은 파괴력만으로도 안정적이고 충분히 넓은 인공섬을 확보할 수 있는 이상적인 해저 지질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공지진으로 융기하는 지형은 약 500 평방 km 면적의 타원원 평지일 것이고 단단한 해저 암반이 받치고 있습니다. 한중일의 중간 지점에 해당하면서 지진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대륙붕 지형이라 수심이 낮고 파도가 약합니다."


국무원 총리인 미령의 어머니는 이미 오래전부터 중앙위원회와 인민대표회의로부터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듯 많은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주에서 생산한 전기를 받을 지상 리시버를 어디에 두는가에 대해 아무런 진전이 없자 3국의 중간지대에 인공지진을 이용해서 제주도 면적의 ⅓ 정도의 평평한 인공섬을 만들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눈이 휘둥그레 해진 사람들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지질전문가를 불러서 지형과 필요한 조건 그리고 성공확률등을 설명했고, 관련한 모든 자료를 한국과 일본의 검토를 위해 공유했다.


여성이 직장을 가지는 것이 흔한 중국에서 좀 특수한 일을 할 뿐 평범한 어머니라고 생각했던 미령은 어머니가 아닌 14억 중국인을 이끄는 국무원 총리로서의 모습을 처음 봤고 자신이 상상하지 못할 큰 스케일의 일을 다루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미령은 리솦 연구소장과 과기부 장관 그리고 유카와 교수와 사토시 관방장관을 둘러봤다. 다들 중국의 놀라운 제안에 충격을 받았으나 동의할 수 있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사토시 장관은 인공지진이 일본 주변의 지진대에 영향을 줄 수도 있음을 우려해서 인공지진을 제시한 지질전문가에게 가능성을 따져 물었다. 지질전문가는 일본의 동쪽 해안을 타고 지나가는 불의 고리와 인공지진을 발생시킬 수역은 600 km이상 떨어져 있으며, 이 거리는 후쿠오카에서 서울까지의 직선거리보다 더 멀고, 한중일의 경계까지 약 300km 이상 거리가 있기 때문에 부수적인 피해가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인공섬을 사용하는 것이 항구적인 안정성을 확보하는 면에서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모두들 동의했지만 사토시 장관은 여전히 지진을 우려했다. 제주도 남쪽 마라도 앞바다에 있는 이어도의 암초위에 인공구조물을 만드는 방안도 고려되었으나 향후 수십 년 혹은 그 이상을 사용해야 하는 리시버 사이트를 한국의 영향권에 두기 부담스럽다는 의견과 한국 역시 타국의 군대나 함선이 이어도 주변 수역에 장기 주둔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는 지상으로 전송된 전력의 배분 비율과 비용 조달이었다. 이 또한 무수한 난항이 예상되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길고 지루한 핑퐁으로 협상이 결렬되었다가 재개되어야 모두가 동의하는 그러나 결국 모두가 크고 작은 손해를 보는 합의에 이를 수 있을까 생각하며 미령은 벌써 머리가 아파 오는 것 같았다.


물론 그 일은 외교와 통상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진행하겠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는 서로가 조금씩 양보해서 전체 파이를 나눠 가지면 아무런 손실 없이 온전하게 혜택을 나눠가지자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협상이란 반드시 뭔가를 줬으면 꼭 그만큼을 돌려받아야 하는 냉정하고 정확한 것이기 때문에, 자국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지만 상대에게는 손해를 끼치는 조건을 내걸곤 했다. 그런 협상카드를 반복하다 보면 최종 합의의 대상이 되는 파이는 크게 줄어들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환경의 제약을 극복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것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제도를 극복하는 일인 듯합니다. 생산물의 배분과 비용 할당은 동북아시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국가와 민족이라는 틀에 갇혀 있는 한 결코 모두에게 최선이 되는 합의에 이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안은 여기 계신 분들처럼 구체적인 현실을 아는 사람들이 아니라 정치인들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업다운이 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자칫 모든 것을 무위로 돌리는 어리석은 결정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14억 중국인을 위해 일하는 총리로서 저 역시 많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당장의 작은 이익이 아니라 함께 더 큰 이익을 오래 누릴 수 있는 쪽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미령의 어머니는 돈을 낸 만큼 혹은 기여한 만큼 생산된 전력을 배분받는 방식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 사용하고 사용한 비율에 따라서 비용을 부담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제한된 자원을 가격과 돈에 따라 배분하는 전형적인 자본주의 방식을 거부한 것이다. 추후 상세 사항이 추가되겠지만 원칙은 분명했다. 각국의 경제규모와 인구에 비례하는 비율로 전력을 배분하되 절대량에서 중국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만큼 우선권을 한국과 일본에게 양보하겠다는 매우 우호적인 조건이었다.


이로서 거의 모든 사항이 타결되었다. 비록 한국과 일본은 각국의 주요 의사결정자들에게 보고하고 승인을 받아야 하지만 중국이 매 사안마다 양보한 만큼 한국과 일본의 장관들은 국회와 내각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있었던 어떤 협상도 이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합의된 적 없었기 때문에 조속한 시일 내에 최종안이 타결될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사토시 국방장관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문서로 남기고 서명을 해야 한다고 했을 때 미령의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약속은 지켜져야 합니다. 우리는 약속을 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의 의사결정이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일일이 문서에 쓰고 사인한다고 해도 약속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중국은 진심입니다. 이 판을 깨고 싶지 않습니다. 상황이 달라지면 다시 모여서 이야기합시다. 그게 전부입니다."


마침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나눌 때 미령의 부모는 다시 한번 안전에 유의할 것을 당부했다. 군사적 행동은 아닐 것으로 예상하지만 주요 인물에 대한 테러나 납치가 있을 수 있음을 거듭 강조했다.




"고생 많았어요. 대통령입니다"


미령과 일행은 대통령 전용기가 베이징 공항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에 놀랐었다. 그 놀람이 채 가시기도 전에 비행기 안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대통령을 보고 다시 한번 놀랐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이삼십 명에 달하는 정부 요인과 국회의원들과 함께 베이징으로 와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음 같으면 지금 당장 자리에 앉아서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을 이야기하라고 하고 싶지만 다들 잠도 못 자고 고생하셨을 테니, 대통령 전용기 한번 구경들 하고 오세요. 마실 것도 달라고 해서 드시고요. 맥주도 한 캔 정도는 괜찮아요."


대통령은 일중독자였지만 유머가 있었다. 놀라서 꼼짝 못 하고 서있는 일행들에게 대통령은 웃음을 터트리며 전용기 한 바퀴 둘러보고 오라며 등을 떠밀었다.


"대단한 성과예요. 리솦 연구소에서 개발한 전송기술에 대한 설명을 듣고 기뻤었는데 이번에는 통상 전문가들도 하기 어려운 합의까지 해내시다니 천박사님, 소장님 그리고 장관님 정말 놀랍습니다. 제가 가장 먼저 알고 싶은 것은 중국의 태도입니다. 협상 과정에서 중국이 예상밖의 양보를 여러 번 했습니다. 중국이 이렇게 전향적으로 나오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이뻐서 그런 것은 아닐 테고. 혹시 그게 이유라면 당장은 몰라도 장기적으로 유지되지 못합니다."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미령 자신도 중국이 이번 협상에 임하는 자세에 놀랄 정도였다. 과기부 장관은 중국의 태도가 우호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매우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이유가 있다고 했다.


첫 번째로는 중국이 협상 테이블에 내놓을 것이 발사체 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현재 솔라 패널은 중국이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지만 우주태양광발전에 쓸 정도 퀄리티의 패널 부문에서는 일본의 정밀 가공 기술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으며, 전송기술의 효율은 한국의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이라서 중국이 쓸 수 있는 카드가 얼마 없다는 진단이었다.


발사체의 경험과 운용 능력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창정 시리즈는 메탄 엔진을 성공적으로 이용한 스페이스 X에 대비해서 비용이 많이 들고 페이로드가 1/4에 불과할 뿐 아니라, 메인 로켓의 재사용도 아직 완전히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당한 양보가 불가피하다고 장관은 지적했다.


두 번째로는 중국이 직면하고 있는 전력 수요의 폭증 때문이었다. 특히 중국이 인공지능과 데이터 센터 영역에서 미국을 넘어서려고 하기 때문에 기존의 발전방식으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전력수요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대안으로 떠오른 우주태양광발전은 중국에게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고 자국이 부족한 것을 채워 줄 수 있는 한국과 일본과 반드시 안정적인 공조체제를 구축하고 장기적으로 유지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자국의 부족한 점을 인정하고 대안을 찾는 유연성을 보였다는 점에서 중국 지도부의 선제적인 양보를 이해하는 것이 장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핵심이라는 평가였다.


대통령은 상황을 바로 이해했다.


실용적으로 우리로서는 좋은 조건을 얻을 수 있고 상대방은 약간의 양보를 통해 전략적 목표를 확보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윈윈이었다. 전용기에 탑승한 요인들과 앞으로의 방향 등을 논의하는 사이에 비행기는 성남 비행장에 도착했다. 대통령은 미리 차량을 준비해 두었으니 집에 가서 편히 쉬고 내일 아침에 일찍 만나서 다시 이야기하며 한 명 한 명과 악수했다. 밤 11시였다. 그리고 평소 대통령은 8시 전에 일을 시작했다.


차에 오르자마자 미령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다. 지난 며칠간은 많은 일이 긴박하게 이루어진 탓에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긴장상태로 있었으니 그랬나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조수석에 앉아 있는 국정원 요원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잠이 든 듯 보였다. 운전석에 있던 사람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천박사님 좀 피로가 풀리셨나요. 일전에 만나 뵀던 스미스 요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