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스스로 빛나라

태양은 가득히 (11/12)

by 달을보라니까


#11. 스스로 빛나라


스미스 요원이 어떻게 삼엄한 경계를 헤치고 차를 탈취할 수 있었는지 미령은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첩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미국 CIA 요원이 자신이 타고 있는 차를 운전하고 있고 옆자리에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국정원 요원이 늘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스미스 요원은 가끔씩 룸미러로 미령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 갔다.


"천박사님, 미국이 천박사님을 원합니다. 박사님 자신의 학자로서의 성공은 물론 박사님의 부모님과 동생 그리고 주변 사람에게 큰 혜택을 미국 정부가 보장합니다. 지금은 대한민국 국회에서 천박사님께 지난 잘못을 사과하고 대통령도 지원하고 있지만 그들은 단지 4년 혹은 5년짜리 정치인에 불과합니다. 내일이라도 여론이 바뀌고 중국과의 관계가 틀어지면 그들은 천박사님을 십자가에 매달 겁니다. 미국으로 오십시오.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 때나 여권만 들고 인천공항으로 오시면 저희가 모든 것을 해드리겠습니다. 내일 아침도 좋습니다."


미령은 아무 말하지 않았다. 스미스 요원은 말을 이어 나갔다. 한국 대통령의 명령으로 미령을 위해 준비된 차를 자신이 운전하고 있듯이 미국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아직까지는 그런 액션이 필요한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라며 미령에게 잠깐의 달콤함에 속지 말라고 했다. 주변 사람을 언급한 이유가 박의 존재와 자신과의 관계를 모두 알고 있다는 뜻이라는 것을 생각하자 미령의 가슴이 서늘했다. 불안감이 올라왔지만 표정에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룸미러에서 스미스 요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웃음 띤 얼굴로 박과는 이미 이야기가 끝났다고 말했다.


"박은 지금의 아내와 이혼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받아들이지 않았고 박의 부모를 찾아가서 지금 진행하고 있는 대형 건설사업과 다른 모든 사업에 들어간 투자금을 당장 회수하겠다고 했습니다. 결과는 짐작하시는 대로입니다. 생각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박은 한 번도 생활인으로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지금 연구소에서 받는 월급이 얼마인지도 잘 모를 겁니다. 박의 아내는 박에게 천박사님의 동생 결혼식에 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때 CIA가 박을 만났습니다. 박은 천박사님과 미국으로 가기를 원합니다. 미국에서 천박사님과 함께 하고 싶어 하십니다."


미령의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스미스 요원은 얼른 뛰어와서 자동차 문을 열어주고 엘리베이터까지 짐을 들어다 주었지만 미령은 자신이 어떻게 집에 들어오고 잠이 들었는지 기억하지 못 한채 아침에 눈을 떴고 기계처럼 연구소로 출근했다.


뉴스는 온통 시끌벅적했다. 사토시 관방장관의 브리핑을 본 일본 국민들은 인공지진을 일으킬 것이라는 계획에 경기를 일으켰다. 중국에서 제공한 자료에만 의존하지 않을 것이며, 자국의 전문가들이 철저히 검토해서 결정할 것이라는 설명에도 한번 틀어진 여론은 식을 줄 몰랐다. 인공지진은 곧 일본에 대재앙을 가져온다는 쉽고 간단한 구호가 일본 전역을 휩쓸었다. 엉뚱하게도 여론의 화살은 한국으로 향했다. 한국이 중국을 속여서 인공지진을 일으키게 하고, 일본이 지진으로 타격을 입은 사이에 일본 경제를 야금야금 먹어 들어오려고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일본에서 대규모 혐한 시위가 벌어졌다.


국익과 진실보다는 당장의 후원금과 슈퍼챗에 눈먼 스트리머들과 유튜버들이 날뛰면서 자극적인 선동이 뉴미디어 채널을 뒤덮었다. 일본에서 촉발된 불꽃은 금세 한국으로 옮겨 붙었다. 일본의 혐한시위에 맞불을 놓자며 시작된 유튜버들의 선동은 민족감정을 건드리면서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는 매일 밤마다 촛불을 든 사람들이 노재팬을 외쳤고 어느 순간 슬며시 반정부 구호들이 섞이기 시작했다. 이런 목적의 시위에 촛불을 들지 말라는 사람들은 그들끼리 모여서 구호를 외치고, 평소 일본을 좋아하던 사람들은 그들대로의 구호를 외쳐댔다.




몇 달을 끌던 소란이 우여곡절 끝에 진정되고 마침내 일본 사람들은 미래를 향한 결정이라는 내각의 설득을 받아들였다. 한중일의 중간지점 대륙붕에 TNT 7천 톤 규모의 폭발물이 설치되었다. 원래 예상보다 많은 규모였으나 두 번째 기회는 없기 때문에 충분한 양을 사용하기로 3국의 전문가들이 결정하였다. 폭파 스위치를 누르는 날 많은 일본 사람들은 성공을 기원하는 깃발을 내걸었고 큐슈 해변가는 결정을 철회하라는 집회에 수백 명이 모였다.


해저 폭발은 실시간 중계되었다. 수면에서 보이는 폭발 반경과 지진파는 모두 예상대로였다. P파와 S파 모두 예측된 규모와 속도로 정확히 진행되었고 모든 것은 완벽하게 성공한 것으로 보였다. 실시간 중계화면에는 대성공이라는 자막이 올라왔다. 이후 며칠 간의 여진 역시 예상대로여서 모두들 계획했던 대로 2주간의 관찰기간이 무사히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2주가 다 돼 가던 어느 날 밤 지진계가 미친 듯이 움직였다. 진앙지는 엉뚱하게도 우려했던 나가사키 쪽이 아니라 큐슈 반대편인 미야자키 앞바다였다. 몇 분 후 강한 지진이 큐슈 남부를 덮쳤다. 다행히 인구 밀집지역이 직접 타격을 받지 않았고 다들 인공지진에 뒤따라 올지도 모르는 지진을 대비하고 있던 터라 인명피해도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며칠간의 긴장을 풀고 잠이 들었다. 거센 비와 바람이 불었다. 밤이 깊었을 때 바다가 점점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고 해안가에는 파도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미야자키에서 시작된 대규모 쓰나미는 큐슈와 시코쿠 사이로 거세게 밀려들어왔다. 이요 나다(伊予灘)와 스오 나다(周防灘)의 해안선을 지도를 다시 그려야 할 정도로 거대한 쓰나미가 세토내해에 몰아쳤고 오이타와 마츠야마 도심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심지어 최서단의 시모노세키까지 쓰나미가 휩쓰는 동안 잠을 자고 있던 사람들은 피할 틈도 없었다.


"가족과 친지를 잃고 평생 이룬 모든 것을 잃어버린 수많은 일본 여러분께 진심 어린 위로와 사죄를 드립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것이라는 오만한 마음이 일본 국민들께 돌이킬 수 없는 깊은 피해를 입히게 되었습니다. 저의 잘못입니다. 죄송합니다. 상처받은 많은 분들께 조금이라도 위로와 위안이 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사고가 발생하고 두 시간 후 일본의 모든 TV와 라디오는 기존 방송을 중단하고 중국 최고 지도자가 일본에 대해 사과하는 연설을 실시간으로 중계했다.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대역이나 딥페이크를 이용한 가짜 방송에 일본 방송들이 속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어진 보도에서 중국의 사과방송이 사실이었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 대통령이 쓰나미 피해를 입은 도시들에 직접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 세계 사람들은 한국과 중국의 지도자들이 아무런 미사여구와 외교적 수사 없는 솔직하고 진실하게 사과했다는데 놀랐다. 사토시 관방장관과 총리의 셋푸쿠(割腹 かっぷく)를 요구하던 일본 급진파들도 말을 멈췄다.


곧이어 한국에서 도착한 긴급구조대와 자원봉사자들이 후쿠오카 공항에 내려서 장비를 챙기는 장면과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오이타의 번화가인 JR 오이타 역 앞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있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방송에 나왔다. 그 후 시간이 갈수록 재해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과 중국에서 온 자원봉사자들의 숫자가 계속해서 늘어나는 것을 본 일본 사람들은 하나 둘 작업복을 입고 큐슈와 시코쿠로 향했다.


미령은 직접 당사자는 아니지만 프로젝트에서 주요 역할을 한 사람으로서 마음이 복잡했다. 그러나 그보다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자기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여름이 끝날 무렵부터 조금씩 불러온 배가 이제는 감추기 어려울 지경이 됐기 때문이었다. 곧 박이 알게 될 텐데 그러면 당장 모든 것을 버리고 미국으로 넘어가자고 할까 봐 박에게까지 임신 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 속만 타들어가고 있었다.




베이징에서 돌아오는 날 CIA가 미령을 납치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국 정부가 미령을 철통같이 경호하는 바람에 산부인과에 정기적으로 다니는 것도 갖은 이유와 구실을 찾아야 할 정도였기 때문에 미령의 속은 하루하루 바짝 타들어 갔다.


다행히 미령의 어머니는 화상회의에서 멀찍이 앉아있는 딸을 보고도 상황을 알아채고, 적당한 이유를 만들어 줄 테니 다른 생각하지 말고 중국으로 오라는 전갈을 보냈다. 미령이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엄마의 말대로 중국으로 가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을 때 뒤에 따라오고 있던 경호차량을 커다란 트럭이 옆에서 들이받음과 동시에 검은 SUV들이 미령이 탄 차와 앞의 경호차량을 에워쌌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운전석에 총을 들이대서 문을 열게 한 후 미령의 머리에 검은 자루를 씌었다. 한참 후 자루를 벗겨졌을 때, 앞에는 스미스 요원이 앉아 있었다.


"천박사님의 의사와 무관하게 박사님을 지금 바로 미국으로 모시고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박사님을 짐짝 취급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박은 벌써 여기에 와 있습니다. 박은 원치 않는 결혼과 사업가들의 계약 그리고 돈으로 엮어진 굴레를 단번에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두 분만의 인생을 미국이 보장합니다."


"저는 제가 태어난 조국과 애정하는 조국을 모두 버리고 미국으로 도망가서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아요. 저는 여기에 남을 겁니다."


"천박사님 가족들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제 가족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습니다. 저와 다릅니다."


그때 스미스 요원에게 여자 요원이 다가와서 귓속말을 했다.


"천박사님 임신 중이셨군요!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모시는 방법이 거칠었던 점 사과드립니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셔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또 있으셨군요."


곧 박이 들어왔다. 그러나 박의 표정은 왜 하필 지금이냐는 듯 떨떠름했다. 미령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임신 사실이 박에게 알려진 것이 싫었고 박의 반응은 죽도록 싫었다. 자신이 알던 밝게 빛나는 박은 비겁하지 않았고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배신하지 않았기 때문에 빛을 잃어버린 박이 추해 보였다.


미령은 박에게 박의 위신과 가족관계에 아무 문제없도록 자신은 중국으로 가서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을 테니 지금처럼 정략결혼을 유지하며 살라고 했다. 마음속으로는 박이 자신을 옭아매는 가짜 결혼생활을 벗어버리고 자신과 함께 하겠다고 말하기를 바랐지만 박은 계속 다른 말만 할 뿐이었다.


그때 문을 열고 귀령이 들어왔다. 미령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귀령은 CIA가 보낸 가짜 메시지에 속아서 언니를 데리러 한국으로 온 것이었다. 스미스 요원의 끈질긴 회유와 협박에 미령이 지쳐 쓰러졌을 때 멀리서 큰 소리가 들렸다. 미령과 귀령을 두고 밖으로 나갔던 스미스 요원이 한참 후에 성난 표정으로 한 손에 총을 들고 나타났다. 마지막 기회였다고 외치며 스미스 요원이 총을 겨눴을 때 미령은 몸으로 동생을 가로막았다.


귀령을 뒤따라온 중국 비밀 요원들과 CIA의 총격전 끝에 귀령은 무사히 돌아왔지만 미령은 돌아오지 못했다.


자동차 사고사로 처리된 미령의 시신을 수습한 미령의 부모가 한국을 떠나는 날 공항에는 국화꽃이 수북이 쌓였다. 몇 시에 어느 비행기로 출발하는지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공항으로 모여들었다. 단 한 번도 미령을 만나보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미령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늘 미령에게 까칠하고 엄격하기만 하던 소장은 연구소 역사관 한켠에 미령의 사진을 걸도록 했다.


어느 밤 소장은 미령의 사진 밑에 작은 글씨로 ‘어처구니없이 불행했지만 스스로 빛나던 여자’라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