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ice of Life
"삼척에 다녀오는거야. 네가 바다 좋아하잖아. 나는 너 좋아하고."
- 박준, <어떤 셈법>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 김지운, <달콤한 인생>
박찬욱 감독을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 <올드보이>의 원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분은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미네기시 노부아키가 작화를, 츠치야 가론이 시나리오를 각각 맡은 동명의 만화는 1996년부터 1998년에 결쳐 연재되었으며, 그다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습니다. 어떤 남자가 이유를 알지 못 한 채 어딘가에 10년간 감금됩니다. 10년의 시간을 독방에서 고스란히 보낸 남자는 역시 이유를 알지 못 한 채 10년이 지난 어느날 갑자기 자유의 몸이 됩니다. 그리고 그 남자는 그 오랜 시간 본인을 감금한 사람을 찾아 길을 나서게 됩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 사건의 원인이 된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나가는 작품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은 단연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입니다. 이 작품은 1999년부터 8년에 걸쳐 연재된 후 22권을 마지막으로 완결되었으며, "이런 장르"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거의 언제나 언급됩니다. 저는 집필 시점이나 설정 등 여려 면에서 우라사와 나오키가 분명 <올드보이>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만, <배틀로얄>이 해당 장르에서 원형적 작품으로 자주 언급되는 것과 달리 <올드보이>는 영화의 명성에 묻혀버렸기 때문인지 의외로 인지도가 낮습니다.
이는 아마도 범인의 동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영화 <올드보이>의 범인이었던 이우진(유지태 분)은 본인이 사랑했던 사람을 죽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오대수(최민식 분)에게 같은 고통을 심어주기 위해 복수를 기획하고 실행합니다. 증오라는 감정에 기반한 복수라는 범죄의 모티브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며, 관객이 쉽게 받아들일 만한 개연성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만화 <올드보이>의 경우 범인인 카키누마가 주인공 고토를 감금하는 이유는, 초등학생이었던 시절, 외톨이에 왕따였던 카키누마의 고통에 유일하게 공감한 사람이 고토였기 때문입니다. 학업 성적은 우수했으나 왜소한 외모와 소심한 성격을 지니고 있던 카키누마는 공부를 제외한 모든 것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반면 주인공 고토는 성격도 밝고 풍채도 좋아 반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러던 중, 음악 시간에 한 노래를 독창해야만 하는 상황이 있었고, 카키누마가 작고 초라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를 때 다른 급우들은 모두 그를 비웃었습니다(항상 아이들이 가장 순수하게 잔인하죠). 그런데 고토는 같은 노래를 들으면서, 그 노래 속에서 카키누마의 열등감과 고독을 읽어 내고, 거기에 공감하여 눈물을 흘리기에 이릅니다. 자신감 없이 웅크리고 있던 자신의 고독에 공감했던 유일한 친구였다는 것, 그것이 10년간 고토를 독방에 가두어버렸던 이유였습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20대 초반의 나이에, 마지막 결말을 읽은 저는 저렇게 생각하며 마지막 장을 덮었던 기억이 납니다. 남들은 모두 자신을 욕할 때 유일하게 자신에게 공감해 준 사람을 향한 사실상 동경에 가까운 감정이 범죄의 동기였다니 터무니 없는 설정이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중학교 시절의 저는 평범했던 학생이었습니다. 키가 큰 편이기는 했으나 외모에 그다지 신경쓰던 시절이 아니라 아침에 머리를 안 감고 떡진 채로 등교하기 일쑤였고, 무협소설과 만화를 즐겨 늘 소설이나 만화책을 손에 들고 다녔습니다. 학업 성적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전교 100등 언저리에 있을 뿐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학생일 뿐이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과 3학년을 같은 반으로 지낸 꽤 친했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저만큼이나 평범했던 그 친구와는 농구도 같이 하는 팀이었고, 방과 후에는 친구의 집에서 게임도 같이 하고 학교에서 만화책도 돌려 읽었습니다. 졸업을 며칠 앞둔 어느날 갑자기 그 친구가 말했습니다.
"졸업하기 전에 너 X 되는 거 한 번 보는가 싶었는데 결국 한 번을 못 보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 말을 하기 전에 우리는 전혀 다른 대화를 하고 있었고, 저 말이 갑자기 튀어 나온 후 곧 다른 주제로 옮아갔기 때문에 별다른 충격을 받거나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졸업 때까지 평화롭게 잘 지냈고, 졸업 이후 단 한 번도 서로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일까요. 지금 이 글에서 그 친구의 저 말을 기록할만큼, 저는 그 후 30년 정도를 살아오는 동안 저 말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고등학교 때의 일화도 있습니다.
2학년 여름 방학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희 학교에는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전학을 온 친구가 있었습니다(영어 선생님으로부터 "본토"라고 불리었습니다). 그 친구는 굉장히 공부를 잘 했습니다. 아니, 단순히 그냥 공부를 잘 하는 것이 아니라 몇 마디 대화를 나눠보면 타고난 재기와 재능이 넘치는 친구였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저도 꽤나 공부를 잘 하는 편이어서 그 친구와 성적이 앞설 때도 있고 뒤쳐질 때도 있고 그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무덥고 지루했던 기억으로 점철돼 있던 여름 방학 보충 수업("여름 방학"과 "보충 수업"이라는 단어는 참 한 데 얽히기 힘든 조합입니다)이 진행되던 어느날, 그 친구가 갑자기 저를 불러세웠습니다. 그리고는 따로 이야기를 좀 하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같은 반이기는 했지만 그다지 친하지는 않았습니다. 겹치는 관심사나 취미가 없었고 평소 어울리는 친구들도 달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친구가 따로 저와 이야기를 하자는 것에 조금 갸우뚱했습니다.
둘만 있는 곳으로 이동한 후, 친구가 꺼낸 말은 참으로 의외였습니다. 자기가 볼 때 우리 학교에서 정말 똑똑하다고 할 만한 사람은 본인과 저라고 생각하는데, 앞으로 같은 대학도 갈 것 같고 사회에서도 함께 활약할 것 같으니 지금부터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보충 수업이 끝나면 자기 집에 초대해서 같이 식사를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이 친구의 제안에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우선 집으로의 초대는 정중히 거절했던 것 같고, 친구가 되자는 제안에 대해서는 (아마도) 친구라는게 그렇게 "친구가 되자"고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던 듯합니다. 이 대답을 들은 친구의 반응도 표정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졸업할 때까지, 그 친구가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 친구와 저는 결국 같은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우리는 그 후 한 번도 교류한 적이 없고, 서로의 소식을 모른 채로 지금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선 중학교 시절의 일화와 마찬가지로 저는 이후 몇 십년 간 저 작은 사건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갑니다. 때로 우리는 이유 없이 누군가를 좋아하고, 또 이유 없이 누군가를 싫어합니다. 그리고 어떤 때 우리는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어하고, 또 다른 때는 명확히 싫어할 이유와 배경을 가지고 누군가를 미워합니다.
사람에게는 몇 가지 본원적인 기본 감정들이 존재할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희(기쁨), 노(분노), 애(슬픔), 락(즐거움)이겠지요. 이 희로애락은, 주위 상황에서 발원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감정을 느끼는 "본인"이 중심에 있는 기본 감정일 것입니다. 반면 동경과 질투라는 기본 감정은 감정을 느끼는 주체와 감정의 대상인 객체 사이의 "상대적 관계" 자체가 중심이 되는 감정인 듯합니다.
요즘 참 많이 생각하는 것은, 동경과 질투는 등을 맞댄 샴쌍둥이라는 사실입니다.
유명한 평론가 A와 B는 같은 대학 같은 과 선후배였습니다. 작가이자 비평가, 평론가로 이미 명망이 높던 A를, B는 지극히 동경했습니다. 그래서 본인의 첫 저서가 나왔을 때, 술자리에서 동경하던 A에게 수줍게 책을 내밀면서 선배님께서 읽어주시면 영광이었겠다고 말합니다. A는 책을 받아들었습니다.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B는 비틀거리며 화장실을 찾습니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본인이 A에게 건냈던 책이 화장실에 놓여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만 해도 충격이었을텐데, B는 그 후 둘을 모두 아는 지인으로부터 A가 B에 대해 흉내나 내는 형편없는 평론가라고 평한 것을 듣게 되고, 이후 B는 본인의 정치적 노선마저 변경해가며 전심전력으로 A를 공격하게 됩니다.
위 내용은 모두 소위 "카더라"이기 때문에 진위를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일화는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동경이라는 감정이 동경의 대상으로부터 무시받게 되면 질투로 화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맹렬한 질투는 때로 증오를 낳습니다.
때로 동경과 질투가 구분되지 않을 때도 있는 듯합니다.
제가 평생 가장 질투했던 사람은 - 이 이야기는 처음 하는 것 같네요 - 제 오랜 친우 중 한 명입니다. 저와 그 친구는 고등학교 때 친해졌는데, 그는 키도 크고 잘 생겼으며 스포츠 만능에 학업 성적도 우수했습니다. 무엇보다 친화력과 리더십이 있어 항상 친구들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저는 그 친구가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사람을 그토록 좋아할 수 있다는 것도 그 때 처음 알았던 듯합니다. 시간만 나면 그 친구의 집에 불쑥불쑥 놀러갔습니다(그 친구 집은 친구들 아지트였습니다).
온전히 저만의 생각일 수 있음을 전제로 말합니다만, 저는 아주 가끔 그 친구가 저를 미묘하게 무시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느낄 만한 일이 몇 번 있었는데, 그 어떤 정확한 상황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만큼 사소하고 미묘한 발언과 행동이었겠지요.
저는 친구가 너무 좋고 동시에 동경했지만, 그래서 대등히 옆에 서고 싶어 많이 노력했지만, 노력해도 닮을 수 없는 몇 가지 특성들에 대한 분명한 부러움과 질투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 마음을 들켰던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본인이 누군가를 질투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동경과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질투는 고개를 들 타이밍을 잘 잡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떤 감정들은 서로 상쇄가 되지 않습니다. 즉, 제가 친구를 동경하는 마음의 크기가 100이고 질투가 10이라고 한다면, 100-10=90이 되어 동경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동경 100과 질투 10을 오롯이 모두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크게 기쁘고, 동시에 크게 슬픈 것이겠지요.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 친구도 저의 어떤 면에 대해 질투의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제 감정을 오롯이 대면하지 않고 도망친 것일까요? 역시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네요. 이제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버렸기도 하고, 저희는 여전히 가까이 두고 오래 사귄 벗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 서로 배려하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관계에 파국을 가져올 수 있었던 질투라는 감정이 분명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감정이 증오로 화하지 않고 오래 지속되는 우정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생을 살면서 얻은 몇 안 되는 중요한 통찰 중 하나는, 관계의 형성과 유지에는 분명 쌍방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그 어떤 관계도 처음 서로 느낀 흥미와 호기심, 호의만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연인, 친구, 동료, 심지어 부모와 자식 등 실로 모든 관계에서 그러합니다.
저는 제 인생의 몇몇 장면들이 분명하게 후회됩니다. 저는 가끔 저에게 호의를 보이는 사람들의 호의를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를 질투하는 듯한 사람들이 등장하면 그들을 못 본 체 했습니다. 모멸차게 무시한 적은 별로 없었던 듯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분명 조금 더 따뜻하게 그들을 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젤로스는 질투의 신입니다(질투를 뜻하는 영단어 jealousy의 어원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리스 신화에서 젤로스의 형제가 니케(승리), 크라토스(힘), 비아(폭력)라는 점입니다.
질투는 때로 더 나은 자신을 위한 원동력이 되어, 힘과 승리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격지심과 증오로 연결되면 슬픈 폭력을 낳게 되기도 하지요.
<올드보이>의 악역 카키누마는 고토를 동경하고 동시에 질투했을 것입니다. 카키누마는 작품 마지막에, 본인에게 유일하게 공감하고 눈물을 흘렸던 고토를 앞에 두고서, 본인도 눈물을 흘리며 권총으로 자살합니다. "너같은 남자가 되고 싶었다"라는 말을 남기고서.
나이를 먹어가지만, 세상의 모든 관계와 감정은 여전히 저에게 너무도 어렵습니다. 시간이 더 지나면 조금은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지혜로운 사람이 되면 관계와 감정을 다루는 것이 조금쯤은 더 쉬워질지, 여전히 저는 알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