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요? 자동차를요?
한때 운전면허 시험이 무척 쉬웠던 시절이 있었다. 수능도 물수능, 불수능이 존재하는데 운전면허라고 없으랴. 당시 20대 초중반이었던 나는 주변에서 운전면허를 따두라는 권유도 많이 받고 운전면허 땄다는 경험담 또한 자주 들었다.
운전면허에 딱히 욕심이 없던 터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는데 기능 시험을 강화한다는 소식이 들리니 마음이 초조해져 면허를 취득했다. 왠지 지금 아니면 면허를 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비싼 신분증을 하나 얻게 되었다.
신분증이 잠들어 있던 장롱문을 열게 된 이야기를 하려면 우선 우리 집의 간단한 이력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 우리 집은 몇 년 전 분가한 언니까지 총 다섯 명으로 아빠는 운전을 참 잘한다. 낚시도 무척 좋아해 금요일 저녁이 되면 낚시를 하러 떠났다.
대개는 대부도였고 엄마는 크게 터치하지 않았으므로 주말만 되면 아빠는 인생을 낚으러 집 밖을 나섰다. 가끔 생각나면 엄마가 “야, 니네 아빠 어디서 뭐 한다냐?” 묻고는 하였지만 엄마도 모르는 걸 내가 알 리 없었다.
엄마는 수준 높은 장롱면허였다. 겁이 굉장히 많아 면허 따고 아빠와 함께 운전 연습하러 나섰다가 다시는 운전대를 잡지 않았다. 엄마 또한 꽤 비싼 신분증 하나를 얻기 위해 필기, 기능 시험을 치룬 셈이었다.
언니는 면허의 미음도 딸 생각이 없(어 보인)다. 동생 또한 말해 무엇할까.
결론적으로 다섯 명 중 운전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이었는데 아빠가 당최 집에 들어오지를 않으니 때때로 불편한 순간이 생겼다. 그때 본능적으로 느꼈다. 아빠를 이을 우리 집 차세대 드라이버는 바로 나라는 것을.
때마침 외숙모가 차를 바꾸면서 이전에 타고 다니던 모닝을 그냥 처분하기 아쉽다며 필요한 사람이 없는지 물어보았고 K-정서에 맞게 제일 연장자인 엄마 차지가 되었다. 아빠 대신 나를 운전기사로 키우고 싶었던 엄마의 설계는 그때부터 시작되었고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내가 차주로 낙찰되고 말았다.
이제는 내 것이 될 모닝을 모셔오기 위해 부천에서 여주로 향하던 날 나는 들떠 있었다. 설레었고 기대에 부풀었다. 운전이란 진정한 어른들만 즐기는 하이웨이 풍류로 여겼는데. 자동차란 외부 미팅이 잡혀 있는데 시간에 쫓겨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한 손으로 까리하게 핸들링하며 으와아앙 달리는 간지 철철 오피스룩 직장인들의 전유물로 생각했는데.
외숙모에게 자동차를 양도 받은 후 올라오던 고속도로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작고 소중하며 연식이 오래된 내 모닝이 앞으로도 잘 버텨주기를. 장롱면허에서 차주로 레벨업 시켜준 모닝이 나를 안전하게 좋은 곳으로 이끌어주기를 바라며 잔뜩 들뜬 마음으로 이름 지어주었다.
“아빠, 앞으로 얘는 한부왕이야.”
“(어이없어하며)왜?”
“경차지만 부와아앙 달리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거지. 그리고 거칠고 야성적인 느낌이잖아.”
개는 소형견일수록 더 자주 더 크게 짖는다. 몸집이 작을수록 살아남기 위해 힘을 과장하여 과시한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
도로 위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경차가 살아남으려면 이름이라도 야수처럼 지어주는 거다. 그게 어쩌다 차주가 된 보초운전자의 첫 번째 규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