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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Mar 31. 2024

일의 기쁨과 슬픔

누가 나한테 "일하는 거 재밌냐"라고 물어볼 때마다 나는 과장되게 손사래를 치면서 "하기 싫어서 죽겠어!"라고 말한다. 사실이다. 마감 직전마다 난 화면을 이분할 해 왼쪽엔 텅 빈 한글파일을 오른쪽엔 카톡창을 켠다. 한글파일에 한 문장을 적기 무섭게 나처럼 마감하기 싫어 죽겠는 애들이 보내는 카톡에 칼답을 하는 것이다. 카톡방이 유난히 조용한 날에도 딴짓할 방법은 얼마든 있다.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 들어가 짤이나 쇼츠를 한 3개 정도 보면 된다.


하지만 이 모든 산만함이 내가 일하기 싫어하는 걸 넘어 일 자체를 싫어하는 증거냐면, 그건 아니다. 도파민의 대홍수 시대에 한 줄 마감한 뒤 한 번 딴짓하는 건 다음 한 줄을 마감하기 위한 준비동작일 뿐이다. 게다가 주말까지 일 생각을 하다못해 지금 여기에 일에 대한 글을 끄적이고 있는 모습이라니. 일을 사랑하면 사랑했지 싫어한다면 거짓말인 게 분명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일이 재미있다고 일을 좋아한다고 하는 말만큼은 쉽게 꺼내기가 어렵다.


짝사랑하는 사춘기 소녀도 아닌데 좋아하는 걸 왜 좋아한다고 할 수 없는 걸까. 롤모델이 없어서 그런가. 일을 '제대로' 좋아하는 선배들을, 그러니까 할 때 하더라도 자신과 주변을 살뜰하게 챙기고 취미생활도 꾸려나가면서 삶의 균형을 맞추는 선배들을, 주변에서는 영 보기가 힘들어서. 일에 빠져 사는 어떤 선배는 진지하게 일을 하지 않는 주말에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또 다른 선배는 건강을 잃어서 회사를 나갔다. 일을 좋아하게 되면 적당히가 안 되는 걸까. 아니면 삶의 많은 부분을 포기해야만 일을 좋아하는 마음을 인정해 주는 나쁜 문화가 선배들을 괴롭혔던 걸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을 좋아하는 선배들이란 대체로 닮고 싶지 않은 모습을 갖고 있었다.


일을 좋아한다고 말을 꺼내는 차에는 말실수하기 직전처럼 꺼림칙한 기분도 들었다. 욕심쟁이처럼 보일까 봐. 일을 특출 나게 잘하는 것도 아닌데 자만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이건 일 잘하는 여자 선배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서 경험적으로 얻은 경계심이기도 하다. 일 좀 제대로 하는 여자 선배들에 대해서는 자주 '걘 좀 욕심이 많다'는 평가가 덧붙여지곤 했다. 평소에도 웃음소리가 높을 뿐인데, '성과를 내려고 여자짓 하더라'는 부당한 뒷말까지도 종종 따르는 걸 봤다. 이런 말들에 하도 시달려서인지 여자 선배들은 남자 선배들보다 뛰어날 때조차 자신을 낮추는 일이 많았다. 그건 겸손이고 미덕이었지만, 여성 노동자라는 집단의 측면에서는 가끔씩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 같았다.


일을 제대로 좋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이 좋아하는 마음을 담백하게 표현하는 건 또 어떻게 하는 걸까. 지나치게 나를 낮추지도 올리지도 않으면서, 그냥 일이 좋다고. 아직 난 답을 잘 모르겠다. 그래도 누가 "일하는 거 재밌냐"라고 또 한 번 묻거든 크게 손사래 치는 일만은 안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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