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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시 Apr 28. 2024

pizza day!

기억력이 나쁜 게 가끔 축복처럼 느껴진다. 월요일에는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데 어느새 동네를 가득 메운 초록빛을 깨닫고는 깜짝 놀랐다. 앙상하기만 했던 가로수에 어느새 푸른 잎들이 돋아나 머리 위로 긴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거였다. 오래간만에 일찍 집을 나선 터라 급할 것도 없어 페달을 밟는 발에 힘을 빼고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빽빽한 녹음 사이로 햇빛이 찰랑찰랑 비치는 게, 불어오는 바람에도 싱그러운 향이 실려오는 게, 언제 이런 풍경을 봤더라 싶게 낯설기만 했다.


살아온 날들이 길어질수록 지금은 짧아진다. 시간은 화살처럼 흐르고, 뭔가를 잊어가는 속도도 그만큼 빠르다. 3월이 끝나가는 걸 안타깝게 지켜보며 벌써 1분기가 지나갔다는 대화를 나눈 게 바로 엊그제. 4월을 떠나보내는 마음 또한 아쉬울 법도 한데, 채도를 높인 풍경 앞에 아끼는 봄 외투를 며칠 못 입은 것쯤이야 별 일 아닌 것처럼도 느껴진다. 5월의 생명력이 이토록 강력하다는 걸 새삼 깨달으며 그 앞에서 늦봄의 슬픔을 지울 수 있는 나의 한심한 기억력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이 아름다운 계절을 마음껏 누리겠다며 이번 주말에는 모든 의무감에서 해방된 채 하루종일 걷고 술을 마시고 낮잠을 자면서 보냈다. 우선은 낮부터 공원에 드러누워 만 원짜리 화이트와인을 마시다가 낮잠을 잤다. 술을 깨며 호수 주변을 걷다가 부대찌개에 소맥을 마셨고, 또다시 하천 주변을 걷다 테라스를 개방한 맥주집에서 시원한 생맥주를 들이켰다. 아무런 계획 없이 걸음이 이끄는 대로 동네를 산책하면서 말이다. 햇볕은 뜨겁지만 공기가 습하지 않던, 많이 걸어 땀이 날 때쯤이면 시원한 바람이 불던, 저녁 무렵 선선한 공기가 살갗을 스쳐 마음을 간지럽히던 날에 기분 좋은 취기가 더해지니 하루가 마치 축제인 것도 모험인 것도 같았다. 필히 이 하루를 위해 지난 일주일이 있었던 것이리라. 하루종일 흥얼거린 노래 pizza day! 속 빡세게 돈 버는 이유 피자 한 조각 맛나게 먹기 위함이라는 가사처럼 말이다.


천변에서 맥주를 마시던 중 애인은 내게 뭐가 되고 싶냐고 물었다. 망설임 없이 '작가'라고 대답한 나와 달리 애인은 나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게 꿈이라고 했다. 정말이지 되고 싶은 건 그뿐이라고 했다. 자꾸만 뭔가를 잊어가고, 그런 채로 과거를 흘려보내지만, 새로 돌아오는 계절이 반갑듯이 닳아가는 줄만 알았던 사랑의 말도 이토록 새롭다. 그 앞에서 나는 허무나 권태를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경탄하게 되는 것이다. 아, pizza day! 나도 마찬가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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