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익숙함 속의 균열: 직무순환 좌절

직무순환 좌절

by 다빈사랑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두 회사를 거치며, 나는 금융 업계의 같은 자리에, 같은 업무 루틴 속에 박제된 듯 앉아 있었다. 출근길 지하철의 익숙한 흔들림은 불안감을 달래주는 일종의 진통제와 같았다. 매일 아침 7시에 회사에 도착하면, 나의 이름이 박힌 책상과 언제나 똑같은 위치의 키보드와 모니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의실에 들어서면 지난 10년간(B사) 보아온 익숙한 얼굴들과 신규 비즈니스를 준비하는 영업맨들이 앉아 있었고, 우리는 늘 같은 주제를 대하듯, 시스템화된 각 부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논의했다. 점심 메뉴는 요일별로 정해진 듯 변화가 없었고, 퇴근 후의 일상 또한 예측 가능한 궤도 위에 놓여 있었다.

겉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안정적인 삶이었다. 새로운 비즈니스와 제도 변경 관련 업무는 분명 스트레스가 많았지만, 그 과정에서 새로운 지식을 얻는 재미도 있었다. 탄탄한 직장, 임원분들의 믿음과 신뢰, 견고한 직함,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은 나를 둘러싼 가장 두터운 보호막이었다. 남들은 부러워했고, 부모님은 안도하셨으며, 나 스스로도 '이만하면 괜찮다'고 되뇌곤 했다. 하지만 그 안정 속에서 나는 서서히, 그리고 끔찍하게 말라갔다. 마치 뿌리 뽑힌 식물이 겉으로는 푸른 잎을 유지하면서도 속으로는 시들어가는 것처럼, 나의 내면은 건조해지고 있었다.


나의 업무는 매뉴얼처럼 반복됐다. 모든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피로도가 쌓여갔고, 내 주요 업무와 관련이 없기에 왜 참여해야 하는지 의구심이 들 때도 많았다. 어느 날, 생기를 잃은 표정으로 회의에 참석한 나를 임원 한 분이 보시더니 "J과장은 일을 안 하려고 해서 그렇지 맡으면 잘하잖아!"라고 하셨다. 나는 일을 하기 싫어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우리부서와 관련없는 회의 참석에 의문을 가졌을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젝트에 투입되면 책임감에 실수 없이 잘해내고 싶은 성격이었기에 늘 최선을 다했다. 새로운 도전은 허용되지 않았지만 TFT(태스크포스팀) 소속으로 대부분의 프로젝트에 참여해야 했고, 주도적으로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나의 공식적인 경력으로는 온전히 인정되지 않았다.

그런 과정 속에서 점점 열정은 사그라들었고, 창의적인 고민은 설 자리를 잃었으며,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자각은 나를 짓눌렀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도 어제와 같은 하루겠지' 하는 예감이 제일 먼저 나를 찾아왔다. 그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어떠한 변화도 기대할 수 없는 일상은 나를 정체시켰고, 좁은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처럼 나는 점점 세상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내가 가진 역량은 특정 업무에만 국한되어 고착화되는 듯했고, 시대의 변화 속에서 나는 빠르게 도태되고 있었다.

이처럼 나의 20년 직장 생활은 외부의 큰 사건들과 맞물리며 내 안의 '균열'을 심화시켰다. 내가 첫 직장 A사에 근무하던 2001년 8월, IMF 차관이 조기상환되며 대한민국은 경제 위기에서 벗어났다. 2002년 월드컵 16강전 승리 당시, 회사에서 야근을 하고 있었는데 창밖의 풍경이 진풍경이었다. 길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과 차들이 뒤썩여 대한민국을 환호하는 모습에서 비록 함께하지 못했지만 그 감흥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처럼 국가적 역동성을 목격하는 가운데, 나는 변함없는 루틴 속에서 나의 존재감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B사로 이직한 2008년, 얼마 되지 않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리먼 사태가 발생하며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대폭 인하하고 유동성을 공급하며 위기 대응에 나섰다. 나에게도 위기의 순간이었다. 같은 파트에서 함께 일하는 사수가 입사 한 달 만에 학교를 가야 한다며 일찍 퇴근하겠다고 한 것이다. 솔직히 함께 일할 사수가 학교에 가는 상황이었다면, 입사 전 미리 공지하여 입사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선택권을 줬어야 하는게 아닌지, 정말 어이가 없었다. 이런 상황이라 리먼 사태의 뒤처리를 오롯이 혼자 야근하면서 처리해나갔다. 이 시기는 내가 얼마나 이 조직에 '필수적인 인력'으로 여겨지는지 체감했지만, 동시에 그 책임감 속에서 얼마나 혼자 고군분투해야 하는지도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2010년부터 2014년까지는 디지털·핀테크 확산, 금융융합 활성화, 자본시장법 확장 시행 등 제도가 정비되면서 금융 산업 전반의 융합이 가속화되던 시기였다. 빠르게 변화하는 외부 환경 속에서 나의 정체에 대한 위기감은 더욱 커져갔다. 2010년, 업무적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새로운 활력을 찾기 위해 B사 입사 3년 만에 대학원을 가기로 결정했다. 대학원에 가기 위해 5시에 퇴근하기 시작하자 회사 내부에 작은 이슈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부사수들의 잦은 실수와 회의에 참석할 사람이 없다는 문제였다. 어느 날, 인사팀장님의 전화를 받았다. "J, 일을 네가 다 했더구나!" 사실은 평소에 마감이 늦어지지 않도록 사수, 부사수 업무를 크로스 체크하면서 미진한 부분이 있으면 메신저로 알려주었던 것이다. 내가 대학원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누가 일하는지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사건 사고가 발생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내가 '애착인형'처럼 모든 일을 떠맡고 있을 때만 나의 존재가치와 능력이 드러난다는 씁쓸한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2013년에는 그룹 차원에서 식스시그마를 활용한 혁신대회를 추진했다. 나는 누가 추천했는지 알지 못한 채 이 프로젝트의 중간 책임자로 참여하게 되었다. 재미는 있었지만, 힘든 과정은 또 찾아왔다. 중간 발표 때 챔피언과 리더 모두 업무상 부재로 증권사 대표님과 전부 남자 팀장·임원분들로 구성된 자리에서 여자 과장인 내가 발표하게 된 것이다. 발표 이후 대표님의 칭찬이 돌아왔다. "J과장처럼 발표하라"고 하셨는데, 어떤 면을 좋게 봐주셨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너무 긴장한 상태였기에 "타 부서의 잘잘못을 따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더 나아가고자 함이니 오해 없이 들어주셨으면 합니다"라는 멘트를 덧붙였던 것만 기억에 남는다. IB 전무님은 나를 보며 '여직원들의 워너비'라고 말씀하셨다. 이를 계기로 윗분들에게 인정받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지만, 여전히 '혁신'이라는 이름 아래 주어진 역할에 갇힌 채 나의 커리어 방향을 주도적으로 설정할 수는 없었다.


2019년 연말, 전 세계가 패닉에 빠졌다. 2021년까지 이어진 코로나19 팬데믹은 산업 전반의 근무 방식 체계를 바꿔야 했다. 재택근무나 분리근무 등 필수 인력들을 보호하면서 업무에 지장이 없는 방식을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들을 기울였다. 이러한 변화의 시기에도 나는 여전히 익숙한 자리에 있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나는 멈춰 있는 듯한 위화감은 더욱 커져갔다.

그때부터였다. '이직'이라는 단어가 삐죽이 마음속에 고개를 내민 건. 처음에는 단순한 상상이었다. '만약 내가 다른 곳에 있다면 어떨까?' 하지만 그 상상은 곧 절박한 욕구로 바뀌었다. 주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누구나 바라는 안정적인 직장을 왜 떠나려고 해?",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좋은 직업인데, 너무 배부른 소리 아니야?" 그들의 진심 어린 걱정은 때로 나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그들은 내가 무엇을 갈망하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단순히 돈을 더 벌고 싶거나, 더 높은 직급을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20년을 본사 스태프로 살아왔고 더 이상 높은 직급은 생각지도 않았기에, 마지막으로 본사 영업 쪽 다른 직군에서 나의 역량을 시험해보고 싶은 갈증이 컸다. 또한, 연금, STO(증권형 토큰), 탄소배출권 같은 새로운 직무기술을 배우며 다시 살아 있다는 감각을 되찾고 싶었다. 그것은 계획적인 도전이라기보다는, 그저 '내가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고 싶었던, 마치 질식할 것 같은 상황에서의 몸부림이었다. 매일매일 숨 쉬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활력도 없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그 지식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경험, 그것이 나를 다시 뛰게 할 심장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아이러니하게도, B사가 안정화되고 더 이상 새로운 비즈니스를 구축하지 않게 되자 회의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늘 쫓기듯이 살다가 시간적 여유가 생기자 편한 것이 아니라 월급을 받으면서 이렇게 편해도 되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내가 '잉여인간'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 안정적인 삶은 오히려 나를 더 깊은 불안으로 몰아넣었다. 더 이상 이런 안정기에 묶여 있다면, 나는 세상의 흐름에서 영영 도태될 것만 같았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새로운 기술과 지식에 대한 문맹이 될 것 같은 공포. 그 불안감은 나를 잠식했고, 결국 나를 자꾸 더 높은 곳으로, 더 새로운 곳으로 이끌었다. 지금 이대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강력한 경고음이 내 안에서 울려 퍼졌다.


평소 연금 컨설팅에 관심이 많았고, 한때는 본사 스태프가 아닌 본사 영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나는 내가 가진 회계 및 시스템 지식과 20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연금 상품의 구조를 깊이 이해하고 고객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확신했다. 새로운 기회가 온다면 내게 딱 맞는 전환점이 될 거라 믿었다. 그렇게 되면 나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해 더 큰 성취를 이룰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래서 용기를 내 직무 순환을 요청했다. B사 과장 시절, 인사팀장과 본부장을 찾아가 나의 희망과 포부를 여러 차례 전달했다. 처음에는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작은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다시 찾아가면 '지금 맡은 업무가 중요해서 대체 인력을 찾기가 어렵다', '당신이 이 업무를 가장 잘하니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식의 답변이 반복될 뿐이었다. 그들의 말속에는 나에 대한 인정과 동시에, 나를 특정 역할에 묶어두려는 의도가 읽혔다.


한 번은 '가고 싶은 팀을 자유롭게 적어내라'는 지시가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IB 본부'를 지원했다. 그곳이야말로 역동적인 금융 시장의 최전선이었고, 나의 분석 능력과 추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다. 며칠 후, 본부장과의 면담에서 돌아온 답은 실망스러웠다.

"J차장, 욕심도 많다! 다른 직원들은 모두 현 업무 유지, 만족이라고 적었는데, J차장은 뭘 더 하고 싶은 건가?"

본부장의 얼굴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IB 쪽만 안 해봐서 꼭 한번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저의 강점이 그곳에서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의 열정적인 답변은 그에게 닿지 않는 듯했다. 그의 시선은 이미 다음 서류로 향해 있었고, 나의 직무 순환 요청은 또다시 차갑게 거절당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이 조직 안에서 '교체 불가능한 부품'으로만 인식되고 있다는 씁쓸한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그 관계 속에서 마치 ‘애착인형’처럼 누군가의 손에 쥐어 있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안정적인 직함과 역할을 부여받았지만, 실질적인 권한과 미래를 결정할 자율성은 박탈당한 채, 조직과 리더의 기대 속에 얽매여 있었다. 나는 그 관계를 '나의 일'이라고 믿었지만, 실은 의존과 통제의 구조에 갇힌 나 자신이었다. 새로운 업무를 주도적으로 맡아 추진하면서도 정당한 직무순환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나는 의존형 리더십 구조의 '피해자'가 되어가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내가 가진 능력을 다른 방향으로 펼치고 싶어도, 그들은 나를 기존의 틀 안에 가두려 했다. 그럴 때마다 나의 자존감은 조금씩 깎여나갔다.

다른 동기들이나 후배들은 6개월, 1년마다 부서 이동을 경험하며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고, 경력을 확장하며, 눈에 띄게 성장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늘 활기와 도전의 설렘이 가득했다. 간혹 부서가 너무 자주 변동되어 싫다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저 부러웠다. 그들의 이야기는 내게 더 큰 갈증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나는 한 팀에서 최소 4~5년 이상 머물러야만 겨우 직무 변경을 논할 수 있었고, 그마저도 대부분 좌절되거나, 아니면 결국 직장을 완전히 떠나야만 가능했던 불균형의 연속이었다. 이 반복되는 좌절은 나를 더욱 지치게 했다.

특히, 과장 시절에 인사팀장에게 직무 변경 면담을 재차 요청했을 때의 기억은 선명하다. 그는 내게 "위를 빼줄까, 아니면 아래를 빼줄까?"라고 물어보셨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되물었다. "제가 뭐라고 다른 사람의 거취를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희망하는 저를 빼주세요!" 그러자 그는 "그건 어려워."라고 잘라 말했다. 며칠 뒤, 회의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인사 발령이 나 있었다. 내가 파트장이 될 수 있도록 차장이 빠진 것이었다. 현 직무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회사에 배려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서러움에 나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나는 점점 부서에서 빠질 수 없는,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어갔지만, 그만큼 나의 선택권은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침내 그런 기회가 찾아왔다. ETF 운용 시스템 셋업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이후에, 타사에서 이직 제안을 받은 것이다. 처음 이 제안을 받은 것은 4월이었다. 그때는 내가 원하는 포지션이 아니었고, 기존 업무와 다르지 않은 결제, 자금 뿐만 아니라 회계 파트까지 맡아달라는 것이었기에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 직무 변경이라는 핵심적인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오랜 시간 정들었던 B회사를 떠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여전히 변화를 갈망했지만, 막연한 변화가 아닌, 의미 있는 변화를 원했다.

그러나 7월, 다시 연락이 왔다. 이번에는 조건부이긴 했지만, 분명히 '포지션 변경'이 가능한 IRP 컨설팅 직무로 제안을 받은 것이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오랫동안 바라던 기회였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니 두려움과 설렘이 뒤섞였다. 이직은 언제나 쉽지 않으니까. 특히 나처럼 한 회사에서 오래 일한 사람에게는 더욱 그랬다. 익숙함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은 안정감을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그동안 직무 순환을 꿈꾸면서도 나이, 직급, 성별 등 여러 가지 보이지 않는 장애물에 부딪혀 왔다. 담당 본부장님이 "J부장 넌 나이도 있고, 직급(연봉)도 높아서 갈 곳 없어, 그냥 여기서 열심히 해!"라는 말씀에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나를 인정해주시는 분이 그렇게 이야기하시니 더욱더 마음이 아팠다. 특히, 내가 여자인 것도 그렇고, 마흔이 넘은 나이와 쌓아온 경험 때문에 직무 변경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현실은 늘 나를 짓눌렀다. 굳이 나이 많은 사람을 새롭게 가르쳐야 할 필요 없이, 젊고 유연한 인력을 선호하는 경향이 분명 존재했다.


차장 시절, 이직을 제안했던 헤드헌터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J차장님, 이 자리(동일한 직무)를 거절하시면 나이가 있으셔서 이런 좋은 제안 받기가 쉽지 않아요.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거기다 다른 직무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의 냉정하지만 현실적인 조언은 나의 갈등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이게 정말 내가 가야 할 길인가? 아니면 단순히 기회를 놓치기 싫어서 잡아야 하는 끈인가?'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어느 날, B사 본사 영업부서에서 영업 전환을 조건으로 '직급을 한 단계 내리고, 내가 가르쳤던 남자 차장 밑에서 일해 볼 생각은 없냐'는 제안까지 받았다. 보통은 본사 스태프에서 영업으로 전환하면 직급을 하나 올려주는 것이 관례였다. 같은 기간 동안 일하며 내가 직접 가르쳤던 남자 후배가 직무 변경을 통해 더 빠르게 승진하고 새로운 기회를 얻는 것을 보며 씁쓸함을 느꼈던 터였다. 남자들은 경력 없이도 직무 변경이 비교적 쉽게 이루어지는데, 왜 나는 이토록 어렵고, 심지어 직급까지 내려야 하는 불합리한 제안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내 안에서 끊임없이 메아리쳤다. 불공평하다는 생각은 나를 잠식했지만,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회를 잡아야 하는가?'라는 현실적인 고민이 나를 짓눌렀다.


하지만 결국, IRP 컨설팅 직무를 제안받고 나서, 나는 홀로 고민하는 대신 외부의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타사의 여자 이사님과 몇몇 친한 지인들에게 나의 상황과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들의 의견은 놀랍게도 5:5로 팽팽하게 나뉘었다. 어떤 이는 "안정을 버리지 마라, 지금이 최고다"라고 했고, 어떤 이는 "도전하지 않으면 후회한다,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고 조언했다. 결국 어떤 선택을 하든 모든 책임은 내 몫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며칠 밤낮을 고심했다. 수많은 시나리오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고, 나의 미래를 여러 각도에서 조명해보았다. 잠 못 드는 밤이 이어졌고, 불안감에 가슴이 답답했다. 그러나 그 모든 고민 끝에 나는 한 가지 확신에 도달했다.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은 욕심, 정체되어 있던 나를 깨고 나가고 싶은 강렬한 열망이 두려움보다 훨씬 컸다는 것이다.

물론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내가 이직을 결정했다고 하자, 어떤 동료는 "이제야 일이 좀 편해지고 안정화됐는데, 왜 그런 도박을 하냐?"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랜 선배는 안타까운 듯 "넌 항상 힘든 자리만 찾아서 다니는구나!"라고 말했다. 그들의 말속에는 나를 아끼는 마음도 있었지만, 동시에 나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는 답답함도 섞여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자산운용사 대표님과의 대화였다. 그는 나의 이직 소식을 듣고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J부장, 왜 나랑 의논하지 않았냐?"며 나를 책망하셨다. 그리고 B사 대표님은 스테이크하우스에서 점심을 사 주시며 "J부장, 스테이크 사주는 대표 흔치 않다. 잘 생각해서 결정해."라고 말씀하셨다. 대표님은 굳이 핸드폰을 꺼내 러시아 동영상을 찾아 보여주셨다. 낭떠러지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그네를 타는 사람들의 모습. 대표님은 그 영상을 가리키며 나의 도전을 "무모한 도전이라며 낭떠러지 위에서 그네를 타는 격"이라고 표현하셨다.

그 말들을 듣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낭떠러지 위의 그네.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나는 대표님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단호하지만 정중하게 대답했다. "대표님,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고 싶은 것을 따라가기로 했습니다." 나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겠다는 굳은 의지였다.


그렇게 2021년 여름, 45살의 나이에 나는 첫 번째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바로 익숙함이라는 안정적인 틀을 깨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이직이었다.

뒤돌아보면 그 결정은 단순한 직장 변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옭아매던 보이지 않는 굴레, 즉 '애착인형'처럼 의존했던 관계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첫 발걸음이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누군가의 손에 쥐어 흔들리는 인형이 아니었다.

내 삶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한 긴 여정의 서막이 막 올랐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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