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유종의 미: 마지막 선택, 그리고 남은 시간

마지막 선택, 그리고 남은 시간

by 다빈사랑

퇴사를 결심한 순간, 내 안에는 예상치 못한 평온이 찾아왔다. 지난 5개월간 나를 짓눌렀던 무게가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또 다른 무게가 어깨를 눌렀다. 그것은 '책임'이라는 이름의 무게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 나의 현 포지션이 믿기지 않았지만, 퇴사를 결심한 이상 뒤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지난 6개월간 겪었던 수많은 좌절과 '번아웃'이라는 생소한 감정은 나를 지치게 했지만, 그럼에도 남은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무엇보다 나를 믿고 아껴준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진행 중이던 일들의 인수인계를 제대로 마무리해 주고 나오자는 생각이 강했다. 나는 항상 뒷말을 듣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누가 뭐라고 하기 전에 알아서 처리하는 편이었고, 내 손을 떠난 일에는 책임감을 가지고 완벽함을 추구해왔다.

비록 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떠나는 아쉬움이 컸지만, 적어도 인수인계만큼은 완벽하게 해 주고 떠나고 싶었다.

그것이 나 자신에 대한 마지막 예의이자, 지난 시간에 대한 유종의 미라고 생각했다.

회사 복도를 걸을 때마다, 동료들의 시선이 예전과 달랐다. 어떤 이는 연민의 눈빛으로, 어떤 이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내가 선택한 길이었고, 이제는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때였다.


깊은 밤, 홀로 남은 사무실에서

퇴사일이 정해진 후, 나의 사무실 책상은 작은 전쟁터이자 동시에 성역이 되었다. 모든 이가 퇴근한 후의 고요한 사무실에서, 나는 홀로 남아 지난 6개월의 기록들과 대면했다. 형광등 불빛만이 내 어깨를 비추는 가운데, 나는 모든 회의 자료, 보고서, 프로젝트 계획서, 그리고 개발 과정에서 오가던 수많은 이메일과 기록들을 샅샅이 뒤졌다.

엉켜 있었던 파편들을 다시 퍼즐처럼 맞춰 나가는 과정이었다. 밤늦게까지 홀로 남아 자료를 분류하고, 각 문서에 주석을 달고, 중요도를 표시하며 바인더에 정리했다. 손끝이 얼얼하고 눈은 뻑뻑했지만, 이 작업은 단순히 업무를 넘기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난 5개월간의 고통과 노력을 되짚어 보고, 내가 무엇을 해왔고 무엇을 이루려 했는지 명확히 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그날의 고민과 좌절, 그리고 아주 짧았던 희망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떤 문서에서는 내가 수십 번씩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다. 오타와 수정 자국들이 그때의 절박함을 말해 주고 있었다. 또 어떤 문서에서는 외주팀과 함께 머리를 맞댔던 순간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들과 나눴던 진솔한 대화들, 서로를 격려했던 말들이 종이 위의 문자로 남아있었다.

가끔은 작업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봤다. 여의도의 야경이 12월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여전히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 불빛들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삶이고, 누군가의 꿈이며, 누군가의 좌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그 수많은 불빛 중 하나였고, 곧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서 새로운 불빛을 만들어야 했다.


두 개의 파이프 바인더: 파란 꿈과 빨간 현실

나는 프로젝트 관련 자료들을 두 개의 파이프 바인더에 정성스레 정리했다. 마치 나의 지난 시간을 색깔로 구분하듯, 파란색과 빨간색 바인더에 각각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이 두 색깔은 내가 이곳에서 경험한 모든 것을 상징하는 듯했다.


파란색 파이프 바인더: '꿈과 비전, 그리고 좌절의 기록'

이 바인더에는 프로젝트의 전체 그림과 진행 과정을 담았다. 처음 이직 제안을 받았을 때의 설렘, 새로운 비즈니스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그 비전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내가 쏟아부었던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프로젝트 사내 주간회의 자료는 매주 월요일마다 작성했던 나의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기록들이었다. 답답함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으려 했던 나의 노력이 한 줄 한 줄 배어있었다. 회의록을 다시 읽을 때마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앞에서 답답해했던 나의 모습,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으려 애썼던 나의 열정이 떠올랐다. 때로는 불필요하게 길어지는 회의 시간 속에서, 나는 이 프로젝트가 과연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의구심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들이 이 바인더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어떤 회의록에는 내가 격양된 목소리로 의견을 개진했던 흔적이, 어떤 회의록에는 체념에 가까운 침묵으로 일관했던 순간들이 담겨있었다.


프로젝트 RFP(제안요청서)를 다시 펼쳐보니, 처음 C사에 합류했을 때 그들이 꿈꿨던 이상적인 시스템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거창한 비전들이 그럴듯한 문구로 포장되어 있었고, 그 당시 C사는 그 모든 것이 실현 가능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 꿈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기술적인 한계, 인력 부족, 그리고 무엇보다 조직 내부의 의사결정 부재가 그 꿈을 얼마나 갉아먹었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문서 곳곳에는 내가 열정적으로 작성한 메모들이 빼곡했다. "이 부분은 반드시 점검 필요", "고객 관점에서 재검토", "타사 사례 벤치마킹 필수" 같은 메모들이 나의 전문성과 책임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옆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 "예산 부족", "인력 부족"이라는 현실적 제약들도 함께 적혀있었다.


프로젝트 구축 원장 개발 진척률 및 회의 자료는 시스템이 조금씩 형태를 갖춰가는 과정, 그리고 수많은 난관에 부딪혔던 흔적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개발 진척률 보고서를 볼 때마다, 외주 팀과의 열띤 회의, 그리고 작은 진전에도 환호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동시에 예상치 못한 오류와 지연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좌절을 겪었는지도 다시금 상기되었다. "또 다른 버그 발견. 근본적 구조 재검토 필요. 팀 분위기 침체.", "외주팀 이탈 의사 표명. 프로젝트 지속 가능성 의문." 같은 기록들이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던 나의 심경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 파란색 바인더는 내가 이 프로젝트에 바쳤던 열정과 노력을 상징하는 동시에, 그 노력이 온전히 결실을 맺지 못했다는 씁쓸함을 담고 있는 듯했다. 파란색은 꿈의 색깔이었지만, 동시에 우울의 색깔이기도 했다.


빨간색 파이프 바인더: '현실과 책임, 그리고 마지막 배려'

이 바인더에는 실무적인 디테일과 당면 과제, 그리고 인수인계자가 바로 업무에 투입될 수 있도록 돕는 실질적인 정보들을 담았다. 빨간색은 마치 비상 상황을 대비한 매뉴얼처럼, 남아있는 이들이 내가 겪었던 혼란을 최소화하고 효율적으로 업무를 이어갈 수 있기를 바라는 나의 마지막 배려였다.


프로젝트 점검사항 및 체크리스트 보고 자료는 현재 프로젝트의 문제점과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목록이었다. 이 체크리스트는 내가 매일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던 흔적들이었다. 하나하나 해결될 때마다 작은 성취감을 느꼈지만, 동시에 끝없이 늘어나는 문제들 앞에서 좌절했던 기억도 선명했다.

체크리스트를 작성하면서 나는 최대한 객관적이고 실용적으로 접근하려 노력했다. "긴급도 1순위: 한국거래소 정회원 가입 승인 지연 문제 해결", "긴급도 2순위: 유관기관 고유코드 값 일원화 작업 완료", "긴급도 3순위: MTS 화면 수 최적화(현재 5,000개 → 목표 800개)" 같은 식으로 우선순위를 명확히 했다.

각 항목마다 상세한 해결 방안과 예상 소요 시간, 그리고 내가 시도했다가 실패한 방법들까지 솔직하게 기록했다. "이 방법은 3주간 시도했으나 XX 부서의 반대로 무산", "이 해결책은 예산 제약으로 보류", "이 부분은 외주팀의 전문성이 필수적임" 같은 메모들이 후임자에게는 귀중한 정보가 될 것이었다.


계좌 관리 체계 요구사항 정의서는 시스템의 핵심 골격이자, 내가 가장 공들였던 부분이었다. 복잡한 금융 상품의 특성을 이해하고, 이를 시스템에 반영하기 위해 수많은 밤을 새웠다. 이 문서는 나의 전문성과 노력이 가장 집약된 결과물이었다.

문서를 작성하면서 나는 20년간 쌓아온 금융업계 경험을 총동원했다. ETF의 특성, 투자자 유형별 계좌 관리 방식, 리스크 관리 체계 등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정리했다. 특히 다양한 예외 상황들을 고려한 것이 이 문서의 핵심이었다. "만약 투자자가 거래 중 시스템 오류를 겪는다면?", "만약 정산 과정에서 데이터 불일치가 발생한다면?" 같은 가정들을 바탕으로 촘촘한 안전망을 구축하려 노력했다.


프로젝트 구축 진행 현황은 미진한 부분과 완료된 부분을 명확히 구분하여 보여주는 자료였다. 이 문서를 통해 인수인계자는 현재 프로젝트의 상태를 한눈에 파악하고, 어떤 부분에 집중해야 할지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진행률을 표시할 때 나는 최대한 정확하고 현실적으로 평가하려 노력했다. 과대포장도, 과소평가도 하지 않았다.


프로젝트 원장 시스템 구축 요건 정의서는 복잡한 시스템의 기반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 문서였다. 금융 시스템의 특성상 원장 시스템은 모든 거래의 근간이 되므로, 이 문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원장 시스템은 마치 건물의 기초와 같다. 보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떠받치는 핵심이었다. 나는 이 시스템의 안정성과 확장성을 위해 다양한 시나리오를 검토했다. 대량 거래 발생 시의 처리 능력, 시스템 장애 시의 복구 방안, 데이터 백업 및 보안 체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


프로젝트 개발 관련 자료(약관, 일월적립식, 화면 권한 코드 부여 등)는 실제 개발에 필요한 세부 지침과 예외 처리 사항들을 담았다. 이 자료들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논의 끝에 만들어진 결과물로, 인수인계자가 개발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어려움을 줄여줄 것이라 믿었다.

특히 화면 권한 코드 부여 체계는 나름의 철학이 담긴 작업이었다. 사용자 경험을 최대한 단순하게 만들면서도 보안은 철저히 지키는 것이 목표였다. 각 부서별로 접근 가능한 기능과 정보를 세밀하게 조정했다.


업무 매뉴얼 작성 및 타사 자료 별첨은 인수인계자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도록, 나의 경험과 다른 회사의 사례를 참고하여 만든 지침서였다. 나는 내가 겪었던 어려움을 후임자는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최대한 쉽고 명확하게 매뉴얼을 작성했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주의사항 등도 빼놓지 않았다. "타 부서와 협의 시 반드시 서면으로 확인받을 것", "협력기관 시스템과 연동 시 이 부분 주의", "업체와의 계약 시 이 조항 필수 포함" 같은 실무적 노하우들을 아낌없이 공유했다.


예상치 못한 사과: 술기운에 녹아나온 진심

어느 날 밤, 모두 퇴근한 후 홀로 인수인계 자료를 만들고 있는데, 프로젝트 관련 팀장 한 분이 저녁 술자리에서 돌아와 사무실에 있는 나를 보고 다가와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술기운이 역력했고, 평소의 무뚝뚝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왜 아직도 퇴근 안 하세요?"

나는 잠시 작업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봤다. 컴퓨터 화면의 푸른 빛이 그의 얼굴을 어색하게 비추고 있었다. "인수인계 작성하느라 아직 퇴근하지 못했습니다." 내 말에 그는 책상에 걸터앉으며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그동안… 배척해서 미안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정지한 듯했다. '결국 그랬던 거구나!' 내 의견에 번번이 태클을 걸고, 지난 5개월간 프로젝트를 하면서 겪었던 미묘한 소외감과 반대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가 제안했던 시스템 개선 방안들이 번번이 기각되고, 회의에서 내 발언이 묵살되었던 순간들, 그리고 때로는 노골적인 무시를 당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그 모든 것이 단순한 업무 판단이 아니라, 나에 대한 '배척'이었음을 퇴사를 앞둔 이 순간에야 확인하게 된 것이다.

내가 이들에게 그만큼 신뢰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에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상처받은 마음이 고개를 들었지만, 동시에 오랜 시간 짓눌려 있던 답답함이 일순간 해소되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밀려왔다. 적어도 내가 착각해서 그런 감정을 느꼈던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아마도 술기운에 용기를 얻어 진심을 말했을 것이다. 평소 같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을, 퇴사를 앞둔 나에게만은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사과가 비록 늦었지만, 어쩌면 나에 대한 인정이자,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는 최선을 다한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그 냄새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완벽한 직장인의 가면을 벗고, 한 명의 인간으로서 진심을 토로하는 그의 모습이 나에게는 더 진실하게 다가왔다.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애써 감춘 채 미소 지으며 말했다.

"프로젝트 성공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그 말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하던 일을 계속 이어갔다. 그의 사과가 나의 상처를 완전히 치유해 주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내가 떠나는 길에 앙금을 남기지 않을 수 있다는 작은 위안이 되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이 적막한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그는 몇 분 더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 조용히 자리를 떴다. "수고하세요"라는 작은 인사를 남기고.


마지막 밤의 성찰

인수인계를 마무리하던 마지막 밤, 나는 잠시 작업을 멈추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사무실의 모든 PC는 꺼지고, 내 책상 위에 놓인 PC만이 나를 비추고 있었다. 마치 무대 위의 마지막 스포트라이트처럼, 나와 내가 만든 두 개의 바인더만이 그 빛 안에 있었다.

지난 6개월을 되돌아보니, 그 시간이 허망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 좌절도 많았고, 번아웃도 경험했고, 때로는 나 자신을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새로운 것들을 배웠고, 나의 한계를 시험해봤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되었다.


외주팀과의 인연은 예상치 못한 선물이었다.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나는 진정한 팀워크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만들어지는 시너지의 아름다움을 경험했다.

2대 주주와의 인터뷰도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비록 끝까지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보여준 진심과 열정은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특히 젊은 COO의 마지막 부탁 - "다시 한 번 더 고민해 주세요!" - 은 아직도 내 가슴에 울림으로 남아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이곳에서 '번아웃'이라는 감정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그것은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나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주었다.

일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때로는 멈춤도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을 돌보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다.


남은 이들을 위한 진심어린 기원

이 두 개의 바인더는 나의 지난 6개월을 압축해 놓은 듯했다. 손끝이 얼얼하고 눈은 뻑뻑했지만, 이 모든 자료를 정리하는 동안 나는 묘한 평온함을 느꼈다. 비록 프로젝트를 끝까지 책임지지 못하고 떠나지만, 나의 흔적과 노력만큼은 온전히 남겨두고 싶었다. 그것이 나를 믿어준 이들에 대한 마지막 책임이자, '애착인형'처럼 소모되었던 나 자신에 대한 마지막 존중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남은 이들이 잘 해낼 수 있기를 바라며 멀리서 응원하기로 했다. 이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회사가 양수합병의 파고를 넘어 승승장구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곳을 선택했던 지난 시간, 그리고 겪었던 모든 고통과 번아웃, 이 모든 것이 허망하게 느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바인더 정리를 마친 후, 나는 각 문서의 첫 페이지에 작은 메모를 남겼다.

"이 자료는 프로젝트 동료인 수석님이 담당하시는 것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타 팀과 사전 협의 필수", "이 부분은 최우선으로 처리 바랍니다" 같은 구체적인 지침들이었다.

특히 외주 팀과 함께 작업했던 부분들에는 더욱 상세한 설명을 달았다. 그들이 어떤 고민을 했고, 어떤 해결책을 제시했는지, 그리고 왜 그 방법이 최선이었는지를 자세히 기록했다.

비록 그들은 떠났지만, 그들의 전문성과 노하우만큼은 이 프로젝트에 남아있기를 바랐다.


조용한 작별: 마지막 인사들

퇴사 며칠 전부터 동료들이 하나둘씩 나를 찾아왔다. 어떤 이는 아쉬움을 표현했고, 어떤 이는 새로운 시작을 응원해 주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평소 말이 없던 한 후배의 말이었다.

“J부장님, 처음에는 왜 그렇게 꼼꼼하게 하시나 했는데, 지금 보니 그게 다 저희를 위한 거였네요. 정말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가 완벽주의적으로 보였던 모든 행동들이, 결국은 조직과 동료들을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는 것을 누군가는 이해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1대 주주에서 파견 나온 수석님도 마지막 날 나를 찾아왔다. "J부장님,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인연 이어가요." 그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비록 조직의 한계로 인해 함께할 수는 없었지만, 서로에 대한 존중과 인정은 남아있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2대 주주 측과의 작별이었다. 그들이 나에게 보여준 신뢰와 기대, 그리고 마지막까지 나를 붙잡으려 했던 진심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졌다. 특히 젊은 COO가 보여준 아쉬움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설날을 며칠 앞둔 1월 말, 그에게서 마지막 메시지가 왔다.

“안녕하세요, J부장님. 마지막 마무리까지도 완벽하시네요! 정말 아쉬운 마음으로 떠나 보내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자료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항상 건강하시기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COO 드림”

그 메시지를 읽으며 나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정말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일까?' 하지만 이미 내린 결정이었고, 이제는 앞만 보고 나아가야 할 때였다.


마지막 날: 빈 책상과 새로운 시작

2022년 1월 28일, 마지막 출근길은 유독 길게 느껴졌다. 지하철에서 내려 회사 건물을 올려다보니, 6개월 전 처음 이곳을 찾았던 날의 설렘이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새로운 도전에 대한 기대로 가득했었다. 그 기대가 좌절로 바뀌고, 다시 깨달음으로 승화되기까지의 과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사무실에 들어서니 동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어떤 이는 미안한 듯한 눈빛으로, 어떤 이는 부러운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담담하게 인사를 나누며 내 자리로 향했다.

책상 위의 두 개의 파이프 바인더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란색과 빨간색. 꿈과 현실. 이상과 실무. 내가 이곳에서 경험한 모든 것이 그 안에 담겨있었다.

인수인계를 받을 후임자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는 인사팀에 상세한 메모와 함께 바인더를 전달했다. "이 분야의 경험이 있으신 분이 담당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협력기관 담당자 연락망도 함께 넘겨드립니다", "이 부분은 반드시 수석님과 사전 협의 후 진행하시기 바랍니다" 같은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첨부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몇몇 동료들이 작별 식사를 제안했다. 평소 같으면 정중히 거절했을 테지만,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함께했다. 식사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대부분 회사에 대한 것이었다. 앞으로의 변화에 대한 불안, 프로젝트에 대한 우려, 그리고 나의 빈자리에 대한 걱정들이었다.

"그동안 혼자서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싶어요. 우리가 더 도와드렸어야 하는데..."

그들의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나는 그동안 혼자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나를 지켜보고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이 나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여의도를 떠나며: 새로운 여정의 시작

오후 5시 30분, 정식 퇴근 시간이 되자 나는 개인 짐을 정리했다. 6개월 동안 내가 사용했던 머그컵, 몇 권의 업무 관련 서적, 그리고 개인적인 메모들. 생각보다 많지 않은 짐이었다. 물건으로 측정되는 흔적은 적었지만, 내 마음속에 남은 것들은 무겁고도 깊었다.

동료들이 하나둘씩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악수를 나누고, 포옹을 나누고, 때로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서로의 마음을 전했다. 그 순간들 하나하나가 소중했다.

마지막으로 내 책상을 한 번 더 둘러봤다. 6개월 동안 내가 고민하고, 좌절하고, 때로는 희망을 품었던 그 자리. 이제는 비어있는 그 자리가 내게는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면서, 나는 창밖의 여의도 풍경을 바라봤다. 구정을 앞둔 1월 말 추위 속에서도 사람들은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저마다의 꿈과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 나 또한 그들 중 하나였고, 이제는 새로운 방향으로 걸어가야 할 시간이었다.

건물 밖으로 나서자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하지만 그 바람이 차갑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상쾌하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바람 같았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6개월 동안 억눌려있던 숨을 이제야 제대로 쉬는 기분이었다.


외주 팀이 철수한 후에도 여자 부장님과 교류가 있었고, 내가 떠나기 전에 그분은 쇼핑백 하나를 건네 주셨다. 선물과 손글씨로 쓴 카드가 들어 있었다.

“J부장님, 새로운 시작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요. 언제나 연락해 주세요!"

스마트폰에 외주팀 최이사님에게서 온 메시지가 보였다.

"J부장님. 어디서든 빛날 거예요. 우리의 인연을 잊지 말아요. - 최이사 올림"

그 짧은 문장을 읽으며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6개월간의 모든 어려움이 이 한 문장으로 인해 의미 있는 경험으로 승화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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