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소 Jan 28. 2023

나는 남자 친구가 있다고 거짓말해본 적이 있다

부끄럽지만 꼭 이야기해보고 싶었던 기억

<늑대소녀와 흑왕자>라는 일본 만화를 본 적이 있다. 남자 친구 자랑이 대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친구들을 둔 여고생이 친구들과의 대화에 끼기 위해 솔로면서도 남자 친구가 있다고 거짓말을 면서 문제가 시작된다.

친구들이 남자 친구 사진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자 난감해진 여자 주인공은 길에서 촬영한 잘생긴 남고생 사진을 남자 친구라며 보여주게 되는데, 우연히도 그 남고생이 같은 학교 학생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거짓말이 탄로 날 위기에 처한다.


만화의 웃픈 전개에 한참을 빠져들었는데, 사실 그건 만화 여주인공의 경험담이기도 했지만 나의 경험담이기도 했다.


내 인생에서 남자 친구가 있다고 거짓말한 일이 두 번 있었는데, 한 번은 중학교 2학년 때, 다른 한 번은 대학교 2학년 때였다. 남들이 중이병, 대이병이라고 부르는 시기에 정확히 맞추어 거짓말을 했는데, 사실 필자도 이 글을 쓰면서 처음 았다.


왜 남자 친구가 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했을까?


중학교 2학년 때에 친구가 많지 않고 말주변이 없는 내 모습을 가리고 싶어서. 대학교 2학년 때에는 전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솔로가 되자 '겉기보다는' 연애를 잘할 줄 아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거짓말을 했다.


두 번 다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걱정 때문에 한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일이기도 했다.


난 이성에게 어필할 만한 외모도 소유하고 있지 않았고, 그렇다고 성격이 둥글둥글 따뜻하거나 유머러스한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난 남자에게 매력 없는 여자야'라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연애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이런 외모와 성격에 남자 친구도 없다고 하면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모태솔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연애에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닌 내 모습을 있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이 이슈는 '자존감'과 관련되어 있다.


자존감은 자기효능감, 자기안정감, 자기조절감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여기에서 나의 여성적인 면 그리고 연애적 측면에서 자기효능감을 경험해보지 못했었다. 그리고 의외로 내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경험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만화 <늑대소녀와 흑왕자>로 돌아가면, 전반적으로 유치하고 코믹한 상황들이 계속 이어지며 남녀 주인공의 사이를 두텁고 진실되게 만들어가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스포 없이 말하자면, 결론적으로 여자 주인공이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첫 상대가 남자 주인공이었고 남자 주인공이 그 숨김없는 모습에 호감을 느끼면서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향한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편안하게 표현하지 못하면 아무리 잘난 모습을 꾸며봐도 부자연스럽고 과장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상대를 편안하게 만들고 자신에 대해 자연스럽게 표현한다.


진로가 불안하고 자아가 흔들리던 시기에 내가 한 거짓말은 남자친구를 과시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내 자존감을 지키려는 서툰 시도였다. 나는 남자친구의 사진을 가짜로 만들어내거나 다정한 모습을 과시해본 적도 없었고 오히려 남자친구가 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도 남자친구에 연연해하지 않고 내 할 일을 열심히 하는 내 모습을 주변 사람들이 좋게 봐주기를 기대했다.


너무 부끄러운 거짓말이라 무덤까지 가져가겠다 생각했던 일이지만, 그럼에도 잊지 못하고 글로 풀어서 나누는 것은 그것이 나라는 사람을 좀 더 잘 알아가는 데에 스스로 도움이 된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반복할수록 나를 공허하게 만든, 나를 외적인 것으로 포장하고 가린다고 해서 가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빠르게 깨닫게 해주었던 거짓말이었다. 이 거짓말은 내 자기효능감을 높여주지도, 풍성한 정서적 교류를 가져다 주지 않았으니까. 나를 가리고 포장하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는 귀중한 경험을 얻었다.


어릴 적 나와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거나 현재 그런 경험을 하고 있는 십대 이십대 분들이 계시다면 내 이야기에 공감하고 작은 추억삼아 부끄러운 기억을 꺼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부끄럽지만 귀중한, 작지만 치명적인 거짓말의 기억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었다.

사소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거짓말일지라도 나의 성장을 늦추고, 때로 해가 되는 거짓말이라면 빨리 멈추기를. 그리고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기를.


내가 찾은 답은 연애도 아니고, 나를 수식하는 화려한 수식어도 아니었다.


답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작가의 이전글 나도 모래놀이치료 받아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