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가 많다고 훌륭한 전문가는 아닙니다
불안 때문에 의존하게 하고, 나를 성장하지 못하게 하는 것에 대하여
심리검사에 의존하는 상담, 자격증 개수에 의존하는 상담경력 등, 이 업계에 무수히 많은 상담사들이 처음에 이러한 단계를 거쳐 정말 뛰어난 상담사가 된다. 임상경험이 부족하고 자신의 능력에 확신이 없을 때 많이 일어나는 일이다.
"상담사가 될 생각이면 임상심리는 거들떠도 보지 마세요."
모 상담 관련 카페 운영자가 오프라인 모임에서 내게 한 말이다. 당시 나는 상담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심하고, 인터넷이 떠돌아다니는 각종 상담 진학 관련 모임마다 찾아가 학부 비전공 자면서 상담대학원에 진학한 사람들 또는 앞으로 진학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스터디나 앞선 선배들의 후기를 들을 수 있는 소규모 모임에 참석하고 다녔었다.
임상심리와 상담심리가 어떻게 다른 지도 모르던 시절의 이야기다.
저 말의 의미는 심리검사의 결과에 의존하면 질적인 상담이 어려우므로 경계를 알고 구분하라는 뜻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상담사로 일하기 시작한 최근에도 나는 비슷한 실수를 저질렀다. 초기면접에서 짧은 시간 내에 내담자의 주호소 문제와 욕구, 성향들을 파악하기 위해 심리검사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불필요한 검사 몇 가지를 추가하여 접수상담을 진행했다.
물론 접수상담 비용은 고정이고, 검사도구를 추가로 사용하는 것은 상담사의 재량이지만 내담자의 불필요한 노동력과 시간을 뺏게 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다. 내가 불필요한 검사 몇 가지를 추가한 이유는 내가 느끼는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난 불과 이제 겨우 1~2년 정도 임상 경험을 쌓은 햇병아리 같은 상담사였고 검사도구의 힘을 빌어 질적면접이 아닌 해석상담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상담사가 초기에 내담자를 틀에 맞추어 두지 않고 열린 자세로 마주하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그런데 그 중요성을 간과하고 검사도구에 의존해 그 사람을 해석하려고 했던 것이다.
사실 검사를 추가하면서도 이 검사 없이도 내가 충분히 초기접수면접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추가했는데, 그 순간 원장님이 내가 가져가던 검사지를 턱 하고 붙잡고 물었다.
"선생님, 혹시 매번 새로운 내담자 올 때마다 다 이거 검사해요?"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지만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내가 스스로를 미숙하게 여겨서 검사도구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이 한순간 들켜버린 것 같았다. 난 석사 과정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다양한 검사도구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따로 임상심리사 수련과정에 등록해 공부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뭐라도 배워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불안해서 한 일이었다. 상담사가 돼서도 내가 느끼는 불안은 변함이 없었고 결국 질적인 면접보다 검사도구에 의존하는 불필요한 행동을 하고 말았다.
같이 졸업한 동기들에 비해 나는 여러 심리검사를 진행할 수 있고 해석도 잘 해낼 수 있지만, 그래서 다른 동기들보다 더 훌륭한 상담사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상담만 아니라 다른 일상적인 활동에 있어서도 통용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내 불안을 다스리기 위한 기제가 생겨나기 마련인데, 그것이 내 성장을 방해하는 일이 자주 있다. 불안을 다스리려는 행동이 역설적이게도 나를 성장하지 못하게 하고 더욱 불안을 심화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심리검사도구들이 그런 역할을 했다.
상담사가 명확한 치료적 직관을 획득하게 되기까지 필요한 임상시간이 일만 시간 정도라고들 한다.
어떤 일을 하든 만 시간 정도는 투자해야 전문가가 된다고 하지만, 상담을 만 시간가량 해야 믿을 수 있는 치료적 직관을 가질 수 있다고 하니 아직 내게는 아득한 느낌이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고, 당장이 불안하다고 해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에 의지하는 행동은 역기능적이고 나를 좀먹을 것이 자명했다.
훌륭한 전문가가 되기 위해 거북이 같더라도 꾸준히 기어가기로 다시 한 번 다짐한다.
2021.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