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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alish Nov 16. 2020

초콜릿이 녹을 땐 슬픔도 녹아내려 #3

세 번째 피스 #쌉쌀한맛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잖아."라는 발언으로 알려진 그녀.

민중의 삶에 무지한 채 사치와 향락을 일삼은 것으로 알려진 철없던 프랑스 왕비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에서 목격됐다. 경매회사 오즈나가 베르사유궁에서 연 경매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른발 신발이 4만 3750유로에 낙찰됐다는 소식 때문이다. 한화로 약 5800만 원 수준이란다. 구두 굽에는 사라진 주인을 잊지 않고 간직하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덕질을 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로망을 가지고 있다.

로망이 현실이 되는 영광스러운 순간을 마주하게 될 때 비로소 '성덕(성공한 덕후)'이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다. 초콜릿을 좋아하는 나는 이 지점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와 만나게 됐다.


유난히 밤 잠이 줄어들었던 중학생 시절의 여름.

캄캄한 밤이 내려앉고 고요한 적막만이 감도는 창 밖을 바라보며 초콜릿이 그리워졌었나 보다. 거실로 나와 컴퓨터를 켜고 전 세계의 초콜릿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부엌에 초콜릿이 없었던 게 확실하다. 


미국 초콜릿, 스위스 초콜릿, 벨기에 초콜릿........ 그리고, 프랑스 초콜릿.

친척댁이 있는 미국을 몇 번 오가며 맛본 자본주의의 달콤함 자체인 미국 스타일 초콜릿이 최고인 줄 알던 때.

한국에 다시 돌아올 때 캐리어 한 가득 초콜릿만 담아오기도 했으니 말이다. 유럽 스타일의 초콜릿은 미국 고모께 선물 받은 회색 철제 우유통 모양 케이스에 담겨 있던 스위스 초콜릿과 마트에서 만날 수 있는 토블론, 길리안 정도가 경험의 전부였다. 사소한 검색일 뿐이었던 그 날의 행동은 고급 수제 초콜릿의 세계로 나를 이끌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초콜릿'



클릭하지 않을 수 없는 매력적인 문구가 눈에 띄었다. 스크롤을 내리니 단지 비싸기만 한 초콜릿이 아니었다. 무려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한 초콜릿이라는 것. 쓰디쓴 약을 먹지 않는 왕비에게 약을 먹일 방법을 고민하다 탄생했다고 한다. 약이 싫어 고집부릴 때는 단 것을 쥐어줘야 한다는 건 동서고금을 불문한 진리인가 보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은 위대한 지휘자나 연주자의 공연을 현장에서 경험하기를 원하고, 종교인은 신념을 다지고 영적 축복을 얻기 위해 성지순례를 하고자 한다. 초콜릿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세상에서 가장 비싼 초콜릿을 맛보는 일이란 '성덕'의 조건에 넣기 부족함 없는 조건이 아닐까? 게다가 디저트의 나라, 절대왕정 속 화려함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콜릿이다. '최고가'라는 수식어에 환상과 비극의 겹으로 켜켜이 감싸져 있는 인물에 대한 스토리를 품고 있는 이 초콜릿은 한 여름밤의 꿈처럼 마법같이 마음 한 켠에 깊게 자리 잡았다.



나의 로망은 약 8년 후 이루어졌다. 

사악한 가격보다 국내에서 구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는 게 걸림돌이었다. 뉴욕에 매장이 있다는 소식을 입수하고 물 건너간 것을 다시 물 건너오게 해 첫 만남이 성사됐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이 그려진 가로가 긴 직 사각 케이스. 부르봉 왕가의 문양이 새겨진 로열블루색 리본 끈 장식. 카카오 향이 밀려오기도 전에 제대로 만났다는 쾌감을 먼저 안겨준다. 


혹여나 로망이 실망으로 추락하면 어찌하나.

걱정 반, 기대 반으로 한 입 취해본다.

카카오의 맛이 진하게 풍겨진다.

강하지 않은 단 맛에 쌉쌀함이 살아있는데 과하지 않다.

본연의 맛을 고급스럽게 승화시킨다는 게 이런 맛일까?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그동안 먹은 초콜릿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이런 약이라면 하루의 낙이 약 먹을 시간이 언제 오나 시계를 바라보는 일이 될 것만 같다.




언젠가 고급 디저트가 유행하고 있는 이유가 불경기이기 때문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디저트가 가장 저렴한 사치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 백, 수천 만원을 호가하는 명품가방이나 주얼리는 가질 수 없더라도 포크질 3번이면 사라질 작은 케이크에 몇 만 원, 몇 초면 녹아 사라질 초콜릿에 몇십만 원을 쓰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에서 누릴 수 있는, 누려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치라는 것.


다시 마리 앙투아네트가 떠오른다. 사실 그녀는 빵이 없으면 과자는 먹으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검소하지는 않았어도 유별난 수준은 아니었고, 국고가 바닥난 것 역시 미국 독립 전쟁 지원 같은 원인이 따로 있었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인다. 

커다란 변화에는 명분이 필요하다.


프랑스와 오랜 숙적이었던 오스트리아 출신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비난의 대상으로 몰고 가기 적당한 타겟이었을 것이란 평가가 현재는 주류를 이루고 있다. 사실이야 어떻든 이미 사치와 화려함의 대명사로 자리 잡은 왕비의 초콜릿. 세상에서 가장 비싼 가격의 초콜릿이라지만 가장 저렴한 사치인 디저트. 


탐나는 단단함 속에는 이 모든 사실들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복잡 미묘한 맛이 숨어있다.  



© JINA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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