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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솔 Aug 06. 2017

회색

2016년 3월 27일

나는 한 시간을 잃었다.

서머타임 때문에 1시 59분 후에 3시가 되었다. 모든 전자기기는 그에 맞게 시간을 달렸지만 내 가여운 아날로그 시계들은 아직 제자리다.


저녁 7시 반에도 하늘은 오후 2시 같다



나약한 상태가 지속된다.
파이팅 넘치게 의욕을 불태우다가도 한 순간에 거품꺼지듯 색채없는 쭈구리가 된다. 난 안될거야. 난 아직도 불어를 못해. 돌아가기 전까지도 입이 안트일거야. 고작 5개월 체류하는데 그럼 뭘 바란거야? 원어민처럼 블라블라 떠들 수 있을 줄 알았나?

이런 것들 보다도 난 이게 슬프다.
지난 2년동안 '프랑스만 가면 불어가 일취월장할거고 프랑스만 가면 내 플랜대로 인생은 흘러갈거야. 프랑스에서 다양한 경험하며 미래에 대한 고민과 생각도 하고 와야지.'하며 살아왔는데 현실은 그게 아니라는 거다. 마치 프랑스에 지니 요정이라도 숨겨놓은듯 여기만 오면 짠! 하고 불어가 잘해지고 짠! 하고 내 미래에 답을 내릴 수 있을듯이. 정말 바보같은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여기와도 똑같다. 내가 노력하고 내가 달라지지 않으면 바뀌는건 아무것도 없다. 그 괴리를 이겨내지 못해서 난 힘든거다.

자 그래. 지금이라도 미친듯이 불어만 파보자. 하다가도 아 어차피 보자르 가기로한 계획도 틀어져버린 마당에 이제와서 불어가 나에게 무슨 소용이지? 점점 흥미를 잃고 지쳐가기만 하는 마당에 내가 불어를 끝까지 안고가야할 이유가 있을까? 이 시간에 영어나 해야될거 같은데. 아니 그건 그렇다치고 난 나중에 뭐해먹고 살지?




답답한 마음에 한참을 우울해했다.
문득 내 요금제가 해외유선전화와 무료통화가 된다는 걸 떠올리고 집에 전화를 했다. 엄마가 받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페이스타임으로 넘어가서 이야기를 하는데 엄마한테 슬쩍 순화해서 내 고민을 털어놨다.

'야 너 생각해봐. 프랑스 가기 전에 엄마한테 다시는 한국 안들어올 수도 있다고 그랬지? 근데 지금 너 한국들어오는 비행기 끊었잖아. 그거처럼 니가 아무리 전에 고민하고 결정내려도 아무 소용없어. 사람 앞일은 아무도 모르는거야. 그냥 지금 그 순간을 재밌게 보내고 즐겨! 걱정한다고 달라질건 없어 고민은 하루에 한개만 해도 돼 넌 지금 너무 심오해. 앞 날 걱정은 한국와서 해'

맞는 말이다.
한국행 비행기가 놀랍기는 무슨 내가 불문과에 와서 불어를 배우고 프랑스까지 오리라고 난 상상도 해본 적 없다.




세상에 나만 진로 고민하는거 아니라는 거 아는데, 그게 딱히 위로가 되진 않는다. 답이 없는 난제이기때문에 우울의 고리가 쉽게 끊어지질 않는다.




난 늘 그 생각을 한다.
'나는 당장 내일이라도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름 오늘 하루에 충실한 삶을 살아왔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변색됐다.

난 어쨌든 지금 프랑스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불어를 열심히 하는 일이다.

장기간 우울해 해본 결과, 우울의 원인은 다 나에 대한 실망이다. 그럼 나에게 더 실망하지 않도록 할 일하고 움직이면 된다. 쳐지면 쳐질수록 우울은 더 깊어질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는 소소하게 기쁜 순간이 많다. 그것들을 위해 살아가는 것 같다



옛날엔 난 뭘하든 졸라 잘될거라고 생각했다. 뭘 시켜도 잘 할거고 어느 한 영역에는 누구보다도 잘 할 자신있었다. 노력만하면 최고의 자리에도 올라갈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길거리의 멋진 악사를 봐도, 프로듀스 101에서 예쁜 소녀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걸 봐도, 외국어로 아무 무리없이 말하는 사람들을 봐도

'와 멋있다!'
가 아니라

'저들은 저런 강점이 있는데 난 도대체 뭘 하는 사람일까? 난 도대체 뭘 잘하지? 사회에 티끌만큼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좀 심각한 상태인것 같다.





지금의 이런 방황도 나중에 꺼내봤을땐 아 그땐 그랬지. 하며 곱씹을 수 있기를





이보다 더 망가질 순 없다- 정도는 아니다 다행이도. 아무리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어도 나 아직 최소한의 힘과 희망을 놓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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