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이 빼앗아간 나의 고향
구로구 시흥동은 엄연한 서울이지만, 인지도는 '경기도 시흥시'에게 백전백패당하는 그런 동네였다. 과거형으로 썼지만 지금도 사정은 비슷해서 누군가에게 내가 살 던 동네를 말해야 할 상황이 생기면 '독산동 옆'이나 '신림동 옆'이라는 부연 설명이 반드시 필요하다. 난 그런 동네에서 태어나 스무 살이 되어 대학교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까지 구로구가 금천구로 바뀌는 동안에도 계속 그 동네에서 살았다. 그리고 부모님은 여전히 그곳에 사신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뀐 1996년, 내가 막 초등학교 6학년이 됐을 때였다. 시흥2동은 서울에 수많은 동네들이 처한 운명과 마찬가지로 '재개발'이라는 음흉한 놈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동네 아줌마들은 모이기만 하면 그놈을 주제로 신나게 수다를 떨었는데 '미경이네는 끝까지 버틴다더라'는 얘기가 나올 때만은 유독 목소리를 낮춰 속닥 거리곤 했다. 그즈음에 동이네(우리 집이다)는 옆집 정민이네처럼 '딱지'인지 뭔지를 받고 이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으로 제일 들떠있었던 건 동이네 막내딸, 바로 나였다. 이사 갈 집이 지금 집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신식 양옥집'이라는 걸 알게 된 이후로 매일 밤 가슴이 콩닥거렸다. 몇 밤만 더 자고 나면 '욕실'이라는 이름에 고급스러운 공간이 있으며, 연탄이 아닌 '가스보일러'로 난방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빨간 수도꼭지를 돌리면 마술처럼 '온수'가 쏟아져 나오는 집으로 이사를 간다니! 동네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자랑할까 생각하면 잠자리에 누워서도 실실 웃음이 났다.
"얘들아~ 이제 우리 집에 변기 있다아아~"
마냥 해맑은 나와 달리 엄마는 왠지 쓸쓸한 얼굴로 몇 날 며칠 이삿짐을 쌌다. 하루는 코너 집 미경언니네 아줌마가 고추장에 밥을 한가득 비벼 양재기째 들고 왔다.
"동이 엄마가 요즘 끼니 챙길 겨를이 없을 것 같아서..."
어수선한 짐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엄마, 나, 미경언니네 아줌마 이렇게 셋이 동그랗게 앉아 같이 밥을 퍼먹었다. 그러다 별안간 엄마와 아줌마가 부둥켜안고 울기 시작했다. 좀처럼 울지 않는 우리 엄마가 입에서 밥알이 미어져 나오는 줄도 모르고 서럽게 엉엉거렸다. 우리는 단지 시흥2동에서 시흥3동으로 이사 갈 뿐인데, 엄마랑 아줌마는 왜 저렇게까지 슬퍼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엄마가 울고 아줌마가 우니까 나도 따라서 훌쩍훌쩍 눈물이 났다.
드디어 대망의 이삿날. 용달차 한 대가 꽉 차다 못해 넘칠 만큼 많은 짐을 실어 보내고 장롱이 비켜난 자리 밑에서 먼지와 함께 뒹굴고 있는 동전 몇 개를 주으며 그 집을 떠났다.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그런 생각은 '신식 양옥집'에 도착하자마자 사라졌다. 그 집은 번듯하고 깨끗했으며 변기도 있고 샤워기라는 것도 있었다. 벽에서 찬바람이 숭숭 불지 않았고 연탄 냄새가 안 나는데도 방바닥이 뜨끈뜨끈했다. 야호! 문명의 이기 만세! 그렇게 이전 집과 동네는 내 마음에서 까맣게 멀어졌다.
떠나온 고향집이 잘 있는지 궁금해진 건 그로부터 약 1년 후, 중학교에 입학하기 직전 봄 방학 때였다. 처음엔 그냥 궁금한 정도였는데 이내 '가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당시에 나는 남한테 퍼 주고 싶을 정도로 시간이 남아돌았기 때문에 이 모험을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이제 곧 중학생이 될 몸이니 이런 일 쯤은 혼자 거뜬히 해낼 수 있어야 했다. 마을버스를 타면 20분 만에 도착할 거리지만 명색이 모험인데 버스를 탄다는 건 치사한 짓이라(물론 돈도 없었고) 걸어서 가기로 했다. 걷는 동안 예전 우리 동네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봤다.
동네 문지기 노릇을 했던 파출소를 지나 커다란 은행나무 그늘 뒤로 완만한 언덕길이 나온다. 그 길을 따라 올라가면 오른쪽에 상록 빌라 입구를 지나서, 왼쪽 길로 들어선다. 거기부터는 조금 더 급한 경사라 걸을 때 약간 숨이 찬다. 가파른 길 끝엔 검붉은 녹이 자글자글한 초록색 철문이 벽처럼 버티고 서있다. 내 기억에 한 번도 열린 적 없는 그 문을 정면으로 두고 몸을 왼쪽으로 돌리면 고추장 밥을 비벼다 줬던 '미경언니네'가 나오고, 거기부터는 어른 어깨 하나면 꽉 차는 좁다란 골목길이 구불구불 이어진다. 우리 집은 그 길 중간쯤에 있는 빨간 대문이다. 눈을 감고도 사방으로 뛰어다닐 수 있을 것 같은 나의 고향, 우리 동네.
그러나, 거의 한 시간을 걸어 도착한 내 고향은 말도 못 하게 생경한 풍경으로 변해있었다. 누구네 담벼락이었을 시멘트와 벽돌 덩어리들이 어지럽게 쌓여있고, 부서진 가구들과 얼마 전까지도 쌀을 씻는데 썼을 만한 바가지 같은 것들이 회색빛 쓰레기 더미 속에 아무렇게나 처박혀있었다. 걸핏하면 내 등에 실내화 주머니를 쥐어박으며 낄낄거렸던 천이 오빠네 집만이 전쟁터에 홀로 남은 성당 같은 얼굴로 서 있었을 뿐, 내가 태어나고 자란 집과 동네는 철저하게 '철거'당해있었다.
열세 살. 이제 막 사춘기의 그늘이 드리우던 나에게 그 장면은 '상실' 그 자체였다. 만약 그때 이 단어를 알았다면 심장이 발끝으로 쓸려 내려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뭔지 왜 분한 감정이 치밀어 오르다가 이내 팔다리에 힘이 주욱 빠지는지 알았을 텐데. 불행히도 난 아직 예비 중1이었던 터라 그 감정을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까지 더해져 콜록콜록 기침을 해대며 울 뿐이었다. 그제야 이삿짐을 싸던 엄마와 미경언니네 아줌마가 왜 그렇게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로부터 3년 후에 철거당한 나의 고향 동네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촘촘하게 들어섰다. 엄마는 예전에 우리 집을 철거하는 대가로 받은 '딱지'와 작은 아파트를 교환하고 다시 시흥2동으로 이사했다. 미경언니네도, 천이 오빠네도 없고 우리가 속속들이 알던 익숙한 길도 모두 사라진 '시흥2동'으로.
그토록 '신식 양옥집'을 찬양했던 나는, 폐허위에 세워진 신축 아파트엔 오래도록 정을 붙이지 못했다. 내 고향을 산산조각내고도 위풍당당하게 솟아있는 고층 아파트를 보면 가끔 속이 울렁거렸다.
1997년 이른 봄, 그 '상실' 위에서 고개를 떨군 채 울먹이는 아이가 아직도 거기에 있다. 예상컨대 쓸쓸한 표정으로 홀로 이삿짐을 챙기던 40대 여인의 가냘픈 등도 아직 거기에 있으리라.
우리는 그렇게, 영영 고향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