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세로 굴러가기

귀여운 게 없으면 봄동을 들어올리자!

by 한써먼



같은 기수로 만난 동료 에디터 분들과 온라인 글쓰기 모임을 한다. 모임 이름은 ‘산 넘어 산(=^^^)’. 써도 써도 다음 글은 산처럼 버티고 있고, 써도 써도 글쓰기의 어려움이 줄지 않는 기막힌 심정을 대변한 우리의 모임 이름이다. 주로 쓰는 일과 영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이 간헐적 모임의 묘미는 대화 주제가 점점 산으로 가는 데 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무용하고 시시콜콜한 정보 교환은 건강 증진에 도움이 된다. 고만고만한 일상에 깨알같은 웃음을 뿌려 생기를 돌게 하니까.



얼마 전 모임이 있었다. 살짝 늦은 신년회 기분을 만끽하며 오랜만에 서로의 근황을 나누었다.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다가 모임 끝 무렵에 자연스럽게 ‘귀여운 물건 배틀’이 펼쳐졌다. 한동안 잊고 있었다. 우리에게 전적이 있다는 것을.



전에 셋이서 귀여운 소비 배틀을 벌였던 게 생각이 났다. 새로 산 다이어리, 손톱 큐티클 제거펜, 낚시 장난감 등을 영상 화면에 들이대며 최근에 산 물건을 한 명씩 자랑했더랬다. 귀여운 걸 모으는 낙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정말 밤새도록 말할 자신이 있는 우리였다.



2026 시즌의 첫 배틀도 그날의 연장선일 거라 생각했다. 서로에게 자랑할 만한 귀여운 물건을 탐색하기 위해 우리는 잠시 흩어졌다. 최근 들어 인형뽑기 수확이 좋은 나는 나의 인형들로 승부수를 던지기로 했다. 므흣하게 웃고 있는 네잎클로버 인형과 만두 동전지갑을 주섬주섬 챙기는데 괜히 자신감이 차올랐다. 이만하면 꽤 깜찍하다고 자부했다.



착각이었다. 아직 화면으로 복귀하지 않은 팀원이 무엇을 들고 올지는 까맣게 모르는 것이었다. “잠시만요” 하는 목소리와 함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준비한 물건을 들키지 않게 옆에 두고 숨기는 그때가 그렇게 재밌고 콩닥거릴 수가 없다. 3분할 화면으로 마주한 우리에게서 묘한 긴장과 설렘이 흘렀다.



곧이어 시작된 배틀. 여행용 캐리어 모양의 에어팟 케이스와 키링 인형의 매력 뽐내기가 이어졌다. 그것들은 충분히 앙증맞았고 귀여운 것으로 제 몫을 했다. 끝판왕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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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물건을 기다리고 있던 순간, 갑자기 화면에 날아든 ‘봄동’. ‘저게 뭐야...?’ 하다가 금방 알아챈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동시에 자지러졌다. 귀여운 게 마땅히 없어서 그냥 오늘 장 볼때 샀던 봄동을 보여주는 거라는 팀원의 말에 배가 찢어질 듯이 웃었다. 그녀가 트로피처럼 들어올린 봄동은 너무나 뜬금없고 사랑스럽고 강력해서 무언가를 자랑하고픈 마음을 아예 접게 만들었다. 게다가 오늘 마신 아메리카노까지 겸사겸사 보여주는 그 여유란...! 뒷골이 당길 정도로 아찔한 귀여움이었다.



뭐가 좀 없으면 어떠한가. 또 아무렴 어떤가. 귀여운 게 없어서 봄동이라도 번쩍 들어올린 그녀가 이번 판의 MVP다. 모든 걸 다 제치고 본인이 가장 귀여웠다는 말을 전한다. 초록초록한 얼굴로 당당한 기운을 뿜던 배추 또한 나무랄 데 없이 완벽했음을 인정한다.



배틀 판을 뒤엎은 봄동의 기세는 나에게까지 파장을 일으켰다. 마음이 간지러워 들썩들썩. 뭐라도 저지르고 싶게 만들었다. 나는 당장 이 기운을 놓치지 않고 써먹기로 했다. 이것은 박살났던 글쓰기 의지를 다시 일으켜 세울 기회였다.



그리하여 만들었다. 일명 ‘고료 기원 카드’. 딱히 고료 들어오는 곳은 없지만 기세로 만들고 싶었다. 글은 쓰지만 슬프게도 원고료로 모은 돈이 없다. 그리고 스스로 성찰해 봤을 때 나 자신도 아직 만족할 만한 글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허나 명분은 만들면 그뿐. 장차 이 고료 카드는 행운의 부적이자 기분 좋은 마수걸이가 될 터이니! 가지고 있으면 기세가 오르고 기세가 오르면 좋은 일이 내게 덕지덕지 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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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향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카드를 꾸몄다. 네모난 스티커 사진에서 볼펜 부분만 오려 내어 카드에 붙이고, 라이언의 눈썹을 모음 삼아 ‘고료’라는 글씨도 대놓고 적었다. 이런 걸 하고 있는 내가 촌스럽게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 이렇게라도 굴러가고 싶다.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잘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무교지만 이것저것 빌었다. ‘양질의 글을 쓸 수 있게 해주시고, 더 많은 곳에 제 글이 닿게 해주시고, 일감이 줄줄이 들어오게 해주시고, 포기하지 않는 힘을 주시고, 기왕이면 재물운도 터지게 해주시고...’를 빌며 불특정 다수의 착하고 잘나가는 신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꾸미기를 끝냈을 때 알게 된 사실은 ‘고료’가 ‘공룡’이 됐다는 것. 라이언의 동그란 눈이 받침이 될 줄이야... 뭐 공룡 카드도 나름 괜찮지 않나 싶다. 공룡의 호기로 한번 성큼성큼 걸어가 보겠다. 완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예찬론자 같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미미한 행동으로 스스로를 계속 일으켜 세우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하루의 버팀 속에서 잠시라도 꿋꿋해지고 싶다.



‘기세’라는 단어를 적다보면 이런 이미지가 떠오른다. 빳빳하게 다려진 셔츠 깃, 늠름하게 앉아 있는 호랑이, 운동 선수의 우렁찬 기합, 흥 많은 자의 뻔뻔하고 말도 안 되는 춤사위...자신감이 떨어질 때마다 한 번씩 상상하는 그림이다. 여기에 슬쩍 봄동과 공룡 카드를 끼워 넣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기운이 나를 든든하게 지켜 주는 것 같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이 창대할 거란 기대를 하지 않기로 했다. 3월도 특별하게 여기지 않기로 했다.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지금 걷고 있는 발 끝만 보기로 한다. 작디 작은 기세로 오늘도 나는 굴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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