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바닥 닦기의 유용함

나는 더 잘해보려고 방바닥을 닦고 있어

by 한써먼




‘엎어 말어?’



인쇄한 원고를 책상에 올려놓고 노려보기를 수차례. 마른 수건에서 마지막 남은 물기를 짜내듯 힘겹게 완성한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간을 꽤 쏟은 것 같은데 이렇게 구릴 수가 있다니.... 그러긴 정말 싫은데 엎는 게 더 나으려나. 엎을 인물도 못 되는 나는 원고에 들인 공이 너무나 아까워 순간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다시 쓰는 게 제일 빠른 지름길인 걸 알면서도 도통 엄두가 나질 않아서 그냥 멍하니 있기만 했다.



용기가 빈약한 사람은 결국 책상을 떠난다. 도망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지만 따져 보면 도망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방 밖으로 아예 탈출하는 것도 아니니까. 바닥. 나는 그저 책상에서 바닥으로 이동한다. 쓰고 있는 글에서 더 이상의 진전이 없어 보일 때, 아무 것도 못 쓸 것 같은 무기력한 기운에 압도당할 때, 이 모든 상황에 결국 질려 버렸을 때 의자에서 빠르게 일어난다. 신경질적으로 팍팍 뽑아낸 물티슈 두 장을 손에 쥐고 방바닥에 쪼그려 앉는 순간, 내면에 울려 퍼지는 명상 알람 소리.



‘일단 바닥부터 닦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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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미는 울화를 바닥 닦기로 승화시키려는 사람 마냥 물티슈로 장판을 빡빡 문지르는 나. 코딱지만한 정사각형 방 안을 오리걸음으로 돌아다니며 다시 그 위를 휴지로 벅벅 훔치는 나. TV 화면 속 지난 날 우리네 어머니들이 왜 종일 걸레를 쥐고 온 집안을 닦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마르지 않는 근심을 그렇게라도 덜고 싶었거나, 걸레질하며 남몰래 울고 싶었거나.



혹은 직면한 문제보다 방 닦기가 훨씬 덜 복잡해서거나. 쓰는 일은 까다롭지만 닦는 일을 단순하고 명쾌하다. 완성되기 전까지는 존재하지도, 잡히지도 않는 무형의 존재인 글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닦는 대로 묻어 나오는 먼지를 보고 있노라면 그 실체감에 속이 뻥 뚫리는 것이다. 꼬질꼬질해진 수확물을 동그랗게 뭉치며 이토록 확실한 결과는 어디에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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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이 깊어질수록 닦는 범위도 확장된다. 책상&의자 밑, 행거 아래, 멀티탭 주변, 김치냉장고 바닥 틈, 휴지통 바닥, 데스크탑 본체 커버까지 점점 넓어진다. 내친김에 알콜스왑으로 키보드와 마우스도 시원하게 닦아준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부스러기들은 돌돌이로 깔끔하게 해결한다. 이때 청소기 사용은 금물! 고상한 느낌이 나서 안 된다. 지금의 수고스러움을 끝까지 가져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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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지지않겠다는 느낌으로다 박박. 바닥을 훔치다 문득 다른 사람들은 글이 안 써질 때 그 막막함을 어떻게 다스리는지 궁금해졌다. 다들 자기 글의 비위를 어떻게 견뎌내고 있는 지도(참고로 나는 내 글에 비위가 상할 때가 많다). 나처럼 금방 실망했다가 금방 희망에 차오르려나? 아직 쓰지 않은 단어와 문장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또 한 번 기대를 걸어보려나? 내가 모르는, 그치만 어딘가 닮아 있는 이들을 떠올리다 보면 마음이 괜찮아진다.



모르긴 몰라도 용기는 순발력과 비슷한 성질일 거다. 어느날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알게 모르게 쌓아온 내력에 기인해서 나오는, 준비된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고로 용기는 연마가 필요한 영역. 갈고 닦는 연습이 필요하다. 용기를 기르는 데 바닥 닦기 만한 일도 없다. 방 한 번 훔치고 나면 마음이 후련해져서 책상 앞에 앉을 용기가 생긴다. 개운해진 기운을 모니터로 끌고 와 좀 전까지 두려워하던 원고를 다시 건드린다. 덜어 내고 보태며 하려는 말에 가까워진다. ‘내가 심금은 못 울려도 한 번은 진짜 피식하게 만든다!’ 이런 시시한 오기도 부리면서 말이다.



잘해보고 싶어서 방바닥을 닦는다. 쓰는 일을 더 잘하기 위해 바닥을 닦는다. 나는 내가 방을 닦으며 보낸 시간을 믿는다. 그렇게 버틴 시간을 믿는다. 방 닦기는 내가 믿는 가장 현실적인 용기다. 내일은 조금 더 잘 쓸지도 모른다는 착각과 희망을 거듭하다 보면 방 한 칸 짜리의 용기도 조금씩 자라나지 않을까.



쓰고 닦으며 의심하고 기대한다. 과연 이 방바닥 닦기는 무엇으로 귀결이 날지. 아직은 빡빡 더 닦아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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