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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세상 속 느림보 거북이처럼

괜찮아, 지구별엔 누구나 처음인걸


30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해야 할 일을 listup 하고 해치운 목록을 하나씩 지운다.

KTX를 타고 하루에 600km를 이동하고, 수십 통의 통화와 미팅을 하며, 틈틈이 SNS을 한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3분이 채 되지 않아 꼭대기층에 도착하고, 주문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음식이 나온다. 

밤 12시가 지나도 여전히 도심은 휘황찬란하고, 몇 달 전 광풍을 일으킨 핫 아이템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양길에 접어든다. 

링크된 인터넷 페이지에 로딩 중이라는 아이콘이 나오면, 잠시의 주저함도 없이 back을 터치해 빠져 나간다.



세상은 잠시의 쉼도 없이 빠르게 돌아간다.


하루 종일 울리지 않는 전화기, 반응 없는 SNS를 보면 세상과 단절이 된듯한 불안감에 끊임없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린다.

하루 전에 주문한 택배가 오지 않는다고 투덜 되고, 

30분 전에 주문한 배달음식이 도착하지 않는다고 재촉 전화를 건다. 

LTE도 부족한 5G 세대의 지금은 온통 재빠른 토끼들 투성이다.


그런 세상에 살아가는 수많은 거북이들,

하루를 마치고 나면 토끼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잠시 쓴 탈을 벗고 본연의 거북이로 돌아온다. 



그리고 빠르게 살아 낸 하루를 보상받기라도 하듯
자신만의 굼뜬 시간을 보낸다. 


팔이 아플 만큼 휘휘 돌려야 하지만 온전히 자기를 위한 번거로움을 즐기며, 잘 볶아진 원두를 갈아 뜨거운 커피 한잔을 정성스레 내리고, 욕조에 가득 받아놓은 온수에 몸을 담근다. 


토끼처럼 하루 종일 뛰어다닌 다리는 노곤 노곤해지고, 바짝 선 귀처럼 곤두세웠던 신경은 적당히 끄집어 내려놓고, 솔음으로 일관되었던 목소리는 도에 놓아둔다. 


흰 종이 위에 사각거리는 연필로 낙서를 하다, 몸이 푹 파묻히는 소파에 자리를 잡고 며칠 전 사둔 만화책을 보며 낄낄거린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시간. 

누군가의 재촉도, 남과의 비교도 없는 시간.

토끼 세상에 살기 위해 힘쓴 자신을 토닥거린다



캘리그래피 by 정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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