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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스푼 Aug 26. 2023

왕할머니를 위한 노래

실화를 동화처럼...





부드러운 산바람을 맞으며 왕할머니가 일어났습니다.


“왕할머니 아니십니까? 어디 가시는 게요?”


소나무 할배가 물었습니다.


“증손자들이 오고 있는데, 아직 수풀이 많이 우거져서 좀 도와줄까 합니다.”

“아이구, 귀한 손님이 오셨구먼. 잘 다녀오십시오.”


왕할머니는 살짝 목례를 올리고 총총히 길을 나섰습니다.






민우와 민수가 숲 속 오솔길을 걷고 있습니다. 앞장선 부모님을 따라가면서 끝말잇기가 한창입니다.


“나뭇가지!” “지렁이!”

“이사!” “사과!”

“아참, 형아! 그거 잘 챙겨 왔어?”

“응, 여기 가방에 잘 들어있어.”


민우가 어깨에 멘 가방을 툭툭 칩니다. 민수가 형을 보며 씩 웃습니다. 민우도 같이 웃었습니다. 왕할머니에게 드릴 선물을 생각하니 마음이 설렙니다. 예년보다 이른 추석입니다. 아직 나뭇가지에 초록 잎들이 무성한데, 빨갛고 노란빛이 감도는 잎사귀와 열매도 보입니다.


“애들아, 여기는 사람들 없으니까 마스크 벗어도 돼.”


엄마가 이야기했습니다.  민우와 민수는 마스크를 벗고 ‘하아’ 숨을 내쉬었습니다. 허파까지 밀려들어오는 공기가 시원합니다. 제일 앞의 아빠가 오솔길 왼쪽 옆 산비탈로 들어서며 잠시 멈춥니다.


“여기다. 여기로 올라가야 해. 민수는 아빠랑, 민우는 엄마랑 올라가자.”


민수는 아빠 옆으로 후다닥 뛰어갔습니다. 민우도 엄마 옆으로 갔습니다. 비탈은 가파른데 제대로 된 길은 없습니다. 울창한 나무와 수풀을 헤집고 산을 탈 생각을 하니, 민우는 조금 아찔합니다. 왕할머니가 보고 싶지만 산을 올라가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민우야, 괜찮아? 엄마가 바로 뒤에서 갈게. 아, 가방 이리 주렴.”


엄마가 민우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습니다. 민우는 가방을 엄마에게 드리고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왕할머니는 민우의 증조할머니입니다. 할아버지 댁에 놀러 가면 왕할머니는 방문을 빠끔히 열고 살며시 손짓을 했습니다. 왕할머니의 방에서는 달콤한 과자와 사탕 냄새가 났습니다. 왕할머니는 윗 날개에 하트무늬가 있는 나비브로치를 늘 하고 있었습니다. 민우와 민수가 과자와 사탕을 먹으며 이야기하면 왕할머니는 주름진 얼굴로 활짝 웃었습니다. 특히 ‘나비야’ 노래를 부르며 민수가 춤을 추면 왕할머니는 더욱 기뻐했습니다. 다른 어른들 말씀으로 왕할머니가 군것질거리를 내어주는 것은 오직 민우와 민수뿐이었습니다.


왕할머니는 나이가 많았습니다. 조금만 더 살면 1 세기라고 했습니다. 민우가 왕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요양병원입니다. 말간 얼굴의 왕할머니는 코에 산소 줄을 꼽은 채 의식이 없었습니다. 민우는 엄마가 왕할머니의 하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귀에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할머니, 부디 행복했던 일만 기억하세요. 힘들고 슬펐던 일 다 잊고 행복한 일만 가지고 가세요. 민우랑 민수랑 애들 아빠랑 저희도 행복하게 살게요……. 애들아, 할머니한테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드려.”

“왕할머니, 안녕히 가세요. 하늘나라에서는 더 행복하세요…….”

“왕할머니……. 안녕히 가세요…….”


민우와 민수가 눈물을 글썽이며 왕할머니를 뵙고 온 다음날, 왕할머니는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왕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다시 할아버지 댁에 갔을 때 왕할머니의 방문을 열어본 적 있습니다. 텅 빈 방에 작은 장롱 하나와 장식장만 남아있었습니다. 더 이상 과자와 사탕 냄새는 나지 않았습니다. 민우는 왕할머니가 그리웠습니다.


지난겨울 민우가 산에 왔을 때는 왕할머니의 장례식 날이었습니다. 아직 어린 민수는 외할머니에게 맡겼습니다. 왕할머니는 꽃상여를 타고 계셨습니다. 꽃상여는 살아생전 왕할머니의 소원이었습니다. 예쁜 종이꽃으로 장식한 꽃상여를 타면 극락에 간다고 믿으셨습니다. 상여를 둘러멘 아저씨들이 계속 노래를 불렀습니다. 구슬픈 노랫소리가 겨울 산을 굽이굽이 돌아 메아리쳤습니다. 오솔길에서 중간중간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상여가 멈추면 어른들은 하얀 봉투를 주며 절을 했습니다. 민우는 엄마의 손을 잡고 계속 뒤를 따랐습니다.


가장 높은 산비탈에 땅을 넓게 다진 곳이 있었습니다. 조금 떨어진 자락에 나이 든 소나무 한 그루도 보였습니다. 경사가 높아 무서웠지만, 막상 올라오니 시야가 탁 트여 민우는 속이 시원했습니다. 묏자리에는 이미 깊은 구덩이가 있었습니다. 아저씨들이 꽃상여에서 왕할머니를 내렸습니다. 하얀 천들이 21 매듭으로 엮인 왕할머니를 묏자리에 모시자 아름다운 연꽃이 활짝 피어난 듯했습니다. 민우는 어른들을 따라 묘에 덮은 흙을 꾹꾹 밟으며 왕할머니가 원하던 극락으로 가시길 빌었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민우의 코끝을 훑고 하늘로 향했습니다.


아빠가 민수와 함께 산을 오르며 풀을 힘껏 내리밟습니다. 뒤를 따르던 민우는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힘을 내었습니다. 가끔 튀어나온 잔가지에 눈이 찔릴 것 같았는데, 그때마다 누가 잡아주는 것처럼 가지가 수그러들었습니다. 민우와 조금 떨어진 곳에 나비 한 마리가 날고 있습니다.


“어머, 나비가 있네.”


민우의 뒤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민우가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자 나비는 멀리 날아갔습니다. 등이 축축하게 젖을 무렵, 왕할머니의 산소에 도착했습니다. 초록색 잔디들이 산소를 뒤덮고 있습니다. 산소 앞에 작은 피크닉매트를 깔고 간단한 음식과 술을 준비했습니다. 모두 함께 절을 하고 아빠가 건네준 술잔을 든 민우와 민수는 산소에 술을 골고루 뿌렸습니다.


“우와! 여기 굉장히 넓어, 그리고 저기 아래 시내가 다 보여!”


산소에 처음 온 민수가 즐거워하며 커다란 소나무까지 달려갔다 옵니다. 민우도 함께 뛰었습니다. 엄마아빠는 즐겁게 뛰어노는 민우와 민수를 바라보았습니다. 잠시 후 민우와 민수는 산 아래 드넓게 펼쳐진 도시를 바라보며 아빠가 건네준 육포를 먹었습니다. 아빠가 스마트폰을 꺼내 영상전화를 합니다.


“자, 모두 모여! 할머니한테 얼굴 보여드리자. 저예요.”

“여보세요?”


먼저 할머니의 얼굴이 나오고 뒤편에 할아버지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어머니, 아버님 안녕하세요? 저희 지금 성묘 왔어요. 애들아, 인사드려.”

“할머니,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할머니, 할아버지.”

“어, 민우야, 민수야, 잘 지냈니?”


민우와 민수는 엄마와 함께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드렸습니다. 코로나 인원제한 때문에 이번 명절은 친척들이 할아버지 댁에서 모이지 않고 각자의 가족끼리 따로 성묘를 하기로 했습니다. 예전에는 제사나 명절에 모두 모이면 인원이 많아서 할머니도 엄마도 늘 바빴습니다. 민수가 물었습니다.


“할머니, 차례 안 지내니까 좋아요?”

“아이고, 그래. 할미가 오래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구나! 너무 편하고 좋아.”

“치이, 그래도 우리 보고 싶지 않아요?”

“보고 싶지. 그래도 건강이 우선이니까, 전화라도 우리 손자들 얼굴 보니까 너무 좋네.”

“할머니, 저, 민우예요. 앞으로 영상전화 더 많이 할게요. 할머니.”

“응, 그래그래. 자주 하자.”


전화를 끊고 아빠가 ‘내려갈래?’ 하고 물었습니다. 민우와 민수는 조금 더 놀고 싶었습니다. 모처럼 나온 외출인 데다 마스크 걱정도 없어서 좋습니다. 게다가 왕할머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민우가 가방에서 칼림바를 꺼냈습니다. 왕할머니를 위해 며칠 동안 열심히 연습한 칼림바입니다. 민수도 산소 앞에 섰습니다. 민우가 연주를 시작합니다. 청아한 소리가 온 산에 울려 퍼집니다.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


민수가 민우의 연주에 맞추어 춤을 추었습니다. 왕할머니를 위한 노래입니다. 민수가 날갯짓을 하고 있는데, 아까 보았던 나비 한 마리가 다시 날아들었습니다. 나비가 춤을 추듯 날아와 날개를 활짝 펼쳤습니다. 날개에 하트무늬가 보입니다. 노래가 끝나고 잠시 정적이 흘렀습니다. 시원한 바람을 타고 나비가 소나무로 날아가더니 가지 끝에 앉았습니다.


“형아, 저 나비, 왕할머니 옷에 있던 나비 브로치 같아.”

“어, 정말 닮았네…….”

“어머, 우리 귀요미들 보려고 왕할머니가 오셨나 보네.”

“증손자들이 노래를 불러주니 할머니 기분이 좋으신가 보다! 하하하.”


민우와 민수는 엄마아빠랑 크게 웃었습니다. 한바탕 웃음 뒤에 끝말잇기 놀이도 더 하고 산소 둘레 작은 잡초도 뽑으면서 놀다가 짐을 꾸려 산을 내려갑니다.  


‘왕할머니, 안녕히 계세요. 다시 올게요.’


엄마 곁에서 걷던 민우가 뒤를 돌아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부신 태양이 서쪽으로 조금씩 기울고 있습니다.


나비가 힘차게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로 훨훨 날아올랐습니다.









P.S. 아이들을 정말 예뻐하셨던 증조할머니를 떠올리며,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절의 일을 각색하여 동화처럼 썼습니다만 플롯도 기승전결도 없습니다. ^^;


"할머니, 저희 잘 살고 있어요. 할머니도 그곳에서 늘 행복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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