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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스푼 Sep 03. 2024

뜻밖의 격려

시간을 건너온 대왕고래




요 며칠 분주했다.


냉장고가 사망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뽑기가 잘못된 것인지 3년 차부터 여름이면 말썽을 부리다가 기어이 멈춰버렸다. 제조사에서 물건을 회수하고 잔존가치를 보상하기로 했다. 회수기간이 최소 일주일이 넘게 걸린단다. 어쩔 수 없이 거실 한 구석에 두고 새 냉장고를 들였다.


하필 주말이라 내용물의 대부분은 버리고, 일부는 아이스박스에 돈 주고 사온 얼음과 함께 보관했다. 냉장과 냉동 사이에 무슨 사연이 그리 많은지 끊임없이 나오는 재료들때문에 지쳤다. 드디어 어제 새 냉장고를 받았는데, 아뿔싸, 이전 냉장고에 맞춘 싱크대 상부장과 냉장고 위에 돌출된 컨트롤러 박스 2cm가 겹치는 거다. 다행히 신랑이 장비를 가져와 상부장 밑바닥을 잘라내어 자로 잰 듯 정확하게 냉장고를 들였다.


주방이 오히려 넓어졌다. 아직 회수되지 못한 거실의 옛 냉장고만 제외하면 기분이 좋을 상황이다. 그러나 며칠 동안 동동 거린 여파인지 몸이 찌뿌듯했다. 이번달 내로 준비하는 공모전이 있어 글을 더 써야 하는데, 자고 일어나니 도통 몸을 움직이기 싫었다.


식구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집에 오도카니 앉아 있다가, 잠이나 잘까 했다. 대신 스레드에 간단한 글과 그림을 올리고 싶었다. 날이 더웠던 며칠 동안 얼음 동동 띄운 아아가 마시고 싶었는데, 막상 새 냉장고가 오니 날씨가 선선해서 뜨아가 생각난다고 말이다. 그렇게 패드를 열었는데 프로 크리에이트에 오래전 2호가 그린 그림이 보였다.


아련 촉촉한 눈빛의 대왕고래가 힘차게 도약중이다. 힘은 들지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부단히 일어선 모양새다. 내 눈도 이렇게 아련하고 촉촉한가? 사실 피곤에 절은 눈일 테지만, 고래가 도약하듯 갑자기 온몸에 힘이 솟았다.


“눕지 말자. 뜨아 한 잔 마시고 다시 오늘을 살자!”


시간을 건너온 아이의 그림이, 오늘의 내게 힘을 전달할 줄이야… 뜻밖의 격려였다.


한스푼의 또 다른 이름은 라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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