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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리한 Jan 14. 2021

코로나 블루 때문이라고 대답하지 않겠다!

문제를 덮을 수는 있지만 해결은 못한다!

아이들에 대한 육아를 온전히 하게 된 지 2개월이 넘었다. 아내는 장애가 있는 첫째님을 위함과 동시에 비장애 둘째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부모연대 임원이 되어 아주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일에 대한 보수는 거의 없다. 얼마 전까지 총회준비를 위해 나한테 아이들을 맡겨둔 채로 열심히 준비했다. 여러 사람들과 의견 차이도 생기고 그로 인해 감정노동을 하는 것 같았다. 

아내의 그런 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는 '아! 이 사람도 참 힘들겠다' 라고 생각했다. 퇴근하고 오면 잘해줘야지 라는 마음을 먹었건만 아내가 돌아오는 시간에 난 이미 모든 정신과 육체적 체력을 상실해 버렸다.

내심 아내가 도와줬으면 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아내 역시 감정노동을 심하게 하고 온 터라 도와줄 힘도 없었다.


코로나로 인해 일상생활이 변하면서 비대면으로 모든 걸 처리하는 이 시기에도 엄연히 감정노동은 필수이다. 비대면이라고는 해도 어차피 타인과 협업하며 의견 차이를 줄여야 하니까!

하지만 코로나 시기에도 아이를 돌보는 건 코로나에 걸리지 않는 한 대면이다. 아이와 적절한 비대면 시간을 통해 질적으로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데 그런 시간 조차 없어져 버렸다.

아이들의 기상시간인 아침 7시 30분부터 취침시간인 21시까지 무려 13시간 30분을 밀착해 있어야 한다. 둘째 놈은 언제나 모든 걸 요구한다. 보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모든 것들을 요구하다 보니 일일이 다 해결해 줄 수 없다. 그런 것들을 해결해주지 않으면 금세 짜증을 내거나 토라진다. 그 모습이 안쓰럽지만 다 해줄 수 없었다. 마음속에는 '해줘? vs 해주지 마?'의 끝나지 않는 싸움이 지속된다.

첫째님은 장애로 인해 초등학교에 들어갈 시기인데도 지적 수준은 이제 만 1세 정도이다. 이제야 만 1세 정도 되었으니 저지레를 할 시기이다. 키는 100cm에 정도이며 몸무게도 17kg이 넘는다. 그런 덩치만 큰 만 1세 아이이다 보니 부엌 위에 칼을 만지며 가스레인지의 불에 얼굴을 갖다 대려고 한다. 위험한 곳으로 가면 끌고 오거나 업어와야 한다. 저절로 운동이 되는 수준을 넘어 근육 속 단백질이 파괴되어 복구되지 않을 정도로 스쿼드와 데드리프트를 하게 된다.

첫째님이 육체적 체력을 다 빼버린다면 뒤이어 둘째 놈은 남아있지 않는 육체와 정신적 체력을 쏙 빼버린다.

"놀아줘! 안아줘! 아빠 오늘은 어디 갈 거야?" 이 세 마디만으로 날 굴복시켰다.

둘째 놈과 놀아주다 보면 첫째님에게 소흘 해진다. 첫째님과 놀자니 놀이를 이해 못하고 도망간다. 그럼 둘째 놈이 와서 다시 놀아달라고 하면 첫째님이 눈에 밟혀서 안된다고 말하면 둘째 놈은 운다. 둘이 같이 놀 수준이 안된다. 이런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점점 지쳐간다. 스트레스가 계속 쌓이기만 할 뿐이다. 12시간 이상을 이런 마음을 갖고 육아를 하다 보니 이 스트레스를 어디다가 어떡해서든 버려야 했다.

9시에 어이들을 눕혀서 재우고 난 후에야 온전히 내 자유시간으로 만든다. 방해받고 싶지 않다. 뇌를 정지하고 싶고 '아빠'라는 단어를 그만 듣고 싶다. 누구한테도 내 서비스를 제공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아내가 남아있다. 뭔가를 말하려는 아내의 말에 난 기계적인 대답을 하며 감정보단 이성적 판단을 해버린다. 번아웃 상태인데 다음날 또 이런 일상생활을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중에는 그나마 첫째님이 재활치료를 다니기 때문에 합법적인 외출을 한다. 재활치료실 각 방에는 수많은 장난감들이 있다. 둘째 놈과 함께 가면 키즈카페 온 것 같다며 이방 저 방을 들어가고 싶다고 떼쓴다. 첫째님이 치료실에 들어가면 둘째 놈을 데리고 나와 맛있는 수제 와플을 사준다. 그게 맛있다면서 앞으로 언니 재활치료를 앞장서서 간다고 한다.

외출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 치료가 없는 날에는 산이나 놀이터로 놀러 가지만 너무 추워서 못 나가는 날도 더러 있다. 이럴 땐 어쩔 수 없이 대형마트에 아이쇼핑을 하러 나간다. 외출하기 전까지는 또 다른 전쟁을 치른다.

첫째님에게 옷 입는 연습을 시키느라 한 10분은 넘게 소요된다. 장갑 끼는 방법도 이해를 못해 '손 모아 장갑'을 끼려고 하면 주먹을 꽉 쥔다. 그 주먹 펴는데만 5분은 걸린다. 그럼 둘째 놈도 자기도 입혀달라면서 옷만 벗고 있다. 첫째님과 이렇게 씨름하다 보니 둘째 놈한테는 제발 알아서 입으라고 강요한다. 충분히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야 하지만  내 잔소리만 받으면서 자라난다.

이런 내 모습이 싫어서 미안하다고 말하지만 그 싫은 행동을 계속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미안하다는 말이 정말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미안하다는 반응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다.

어렵게 두 아이를 준비시키면 30분이 후다닥 가버린다. 손을 붙잡고 외출을 하고 집에 들어오면 손부터 씻겨야 한다. 둘째 놈한테는 꼬질벌레를 들먹이며 "꼬질벌레가 입에 들어가면 대형병원 가서 왕 주사 맞아야 해" 라고 말하면 기가 막히게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손을 대충 씻는다. 응급실에 한번 가서 채혈과 링거를 맞은 기억이 강렬했는지 왕 주사라고 하면 말을 고분고분 듣는다.

이에 반해 첫째님은 집에 오자마자 집에 떨어진 뭔가를 입에 넣으려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구강기가 아직 지나가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그런 첫째님을 붙잡고 화장실로 데려가려면 안 간다고 누워버린다. 바닥에서 떼어낸 다음 끌고 가서 손을 씻긴다. 없던 체력은 그나마 남아있는 정신력으로 버틴다.


쉬고 싶은데 벌써 저녁 준비 시간이 된다. 밥을 하고 있으면 첫째님이 뛰어다닌다. 층간 소음 때문에 마루에는 100만 원이 넘게 맞춤형 매트를 설치했건만 가끔씩 밑에 집에서 올라온다. 처음엔 그냥 죄송하다 했는데 가면 갈수록 별거 아닌 소음에도 올라온다고 생각되다 보니 '너무한다'라는 불평을 하게 된다. 밑에 집이 시끄러울까 첫째님의 행동을 제재해도 뛰어다닌다. 결국 난 또 소리를 지르고 그럼 둘째 놈이 눈치를 본다. 이 관경이 또 너무 싫다. 티브이를 틀고 싶지만 5시 이후로 티브이를 튼다면 첫째님은 각성 조절이 잘 안돼서 새벽에 잠을 깨기 때문에 대체제가 없다. 저녁 준비하면서 소리만 지를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은 아내가 좀 일찍 들어왔고 난 또 평소처럼 첫째님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 모습을 보며 아내가 너무 소리 지르지 말고 화내지 말아 달라고 당부한다.

난 화를 낸 건 아닌데, 그리고 소리를 크게 지르지 않았는데 라고 생각했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정말 달랐다.

"미안해 많이 못 도와줘서!" 라며 아내가 위로의 말을 건네자 나는 날 선 대답을 했다.

"여보가 좀 더 도와주면 되잖아! 빨래하는 것 이상으로 더 도와줘!"

그리고 여느 때처럼 또 애들을 재우고 액션 영화를 튼다. 이 반복된 삶을 지내다 보니 문득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라고 질문을 해봤다.


예전에 초등 남학생이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인터뷰한 것이 기억났다. 모든 걸 사춘기 때문이라고 자기한테 말하는데 그 말이 싫었다고 한다. 자신의 모든 행동의 결과는 사춘기 때문이라는 정답만 얘기할 뿐 부모조차도 공감과 이해를 하려 하지 않아서 더 삐뚤어지는 것 같다는 그 영상이 생각나면서 나도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나 역시 대답은 뻔하게 할 수 있다. 코로나 때문에 그래. 코로나 때문에 아이들이 유치원에 갈 수 없으니까 독박 육아를 하고 있어서 그렇다고 하면 된다. 흔히들 말하는 코로나 블루 때문이라고 덮어버리면 된다.

하지만 과연 코로나 블루 때문일까? 내 행동에 대한 모든 책임은 바로 코로나 때문이라고 대변하면 끝날까?

분명 원인제공은 일부 했을 수 있다. 하지만 코로나가 올해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난 앞으로 짧게는 1달부터 길게는 4달 더 이렇게 아이들과 같이 지내야 한다.  그때마다 모두 코로나 블루로 탓하며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건 누구를 위한 정답일까!



무엇이 근본적인 원인일까 라고 되물어봤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 내 목소리가 커지는지 생각해봤다. 첫째님에게 소리를 지르는 이유를 보니 '장애'였다. 만 1세의 아이라는 모습을 인정하지 않고 여느 비장애 8세 아이와 같은 행동을 요구했던 내 태도였다. 

첫째님의 재활치료 선생님들이 첫째님에 대한 칭찬을 엄청나게 해 줬다. 아내와 내가 보기엔 정말 손톱보다도 더 자라나지 않는 아이가 치료사 선생님들 눈에는 커다란 가능성을 갖은 아이라고 판단된다는 말들이 생각났다. 나도 내 아이가 갖고 있는 재능에 대한 믿음이 없고 지 딴에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또 하나의 원인은 바로 '비교'였다. 나도 회사 다닐 때에는 힘들었다. 그래도 집에 오면 육아하느라 고생한 아내를 퇴근시키고 뒷일을 도맡아 했을 정도로 정말 많이 도와줬는데 왜 이 사람은 이렇게 안 도와줄까 라고 비교를 해버렸다. 그러다 보니 억울하고 화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화가 첫째님의 장애와 만나 결국 감정이 폭발해버렸다. 육아의 스트레스보다 감정조절이 안되다 보니 아무리 신나는 영화를 보고 아무리 재밌는 예능을 봐도 그때뿐 이였다.


브런치에 여러 작가님들이 작성한 글들을 봤다. 그리고 가장 나한테 필요한 건 바로 '감사일기' 였다.

모든 건 선순환과 악순환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지금은 나한테는 그러니까 악순환의 연속이다. 그 악순환을 깨기 위해선 내 마음속 문제들에 먼저 집중해야 했고 그 악순환의 고리에는 '장애'와 '비교'가 있던 것이다.

코로나 블루 인정한다. 현타 왔다는 말 또한 인정한다. 하지만 마냥 그 굴레에 속박되고 싶진 않다.

초점을 조금 옮겨보도록 노력하려고 한다. 물론 내일 아침이면 분명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를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그래도 꼭 감사한 일을 찾아서 작성하도록 노력하려고 한다. 


-공장장 찰리한의 현타 벗어나기


아내한테 솔직한 마음을 얘기하고 나니 좀 더 개운해졌다. 어쩌면 누군가와 소통의 부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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