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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리한 Oct 21. 2020

인생 곡 있어요?

때로는 노래를 통해 기억을 되살리고, 위로를 얻는다.

음악시간! 진짜 제일 싫어!

음악은 분위기를 쉽게 바꿀 수 있고, 사람의 감정을 쉽게 움직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희망을, 또는 좌절을 줄 수도 있다.

중학교 입학 후 첫 음악시간에는 '늙은 마녀'라는 별명의 선생님이 들어와서 인사받자마자 첫마디는 

"야! 음악 공책 펴!" 


설마 첫 시간부터 수업하겠어라는 마음을 갖고 음악 공책을 준비하지 못한 학생들은 우르르 앞으로 몰려나가서 시작부터 타작질을 당한 후 빈 공책을 폈다.

"지금부터 교과서에 나온 악보 다 그려서 검사받아!"


초등학교 때는 그래도 선생님이 오르간이라도 쳐주고, 반에서 제일 말썽쟁이 아이가 나와 선생님 옆에 서서 발로 페달을 밟아 공기를 넣어주고 그랬는데 중학교는 뭐 시작하자마자 공책에다 그림을 그려야 하는 건가.


그렇게 팔 아프게 콩나물들을 그리다 보면 45분이 지나갔다.

"야! 다음 시간까지 다 그려서 검사받아!"


그리고는 쏜살같이 교실을 빠져나가셨다.

그때부터 음악은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고, 지루하고, 팔 아프고, 엉덩이 아프고(맞아서) 진짜 싫은 과목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멜로디는 좋아!

2학년이 되어서 엄청 핫한 그룹이 나왔다. 서태지와 아이들 은퇴 후 갈팡질팡 하던 가요계에 HOT라는 괴물 같은 그룹이 나와 엄청난 퍼포먼스와 뛰어나지 않은 노래실력으로 당시 청소년들의 우상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뒤이어 핑클, SES 등 걸그룹이 나왔지만 난 HOT에만 빠졌고, 춤 잘 추는 멤버의 대형 브로마이드까지 살 정도였다.

장르는 '댄스'가 주 무대를 이뤘고 그에 맞춘 걸, 보이그룹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뭔가 너무 상업성이 짙어서 아무리 들어도 노래도 별로인데 얼굴과 퍼포먼스가 되다 보니 대중매체에 항상 노출되었다.

대중가요가 다 비슷비슷한 것이 점점 지겨워지던 찰나, 라디오에서 나온 알라딘의 'A whole new world'를 듣게 되었다. 가사는 잘 모르겠지만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리고 나도 저렇게 멋진 멜로디에 맞춰 네이티브 발음을 갖춰 부르고 싶다는, 흔히 청소년기에 나타나는 '관종'이 생겼다.


팝송을 들으면 왠지 영어 좀 하는 애들처럼 보이기도 했고, 워낙 다양한 장르들도 많았기에 귀가 즐거웠다. 처음에는 잔잔한 OST로 시작했지만 점점 롹, 헤비메탈까지 가버렸다. 딥 퍼플, 너바나, 건 앤 로지스, 드림시어터 등 온갖 귀를 해롭게 하는 것들이 더 좋았다.

그러다 보니 가사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들리지 않는 영어 발음이었고 난 오로지 멜로디에만 집중하고, 악기 소리에만 집중하고, 그러다 왠지 가사가 궁금하면 영어사전을 펼치고서 해석하곤 했다. 가사는 뭐 크게 와 닿는 내용도 없었고 온갖 욕과 세상에 대한 저주만 퍼부었다.


가사에 집중한 인생 곡

그렇게 팝송에 푹 빠져 지내다 군대에 입대했다. '남자라면 현역 가야지'라는 동네 형들 말만 듣고 신체검사를 받고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남자라면 현역 가야지'라고 외친 동네 형들과 주정뱅이가 될 때까지 술 마시고 군대 가기 싫다고 온갖 꼬장을 부리다 입대를 하게 되었다.

훈련소에서는 군가가 나왔다. 비장한 제목 '최후의 5분이다'를 듣고는 좀 의아해했다. 내가 사회에 있을 때 들었던 그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이제는 돌아왔네'라는 노래는 군대에선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머니와 짧은 눈물의 이별을 한 후 모든 가족들이 우르르 퇴장했다. 그러자 갑자기 군가가 멈췄고 본색을 드러낸 교관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이런 #$%#아! 놀러 왔어? 눈물이 나와? 질질 짜??$%$&*"


눈물이 쏙 들어갔다. '욕'인가 아니면 그냥 소리 지르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 때 또 갑자기 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아! 걸어? 신발이 철이야? 아주 못 뛰게 해 줘 이#$$"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정말 창의적인 욕을 몇 바가지로 먹고 난 후 정신을 차렸다. 저 멀리 이동하여 몸에 맞지도 않는 피복류를 받고 내무실로 들어왔다. 처음 보는 동기들, 낯선 환경, 2년간 갇혀 지내야 하는 '여긴 어디' '나는 누구'를 수만 번 되내었다.

그렇게 그날 저녁 10시, 저녁 점호를 마치고 소등이 되자 어디선가 구슬픈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나팔을 부는 듯한 소리였고, 그 소리는 아직도 기억날 만큼 너무도 구슬퍼서 내무실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면 또 어디선가 소리 소문 없는 교관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야이#$%$$아 안자? 보이스카웃으로 놀러 왔어? 잠이 안 오지? 평생 눈 뜨게 해 줄까 ##$$"


그런 군대에 1년을 지내다 보니 어느덧 상병이 되고 난 해안부대로 배치받아서 2~3개월 단위로 해안소초로 투입되었다. 민간인들과 아주 가까이에 인접해 있었고, 여름마다 놀러 오는 나와 같은 또래들을 보며 부러움에 지켜볼 수밖에 없는 여느 날과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을 즈음이었다.

당시 '왁스'라는 그룹은 알았지만 재수 시절 들었던 '오빠'라는 곡 밖에 몰랐는데 '황혼의 문턱'이라는 아주 보통의 곡이 어디선가 흘러들어왔다.

멜로디는 뭐 특별하지도, 모나지도 않았다. 아주 평범하고 편안하게 듣기 좋은 노래였다.

멜로디가 너무도 평범해서 나한테는 크게 매력이 없었는데 경계근무를 하는 중에 사람들이 틀어놓은 그 곡을 어쩔 수 없이 몇 번이고 들어야 했었다.

하도 듣다 보니 도대체 무슨 곡인가 하고 앨범을 찾아보고 거기에 딸린 가사를 보게 되었다.

'축복받으면서 세상에 태어나 사랑받으며 나 자라왔어'


얼레?? 이것 봐라!

누구나 태어날 때는 부모의 축복을 받으면서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은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왔을 것이다. 가사가 뭔가 마음에 와 닿았다. 맞아 맞아. 나도 그렇게 태어났어. 그럼 그다음은 뭐지?

'교복을 입던 날, 친구를 알게 됐고, 우연히도 사랑이란 걸 알게 됐어'


이야.. 이 곡 기가 막힌데. 어떻게 그렇게 내 인생을 다 알지?

인생의 시작과 끝에서 느끼는 그 감정들을 곡에 다 써 내려갔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집중해서 들었던 부분은 2절 후반에 나왔다.

'그렇게 나는 결혼을 하고, 날 닮은 예쁜 아이를 낳고, 그 녀석이 벌써 학교에 들어갔네 어느덧 세월은 날 붙잡고 황혼의 문턱으로 데려가 옛 추억에 깊은 한숨만 쉬게 하네'


20대 초반에, 그것도 그 빌어먹을 군대에서 이 곡을 만나고 이 가사에 감명을 받고 나도 미래에 저렇게 될까 라면서 격하게 공감하고, 그 시절 썼던 일기장에 가사를 적어놓을 만큼 좋아했다. 멜로디보다는 가사에 더 집중하면서 처음으로 음악에 가사가 존재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날 닮은 예쁜 아이를 낳고

제대하고선 15년 동안 이 노래를 듣지 않았다. 재밌는 노래들이 너무나도 많았고, 노래방에서 부르기엔 분위기를 크게 업 시켜줄 노래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그냥 조용히 그렇게 인생 곡을 잊혀갈 때 즈음이었다.


카페에서 일하면서 노래를 이것저것 틀다 보니 뭔가 크게 시끄러운 것도, 그렇다고 너무 우울한 것도 틀을 수 없었다. 평범한 일상의 노래를 틀어야 했다. 내가 아는 노래들을 모두 다 플레이리스트에 올려놨다. 

"뭐가 더 있을까... "


기억에 남는 곡들과 함께 그 당시의 시절을 회상하며 내 추억을 헤집고 다니던 중이었다.

그래. 왁스가 있었지. 

얼른 황혼의 문턱을 검색하고 재생시켰다. 

음악이 재생되었다. 1절을 감명 깊게 들으며 군대 시절을 회상하다 그만 난 눈물을 흘려버렸다. 

2절 처음에 나오는 가사에서 말이다.

'평범한 사람과 사랑하게 됐고, 눈물겨웠었던 청혼을 받고, 결혼식 하던 날 눈물짓고 있는 내 부모님 어느새 많이 늙으셨네'

평범한 아는 교회 누나를 단번에 사랑하게 됐고 어설프게 청혼을 했고, 결혼식 하던 날 눈물짓는 부모님은 없었지만 늙으신 부모님 두 분은 계셨다.


한동안 부모님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볼 일이 없었지만 그날만큼은 두 분께 큰절을 드리려 얼굴을 봤다.

뿌듯한 표정을 지으시는 두 분의 얼굴이 시간이 뭉쳐진 세월 때문에 많이도 변하셨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감명받은 그 가사의 내용대로 난 살아가고 있던 것이다. 결혼하고 진짜 날 닮은 예쁘지 않은 딸 2명과 지혜로운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첫째가 내년이면 거짓말 같이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잊고 살았었는데, 그 노래를 까맣게 잊고 살았었는데 어느새 그 노래의 가사처럼 되어있었다.

마지막 가사에서는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며 위로를 받고 밝은 미래를 보게 되었다.

'나 후회는 없어 지금도 행복해 아직 나에게 꿈이 있으니까'


맞다. 난 아직 꿈이 있다. 꿈을 위해 8년간 다니던 직장에서 퇴사를 했고 직업을 아예 바꿨다. 

내가 목표로 세운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말이다.

가끔 후회도 한다. 하지만 현재는 너무 행복하게 살고 있다. 최선을 다 하고 싶다. 

황혼의 문턱에서는 활짝 웃고 싶다.


황혼이란 단어를 들으면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마지막'이란 단어를 들으면 과거를 회상하며 후회와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 '마지막' 에는 활짝 웃기 위해 현재의 삶에 최선을 다한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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