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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리한 Oct 22. 2020

세금 내는 아이로 키우고 싶어요.

장애아이를 키우는거요? 마냥 즐겁지도 마냥 슬프지도 않아요!

장애가 주는 조금 다른 삶

우리 첫째는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유전적 질환, 돌연변이, 전문적인 용어로는 다운증후군이다.

21번 염색체가, 하필이면 고놈의 21번 염색체 하나 더 많다는 이유로 지적, 신체적 모든 면에서 일반 아이들보다 느리고, 절대적 수치 역시도 성인이 된다한들 현저히 떨어진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우리는 알았지만 잘 키우기로 결심했다.(이 부분은 나중에 따로 한번 작성해야겠다)


출산을 하면서부터 출발점이 달랐다. 호흡 문제로 집중 케어실에 10일간 입원하고, 심장에 구멍이 있고, 뇌가 부어있고. 때마침 출산 전에 가입했던 커뮤니티에는 태어날 때의 여려 상황들을 봐와서 정기적인 검사를 통해 이런 문제들이 조금씩 해결이 되어갈 즈음에 또 다른 삶이 우릴 기다렸다.


근육이 약하다. 100일이 지나도 목을 못 가눴다. 이 기간이면 아이가 목을 가누고 눈도 맞춘다는데 우리 첫째는 목을 돌리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다. 또다시 커뮤니티를 검색해봤다. 모든 선배 부모들이 외치는 것은 영유아 재활치료였다. 성인에게도 있는 물리치료 이외에도 질환을 갖고 있거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작업, 언어 등등 분야도 다양했다. 아직 갓난 우리 첫째는 근육, 즉 몸을 쓰는 문제이기 때문에 물리치료를 먼저 해야 했다.


당시 5월, 기온이 조금씩 오르는 날 좋은 시기, 첫째는 고작 3개월에서 4개월을 지나가는데 아내는 아기띠를 매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버스를 타고 재활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Too many 시어머니

버스 운전사의 운전은 너무 험악했다. 재활치료 시간은 첫 타임인 9시 30분 이기 때문에 출근시간을 조금 비껴갔지만 사람이 여전히 많고 운전기사분도 나름의 사정이 있는 듯 급정거, 급출발을 한다. 자리양보 역시 임산부일 때도 크게 배려받지 못했는데 아기띠를 하니까 더 배려받지 못하는 것 같았다. 주변에는 온통 잔소리로 무장한 분들이 존재했다. 아이의 양말을 왜 신겼네부터 이러면 춥다, 이러면 덥다, 이러면.... 이러면.... 모두들 본인들의 경험을 살린 잔소리를 했다.


처음에 아내는 이 다양한 정보들로 인해 내가 애를 잘못 키우고 있나 고민을 했었더랬다.

나는 옆에서 항상 용기를 줬다. 

"여보! 너무 잘하고 있어. 아니 이런 엄마가 어딨냐? 애 치료 때문에 그 거리를 버스 타고, 엉? 이 날도 더운데"


재활치료를 위해 나날이 버스를 타다 보니 점점 아내는 엄마가 되어갔다. 정신적 무장이 아주 단단해져서 어지간한 잔소리 포탄 정도야 별일 아닌 듯 넘겼다.


'내 아이는 내가 키우는데 왜 다들 예쁘다는 소리보다는 본인의 경험담을 그렇게 하는 건지.'


그래도 걱정해주는 분들 또한 너무나도 많았고, 본인의 경험을 회상하며 아내한테 한마디 던진다. 

"엄마가 더운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지만 우린 이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었다. 재활치료를 해야 하기 때문에, 재활치료가 필요한 아이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Input-Output 

회사에 있는 나에게 아내가 연신 사진을 보냈다. 우리 첫째가 고개를 들었다는 것이다.

"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한 나는 사진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정말 거기에는 우리 첫째가, 고개를 1cm도 들 수 없던 그 첫째가 팔을 짚고 고개를 벌떡 들고 있는 게 아닌가.


"뭐야! 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 안 한 거야?"

'속았다'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할 수 있게 도와주지 못했던 부모였다. 남들은 그냥 자연스럽게 하는 동작이지만 우리 첫째는 도와줘야 했다. 도움을 주고 근육을 단련시키는 훈련이 필요했다.


다운증후군의 아이들이 걷는 시기는 빠르면 일반 아이들처럼 돌부터도 가능하지만 24개월 정도 걸린다. 더 걸릴 수도 있고, 더 오래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물리치료 선생님은 마치 예수님처럼 '꼭 걷게 해 주겠다' 고 다짐하셨다. 일반 아이들처럼 17개월 정도, 24개월 안에 걸을 수 있도록 열심히 치료해주시겠다고 했다. 그 말이 어찌나 고마운지 우리는 그렇게 그 선생님을 신뢰하면서 열심히 재활을 했다. 그렇게 재활선생님은 Input의 강도를 올리셨다.  

우는 우리 첫째를 잡고, 근육이 약해서 하기 힘든 동작을 안 하려고 내빼는 아이를 붙잡고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단련시켜줬다. Output은 달마다 변할 정도로 놀라웠고, 약간의 기대를 했었다. 

'다운이라면서 이렇게 잘해? 다운 아닌 거 아냐?'


그에 힘입어 아내는 더운 7,8월에도 아기띠를 매고 모진 잔소리 포탄이 떨어지는 버스를 타고  재활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온다. 


몰랐던 것들: 필요한 것은 더 많다

신체적인 부분들은 재활치료를 하면서 좋아지고 있었다. 물론 일반 아이들처럼은 아니지만 적어도 너무 뒤처지지 않게끔 잘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발달검사를 하던 중 이제는 다른 것들이 필요하다. 

지적인 수준이 일반 아이들에 비해 조금 떨어졌다. 먹을 때는 손으로 먹던, 포크를 사용해서 먹던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해야 했고 스티커를 떼서 붙이는 방법, 펜을 잡고 줄을 긋는 방법, 신발을 벗는 방법, 쓰레기통에 무언가를 버리는 방법....

 

무언가를 인지하고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줘야 했었다. 


첫돌이 되기 전에 우리는 또 커뮤니티를 통해 다운복지관이 존재한 다는 것을 알았고 거리가 좀 있었지만 상담을 받으러 갔다. 첫째의 상태를 점검했다. 웃기게도 일반 아이들에게 필요한 시기별 교육이나 발달에 도움이 필요한 정보가 있듯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시기상 필요한 도움들이 무엇이 있는지,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지 방법들이 다양했다. 상담을 마치고 나니 앞으로의 우리 첫째 삶이 더 즐거워질 것이라 생각했던 나는 더욱더 좌절을 맛봤다.


"아니, 도대체 이것도 못한다, 저것도 못한다. 이것도, 저것도 필요한 게 왜 이렇게 많아?"


물리치료 과정에서의 우리 첫째의 가능성은 매우 좋아 보였다. 하지만 그 이외의 모든 것들은 처음부터 해야 하기도 하거니와 뭔가 가능성이 잘 보이지 않았다. 두려웠지만 아이에게 필요한 것이기에 해야 했다.

아내는 또다시 복지관에 수업 관련하여 신청을 했고 대기해야 했다. 거의 7개월을 대기하고서 수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복지관으로부터 우리 집까지는 자동차로도 1시간 걸리는데 아내는 면허가 없었다. 대중교통으로 편도 2시간이 넘는 거리를, 또 아이를 아기띠에 매고 주 2회씩 왔다 갔다 했었다.

거리가 긴 만큼, 그만큼의 잔소리 공격은 늘어났다. 그래도 배려는 조금 더 받았지만 결코 왕복하기엔 너무나도 어려운 거리였다.


필요한 건? 아빠 육아휴직

때는 2015년이었다. 아내는 그렇게 열심히 왕복하다 보니 안 그래도 산후조리를 잘 못했는데 몸이 점점 망가져갔다. 그리고 출산휴가 3개월에 육아휴직 1년이 다 되어가서 복직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의 치료를 멈출 수 없었다. 아쉽게도 부모님 찬스를 활용할 수 없었다. 처갓집은 너무 멀었고, 장인어른과 장모님 두 분 다 조카들을 돌보다 무릎이 망가져 버렸다. 우리 부모님은 그나마 처갓집보다 가까운 거리에 계셨고 운전이 가능했지만 각자의 직업을 갖고 계셨다.


그리고 '우리 아이는 우리가 키운다'라는 지나친 신념으로 인해 독박 육아를 선택했기 때문에 흔히들 말하는

'부모님 찬스'를 사용하기 어려웠다.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 해결책이 하나 있었다. 바로 배우자, 아빠 육아휴직 제도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도 배우자 육아휴직 제도가 있었고, 넉넉지는 않지만 급여의 70~80%를, 150만 원이 넘지 않는 선에서 보장해주었다.


다만 사회에서 보는 시선, 아니 회사에서 보는 시선, 좀 더 자세하게는 팀원들과 팀장의 시선이었다.

사회에서는 배우자 육아휴직에 대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정직 육아휴직에 들어가는 아빠들은 5%조차도 안 되는 통계들이 나왔다. 왜냐고? 조직 구성원으로 들어가면 배우자 육아휴직만큼은 팀에게 단 1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당연히 시선이 고울 리 없다.


하지만 난 그 회사에서 그래도 5년은 넘게 근무를 해왔고, 대표님을 수행하면서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남자도 육아에 참여해야 한다'라는 지론에 힘입어 팀장에게 말했다.


팀장은 한창 딸 두 명을 키우는 워킹맘이었다. 그래서 그런 건지 오히려 쉽게 이해하고 적극 찬성해줬다. 팀원들 모두 결혼을 하지 않거나, 자녀가 없지만 역시나 적극 찬성해주었다. 문제는 의견이 위로 올라갈수록 확답보다는 안될 가능성에 대해 얘기를 했다.


"해줄 수 있어. 하지만 만약 안된다면..."


안된다면 뭐. 어떻게 할 건데. 우린 교육회사잖아.

당연히 교육에 대해 알아야 하고, 그러려면 지식과 정보도 필요하지만 체험하는 것은 더욱더 중요하다 생각해서 쉽게 결제가 떨어질 줄  알았던 내 기대와는 조금 달랐다. 예상보다 결제가 더디고, 또 안될 수도 있다 라는 말을 하는 임원들이 한탄스러웠다.


"여보, 안되면 어떡하지?"

아내는 쿨하게 대답했다.

"그만둬 그럼"


아내는 나보다 직급도 높고 연봉도 높은 외국계 기업에 근무했다. 업무 강도는 힘들지만 복지에 대한 부분은 매우 관대했다. 그렇기에 안되면 그만두라고 허가해줬다. 


시간이 지나고 육아휴직 결제가 떨어졌다. 대표님은 너무나도 쉽게 허락해줬지만 올라가기까지는 좀 순탄하지 않았다. 그래도 육아휴직을 받아냈고, 회사에서는 처음으로 배우자 육아휴직을 하게 되었다.


휴직 전 마지막 금요일에 팀 회식을 하며 11개월 후 복직할 때 책상 빼지 말아 달라며 농담 아닌 농담을 던진 후, 그렇게 난 휴직에 들어갔다.

6년간 쉼 없이 열심히 일했는데 겨우 11개월 육아휴직 들어간다고 긴장이 풀려버린 건지, 휴직 전날에는 몸살이 나서 하루를 꼬박 앓았었더랬다.


세금 받는 아이에서 세금 내는 아이로!

육아휴직을 시작으로 나 역시도 양육에 책임감을 갖고 아이를 양육하고 있다. 7년의 시간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의 삶 또한 그리 밝지는 않다. 아직도 한국사회에는 장애에 대한 편견, 사회적 제도, 불필요한 시선들, 인식개선을 위한 교육이 부족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좌절은 없다. 우리는 좌절하지 않고 더 열심히 아이를 양육할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첫째 아이를 세금 내는 아이로 키우고 싶은 것이다.


장애를 갖은 부모들의 커뮤니티들이 좀 더 활성화되었지만 여전히 아이를 키울 용기가 없어서 삶을 달리하는 부모와 아이들이 언론에 노출되지 않은 채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있다. 제도가 좀 더 보완됐으면, 의료적 서비스가 확대됐으면, 지원이 확대됐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여전히 크다. 그와 동시에 장애에 대한 인식개선이 너무나 필요하지만 개혁될 만큼의 변화는 없어서 그들의 삶이 안타깝다. 나 역시도, 아내 역시도 한순간에 긴장의 끈을 놓는다면 그들처럼 되지 않을까 두려움도 있다. 실제로 그런 마음을 잠깐잠깐 먹기도 한다. 그만큼 극단적 선택을 하기엔 장애인, 그 부모 모두 쉽게 노출되어 있다. 좀 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제도가 마련되었으면, 좀 더 언론에 부각되었다면 그들이 유명을 달리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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