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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의 출처

: 믿음과 불신이 공존하는 정보의 시대

by 한수

전 세계인을 모아 한 사람으로 만든다면, 그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믿을지도 모른다. 항간에 떠도는 온갖 얘기들이 귀기울일 대상이 된다. 모든 의견이 고려할 대상이 된다. 당연히 무언가 결정하기에 큰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신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그것은 사실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이 일은 잘 될 것이며 또한 안 될 것이다. 무엇이든 믿는다면 불신 또한 믿어야 한다. 옴짝달싹할 수조차 없다.


다행히도 사람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은 듯하다. 아무리 잘 믿는 사람도 방향성은 있다. 적어도 그것을 가지려 애쓴다. 때로는 방향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기도 하지만.


정보의 홍수. 적절한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정보는 계속 생산되고 있을 테니. 그래서인지 현대인은 항상 바쁘다. 바쁘려고 한다. 바빠야 할 것 같다. 정보가 홍수처럼 몰아친다는 말은 처리해야 할 것들이 산재해 있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온갖 매체에서 전하는 그것들을, 범인(凡人)인 우리는 피할 길이 없다.


온갖 정보들이 수시로 나의 오감을 파고든다. 아주 단순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그저 휴대폰에 알람이 뜨게끔만 하면 된다. 소리도 좋고 진동도 좋다. 아이콘 옆에 조그만 숫자 하나 붙이면 더욱 좋다. 통화나 문자를 하려고 휴대폰을 열었다가 그 숫자를 보게 될 것이고 순간 백지가 된 머릿속은 그 숫자를 없애는 것에 모든 역량을 집중할 것이다. 숫자를 다 없애면 인터넷에 접속한다. 포털이 띄워 놓았거나 포털에서 ‘밀고 있는’ 정보가 촤르르 보인다. 눈과 손의 협업이 시작된다. 스킵 스킵 스킵. 어느 광고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뭘 볼지 보고 있지.” 그렇게 ‘간단히’ 보는 데만 한 시간이 걸린다. 피곤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만 하고 싶다. 이 빡빡한 것들을 벗어나고 싶다.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달리 피할 곳은 없다. 어디로 가든 스마트폰이 빠지면 섭섭할 테니까. 물론 처리하지 않으면 될 일이다. 처리할 생각을 하지 않으면 끝난다. 하지만 사람이 어디 그런가. 들리는 것 보이는 것 닿는 것 모두를 ‘어떻게든’ 처리하고자 하는 게 사람이다.


문제는 더 있다. 그렇게 시간을 들여 보는 정보들이 과연 얼마나 믿을 만하냐는 것이다. 모두가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일 수는 없다. 하지만 분간할 길이 없다. 더 깊게 파고들 수 있는 경로도 모른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비슷한 것들을 모아 교차 검증이 필요하지만 사실 그럴 만한 시간도 없고 의지도 없다. 엄지손가락만 밀어 올리면 앞으로 내가 알아야 하는 (실은 알아야 할 것 같은) 정보들이 끝없이 대기하고 있음을 알고 있지 않은가. 나의 엄지는 늘 준비되어 있다.


받아들인 정보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희미해진다. 정보를 접하게 된 당시에 내가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기로 했는지조차 잊는다. 믿기로 했는지 믿지 않기로 했는지. 혹은 보류하기로 했는지. 그래서 종종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고 ‘그런 걸 본 것 같’다며 확실하지도 않은 말을 누군가에게 던진다. 동시에 나 자신에게 어떤 인상을 남긴다. 확실하지 않아도 긍정 혹은 부정의 느낌을 받게 된다. ‘제대로 기억나지는 않지만 내게 남은 느낌이 이러하니 분명 무언가 있었다’고 믿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퍼진다. 없었던 일이 있었던 것이 되고 있었던 일이 없었던 것이 된다. 거대한 무언가가 아주 작고 사소한 것으로 돼 버린다. 별개의 일이 연관된 것처럼 된다. 물론 상관 없다. 아니라면 사과하면 된다. 들켰어도 사과하면 된다. 별 탈 없을 것이다. 다들 그러고 있지만 잘 살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들 중 하나일 뿐이다.


하루 동안 나를 관통하는 것들 중 사실 그대로인 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래서,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불신이 가득하다. 이리저리 우르르 몰려가는 사람들은 사실 누군가를 또 무언가를 온전히 믿지 않는다. 어차피 믿고 안 믿고는 선택사항일 뿐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기에.


정보의 제작자는 심혈을 기울여야 마땅하다. 거짓이 진실처럼 포장되어 나갔다면 정정해야 한다. 하지만 정정하거나 사과한다한들 벌어진 일을 모두 바로잡을 수는 없다. 이전의 정보를 접한 모든 사람이 정정사항을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설사 보더라도 처음 받아들였던 정보를 뒤집지 않는 사람도 있을 테고. 결국 누군가는 처음의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물론 틀릴 수 있다. 자신조차 잘못된 정보를 받아들였을 수 있으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심 또 조심할 일이다. 실수를 이해한다 해서 실수를 방치하는 것까지 용서되는 것은 아니므로. 어쩌면 정보를 제작하는 사람에게 도덕적 의무감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일부러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고 정정하는 행위를 통해서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니까.


세상은 그리 정의롭지 않다. 어찌됐든 가장 중요한 건 나 자신의 안위일 테니 말이다. 세상이 멸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살고 싶을 테니까. 그래서 사회 전체의 방향성이 중요하다. 사회 구성원 간의 끈끈함이 아니다. 우리 사는 이곳에 누구나 지켜야 하는 보다 명확한 선이 있어야 한다. 모두를 경계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믿음은 가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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