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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자발적 미친 짓과 떠밀린 미친 짓

by 한수


결혼은 권장할 만하다.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생기는 거다. 내 얘기를 들어주고 등 긁어 줄 사람이 생기는 거다. 기쁘나 슬프나 괴로우나 즐거우나 내 옆을 지켜 줄 그런 한 사람이 생기는 거다. 이 얼마나 벅차고 아름다운 일인가!


하지만,

결혼은 정말 미친 짓이 분명하다. 평생을 한 사람과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만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한 사람의 방식에 맞춰 가야 하기 때문이다. 늘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인간으로서, 평생 동안 이런 일상에 순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상대방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더라도, 매일같이 그러고자 다짐해야 한다. 그래서 결혼은 무서운 것이다. 아니 ‘무거운’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건, 적어도 그러고자 의지를 가진다는 건, 삶의 거의 모든 것을 새로이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과 같다. 그러고 보면 제정신으로 결혼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당장의 그 애절하고 뜨거운 감정에 떠밀려 조금만 차분히 생각해 보아도 능히 가늠할 수 있을 수많은 변화와 변수를 감수하고 (혹은 가벼이 여기고) 결혼생활에 들어가는 커플들이 얼마나 많을지 상상이 안 간다.


많은 부모가 자식의 결혼을 바란다. 물론 그냥 ‘바람’ 정도가 아니다. 대부분 객관적이라고 생각할 그 지극히도 주관적인 ‘혼기’ 때까지 결혼하지 않은 (정말 ‘않은’ 건지는 모를 일이지만) 자식이 있다면 늘 초조해한다. 이 녀석에게 결혼 생각이 없는 건 아닐까 불안하다. 혹시 만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괜찮은 사람이 보이면 누구든 눈여겨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는 관공서의 공무원, 마트의 직원, 문화센터의 강사들도 알게 모르게 후보에 오른다. 그런 마음을 자식이 알게 되면 괜히 서로 얼굴 붉힐까 애써 숨기려고도 하지만, 그게 또 그렇게 잘 숨겨지는 건 아니다. 그 집에서 나고 자란 자식으로서 집안 분위기야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므로.


과거, 결혼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누군가는 처음 보는 상대와 결혼했다. 다른 누군가는 그다지 마음도 없는 사람과 결혼했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싫어도 결혼했다. 하지 않았을 때 받게 될 불이익과 주변의 시선이 어떤 것임을 익히 보아 왔기 때문이다. 지금이라고 다를까? 아니, 그렇지 않다. ‘결혼은 해야 할 것 같아서’ ‘혼기가 되어서’ ‘주변 사람이 이 사람은 괜찮다고 하기에’ ‘나만 결혼을 안 하고 있으면 뒤처지는 것 같아서’ ‘혼자 있는 건 부모님께 불효인 것 같아서’ 결혼한다.


이런 말이 나돈 적이 있다.

“애인이 집에 와서 밥도 해 먹고 즐겁게 놀았는데 밤이 되어도 집에 안 간다.”

물론 반은 농담이다. 그럼 나머지 반은?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이혼 건수가 매 해 약 10만 건이라고 한다. ‘이 사람이다!’ 싶어 결혼해도 헤어지는 일들이 적지 않다. 관계란 매우 복잡한 것이어서 아주 아주 작은 (것으로 보이는) 일로도 끊어지기 십상이다. 하물며 사회통념이 결혼의 이유였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까. 운이 좋아 서로 행복하게 된다면 다행이지만 혹여 그렇지 않았을 경우에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부모일까 친구일까 매스컴일까. 원인이 어디에 있건 그 충격을 고스란히 받고 책임을 져야 하는 건 나 자신이다.


그 누구도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그 누구도 선을 넘게 두어서는 안 된다. 나와 상대의 미래를 그들이 선택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한 순간의 미친 선택일지라도 그 버튼을 누르는 것은 오직 우리 둘의 의지여야 한다.


불행이자 다행인 소식이 하나 있다.

결혼(식)은 결혼생활의 시작일 뿐이다.

보다 나은 결혼생활도 ‘선택’할 수 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방문객’ - 정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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