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전자책에서 책 냄새가 난다면?

텍스트가 가진 힘에 대하여

by 한수

전자책에서도 책 냄새가 나면 어떨까?


전자책을 만들다가 문득 종이책의 냄새가 그리워질 때 상상해 보곤 해. 종이책의 냄새가 주는 감성이 있거든. 전자책에 그런 게 더해지면 사람들도 전자책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질지도 모르지. 물론 아닐 수도 있고. 그래 봐야 손에 잡히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책 냄새가 나면 좀 재밌을 것 같긴 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책 냄새를 맡으며 그 분위기에 푹 잠겨 본 적이 있을 거야. 특히 새 책을 펼칠 때 말야. 사실 새 책 냄새는 종이와 잉크, 접착제 등에서 난다는 걸 알고 있지? 그런데 왜 우리는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떠올리지 않고 뭔가 마음 벅찬(나만 그래?) 느낌을 받게 되는 걸까. 내 생각은 이래. 일단 그것이 ‘책’에서 나는 냄새라는 걸 뇌가 알아차리지. 그리고 자연스럽게 책 안에 있을 수많은 텍스트를 떠올리는 거야. 아직 읽지 않았음에도 뿌듯한 거야. ‘텍스트를 읽는다’는 행위는 뭔가 생산적이고 고귀하고 대단한 거라는 걸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거지. 어때, 그럴 듯하지?


아쉽게도 전자책에 코끝을 자극하는 냄새 따윈 없어. 소설이든 전문서든 그림책이든 손끝에 닿는 건 차가운 유리나 플라스틱 뿐이지. 그래서 처음엔 참 밋밋하게 느꼈던 것 같아. 책장에 꽂아 두고 흐뭇하게 바라볼 수도 없고 말야. (사실은 이게 책의 가장! 중요한 사용법인데 말이지.) 단 1그램의 무게도 없는 디지털 파일은 어딘가 조금 허전한 기분을 느끼게 해. 난 전자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다들 비슷했나 봐. 전자책은 생각보다 좀 더디게 발전하는 것 같더라고. 아마존에서 킨들(Kindle)이 출시된 게 2007년이라고 해. 이제는 전자책 전용 단말기도 꾸준히 나오고, 주요 유통사에서는 각자의 전자책 뷰어와 플랫폼을 만들었지. 그래도 여전히 종이책과 전자책의 비율은 확연히 차이가 나. 전자책이 빠른 시간 안에 종이책 시장을 잠식할 거라는 예상은 완전 빗나갔지. 모든 책이 전자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야. 다만 초기의 기대와 기술의 발전에 비해 성장 속도가 빠르지는 않은 것 같다는 말이지.


처음 전자책을 만들게 됐을 때 그다지 감흥은 없었어. 시대가 바뀌니까 어쩔 수 없는 거라고만 생각했지. (이제와 고백하는데, 나도 전자책을 보진 않았어. 전자책 제작을 시작할 때쯤에야 구독형 전자책을 끊었거든.) 그런데 epub을 만들다 보니 생각이 달라졌어. 종이책과 전자책은 그릇만 다를 뿐 결국 같다는 걸 깨달은 거지.


전자책과 종이책, 다르다고 생각해? @PetraSolajova


전자책을 만들 때도 종이책처럼 편집디자인을 구상해. 원고를 받으면 일단은 내용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살펴야 하지. 각각의 역할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함이야. 대제목인인지 중제목인지 소제목인지, 본문과 별도로 구성된 것인지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하는 거야. 그다음엔 각 역할을 어떤 형태로 보여줄지 결정해. 글자의 크기, 정렬 방법, 줄 간격, 위치, 테두리, 배경색 등의 설정이 여기에 속하는데, 그런 걸 구상하는 거지. 정말 고민을 많이 해. 이 편집디자인이 최선인지 곱씹게 되더라고. 보기 좋게 아니, 읽기 좋게 만드는 게 책을 만들 때 반드시 가져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하거든.


작업할 때 또 하나 유념해야 하는 건, 이건 전자책이라는 사실이야. 무슨 말이냐고? 우리가 접하는 텍스트 위주의 전자책은 보통 페이지가 고정되어 있지 않아. 리플로우 방식이라고 해서 독서 환경에 따라 유연하게 재배치되지. 전자책은 전용 단말기는 물론 휴대폰, 태블릿, 데스크탑에서도 볼 수 있잖아. 게다가 전자책 독자는 글자 크기, 여백, 행간, 배경색 등을 바꿀 수도 있어. 독서 환경의 변화 가능성을 어느 정도 고려해 작업해야 하는 이유야.


그날도 이 책을 어떻게 만들까 고민하고 있었어. 근데 그날따라 뭔가 다르게 보이는 거야. 전체가 아니라 부분 부분이 확대되어 보이기 시작했어.(걱정하지 마. 실제로 그런 건 아니야.) 글자 하나하나가 참 가지런하더라고. 그저 말이 되게 나열된 것 뿐인데도 정리된 느낌이 들었어. 내가 하는 작업의 궁극적인 목표는 ‘독자들이 잘 읽을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거라 생각하는데, 그 과정 중 상당 부분을 텍스트가 이미 수행하고 있던 거지. 존재 자체로 말이야. 글자가 모여 단어가 되고, 단어들이 모여 문장이, 또 문단이 되는 모습을 상상해 봐. 결국 한 권의 책을 이룬다는 전제로 문단을 보고 있으면 진짜 예뻐 보이기까지 하다니까.


너무 멀리 갔나? 뭐, 내가 느낀 걸 강요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조금만 더 얘기해 볼게.


글자 하나하나가 얼마나 정교하게 디자인되어 있는지 생각해 본 적 있어? 쉬운 일이 아닐 거야. 왜냐하면 우리는 글자라는 걸 아무 불편함 없이 사용하고 있으니까. 아래는 글꼴를 만드는 프로세스에 대해 설명한 어떤 글의 일부분이야.


… 글자의 표정 또한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데, 우선 구조적으로 네모틀로 할 것인지, 탈네모틀로 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해요. 그리고 탈네모틀이라면 기준선을 어디에 둘 것인지, 무게중심은 어디에 둘 것인지, 세리프를 넣을 것인지, 텍스츄어를 가미할 것인지 등등의 다양한 표현방법으로 서체의 성격을 만들게 되는 것이죠.

* 출처: https://www.yoondesign-m.com/117 [Yoondesign M:티스토리]


나눔고딕, 윤고딕, 배민체, 아리따체, 산돌명조, 서울남산체, 한겨레결체…. 무수히 많은 글꼴이 모두 그런 과정을 통해 탄생했다고 생각하면 신기하지 않아? 그래서 저마다 느낌이 다른 건가 봐.


비단 다른 글꼴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은 아니야. 한글책과 영어책을 비교해 봐. 읽을 필요는 없어. 그냥 모양을 보라고. 영어는 알파벳이 좌우로 길게 나열되고,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조합한 글자들이 나열되어 있어. 그래서 읽는 방식도 달라. 한글은 한 글자 한 글자 정해진 소리가 있어 그대로 읽어나가면 되지만 영어는 앞뒤 글자들을 한꺼번에 봐야 읽을 수 있지. 언어별 문자가 모두 특징이 있겠지만, 그중 한글은 유네스코가 ‘가장 과학적인 문자’로 꼽은 적도 있을 만큼 조형적으로 독특하다고 해. 한국 사람으로서 가끔은 우쭐할 수 있어서 좋아. 내가 글자를 자세히 보게 된 것도 너무나 잘 만든 문자이기 때문일까?


어릴 때 보았던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어. 대충 이런 거였어. 길이를 아주 정교하게 잴 수 있는 기술이 있다면 나무 막대 하나에도 엄청난 정보를 넣을 수 있다는 거야. 예를 들어 숫자 145에 ‘만나자’라는 의미를 부여했다고 가정해 볼게. 나무를 0.145cm의 길이로 잘라서 누군가에게 전달하면, 전달받은 사람이 나무의 길이를 정확히 재서 원하는 정보를 얻는 거야. 882를 ‘언덕’이라고 해 볼게. 그리고 0은 정보를 구분하는 숫자야. ‘언덕에서 만나자’는 말을 전하려면 나무를 0.8820145cm로 자르면 되겠지. 나무의 길이를 소수점 아래 무한대까지 정밀하게 자를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안에 정말 많은 정보를 넣을 수 있게 될 거야. 1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작은 조각 하나에 우주의 모든 정보를 담을 수도 있겠지.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하지만, 발상 참 대단하지 않아?


글자가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이 그와 같지는 않지만, 한편으로는 그에 버금가는 정보 전달 기능을 한다고 생각해. 어떤 조합, 어떤 모양, 어떤 배치가 일정한 의미를 담는다는 건 정말 어마어마한 일이야. 게다가 그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의 영향력은 곱절 이상이 되지. 100의 의미가 모이면 누군가에게는 200,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1000 이상의 영향을 끼치기도 해. 그게 글이고 그게 책이지.


종이책과 전자책은 다르냐고?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아. 둘 다 알맹이는 텍스트의 집합이잖아. 우리가 읽는 건 글자이지 책이 아니거든.


사실 전자책을 제작하며 책을 정독하기는 힘들어.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수도 없이 훑다 보면 어느 정도 윤곽은 나와. 무엇을 위해 책을 쓰기 시작했는지, 어떤 자세로 써내려갔는지, 이 사람의 삶은 어땠는지가 조금은 보이는 것 같더라고.


언젠가 기술이 더 발전해서 정말로 책 냄새 나는 단말기가 출시될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정말로 종이책과 같은 모양과 질감을 가진 전자책이 나올지도 모르지. 한 장 한 장 디지털화면이 되어 내가 보고 싶은 내용을 보여줄 수도 있는 거고. 하지만 상관없어. 성긴 혹은 촘촘한 글자들의 어우러짐,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와 감성이야말로 진짜 책 냄새의 근원일 테니까.


전자책을 만들 때 나는 늘 고민해. 어떻게 하면 ‘책 냄새’에 도움이 될까 하고.

keyword
작가의 이전글착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