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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함이 주는 삶의 의미

by 한수

사람은 오래 살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기대수명은 83.5세로 2000년 76세에 비해 7.5세, 1970년 62.3세에 비해 21.2세 늘었다. 기술의 발전이 한몫했지만 사람들이 욕망하지 않았다면 여기에 다다르지 못했을 것이다. 기대수명이 무한정 오르지는 않겠지만, 설령 100세, 200세가 되더라도 인간은 그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오래’가 ‘영원’으로 바뀌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론 매우 자연스럽다.


죽음을 상상해 본 적 있는가. 산불, 홍수 등 자연재해로 인한 죽음, 비행기와 자동차 사고, 병이나 노화로 인한 죽음까지. 살면서 수많은 타인의 죽음을 듣고 목격한다. 슬픈 일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 죽고 죽어가고 있다. 슬픈 일이다. 언젠가 어떤 형식으로든 벌어질 일이지만, 생명이 꺼진다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비통한 일이다. 노환으로 생을 마감했다 해도, 인간의 기대수명을 훨씬 넘게 살았다 해도, 사실상 호상이란 없다. 죽음이란 그런 것이다.


죽음은 두렵다. 세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혹여라도 죽음 이후가 있다 한들 미지의 세상을 환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 <인 타임>에서는 수명을 사고판다. 또 다른 영화 <겟 아웃>에서는 자신의 뇌를 건강한 몸에 이식해 삶을 연장한다. 실제 죽음을 앞에 둔 시점에 그런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거절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렇다면 죽음이 없는 삶은 행복할까? ‘영원’은 나에게 기쁨을 안겨 줄까? 장담할 수 없다. 죽지 않는 삶에서는 삶에 대한 소중함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보통 한정된 것이나 갖기 어려운 것을 얻었을 때 충만함을 느낀다. 오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얻은 그것은 얼마나 값진가. 반면 아무런 노력 없이 얻은 그것은 대접 받기 어렵다. ‘늘 곁에 있는 것’은 대부분 잊혀진다. 무한정 같은 수준으로 존재할 수 없음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영원’을 경험해 본 적이 없지만, 10년 혹은 1년, 어쩌면 1개월이라는 시간도 곁에 있는 것을 인식하지 않게 되기에 충분하다. 인간이 그렇게 바라는 생명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 중 누군가는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살았다.


병에 걸릴 일이 없다면, 늙지 않는다면, 죽지 않는다면 삶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존재한다한들 적어도 ‘산다’는 것이 소중해지는 일은 현저히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 삶은 무의미하다며 되려 자발적으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생길지도 모른다. 주제 사라마구는 그의 책 <죽음의 중지>에서 죽음 없는 세상을 그렸다. 그토록 피하고 싶은 ‘죽음’이 사라진다 해도 우리는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갈망하는 것을 채우고자 하는 건 자연스럽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부족함을 통해 소중함을 느낀다. 유한하기 때문에 더욱 귀하다. 더 이상 바랄 것 없다고 느낄 만큼 갖지 못할 것임을 알기에 조심스럽게 다루고 아끼는 것이다.


끝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실망과 동시에 의지의 불씨를 안겨 준다. 생의 유한함을 자각할 때 삶은 더욱 선명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을 욕망하기보다 매 순간을 온전히 마주하며 살아가야 한다. 주어진 시간 속에서 한 걸음씩 의미를 새겨 가는 것이 삶을 대하는 가장 바람직한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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