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총량의 법칙
햇살같이 맑을 수 있는 어린 시절을 도둑맞은 어른들 - 구김살이 너무 꼬깃꼬깃 접혀 난 그늘진 쓰디쓴 사람으로 자랐다는 우리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어린 시절에 상처가 집중적으로 쏠려있는 우리에겐 상처총량의 법칙이란 어드밴티지가 있습니다. 단순히 불행총량의 법칙이라기보단, 각자 내가 겪어야 하는 시행착오가 정해져 있다고 믿어요.
연구를 하다 보면 여러 번의 실패를 근거로 가설을 추론해 내듯, 상처들이 인생의 초반기에 밀도 있게 몰려있다면 그만큼 내가 뒤돌아보고 분석할 데이터가 남들보다 많아요. 우리 모두 살면서 상처를 안 받을 수는 없으니까. 남들보다 빠르고 많은 불행을 겪었다는 것은 그만큼 더 많은 자료를 더 빨리 모았단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행동했을 때 후회가 제일 깊고 얕았어. 어떤 누군가가 내 인생에 들어오게 된 이유가 뭘까? 난 어떤 상황들을 내 인생에 허락했으며 그 결정뒤엔 무슨 욕구가 심대하고 있었지?
그 안에서 패턴을 알아차리는 걸 포기하지 않는 한,
무력하게 주저앉지 않는 한,
우리에겐 남은 생을 훨씬 수월하게 보낼 수 있는 치트키를 만들어 낼 뒷받침이 이미 있습니다.
하지만 이른 상처의 농축의 치명적이고 슬픈 단점은 어린 시절에서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앗아진다는 것.
전 제가 어린 시절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많이 애도해 왔습니다 - 그중 하나는 배움의 즐거움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는 것이었어요.
아침마다 학교 가는 게 두려웠습니다. 꾀병도 많이 부렸어요. 선생님들의 핍박이던, 언어가 안 통하는 환경이던, 친구가 없는 외로움이던, 학교란 곳은 어릴 때부터 저에게 초조함에 언제라도 토할 것 같은 메스꺼움의 공간이었습니다. 그랬으니 공부가 눈에 들어왔을 리가 있나.
몇몇 년 전, 어느 정도 나 자신을 공부하고 내 과거를 되짚는 노력을 한 지 2년 차, 첫 번째 졸업작품심사를 앞둔 어느 밤이었어요. 심리철학과 유사과학을 기반으로 타로카드를 재구성하여 글을 쓰고 작품을 그려내는 것이 제 졸업작품이었는데 어찌어찌 흘러가다 심장의 자기장을 파헤치게 됐어요. 논문들을 읽을때마다 의대에서 공부한 지식들이 어렴풋이 떠오르다 사라졌다를 반복했고, 생각보다 많은 걸 잊어버려서 논문 하나를 읽을 때마다 열몇 번은 따로 검색을 해야 하는 고된 작업이 반복됐지만 새로운 걸 배워 머릿속 마인드맵에 하나하나 연결 짓는 게 너무 재밌었어요. 내게 실용적으론 별로 필요 없는 걸 공부하며 든 생각은 정말 미친 듯이 아쉽단 것이었습니다 - 지난 십몇년간 학생이란 신분이었을 때 배움의 재미를 깨닫지 못한 게, 내가 사실 뭔갈 배우는 걸 정말 진심으로 행복해 한단걸 알지 못한 게.
졸업을 몇 개월 앞두고 나서야 이걸 깨닫다니. 아쉽고, 슬프고, 아까웠습니다.
대상 없는 원망이 갈 곳을 잃고 맴돌다 나에게 꽂히려는 걸 품어줘야했어요.
학교란곳에, 선생님이란 인물들에게, 교우관계라는 것에 대한 너무 깊은 트라우마가 일찍 새겨졌던 어린 너는 교실에 들어가면 또 공개적으로 놀림당할까 몸이 떨었었고, 발표를 위한 그룹을 정할 때 혼자만 남겨질 것이 걱정되어 눈치 살피느라 수업내용은 눈에 들어오지 못했어. 두려움, 초조함, 과잉각성의 상태로 네 작은 머리는 이미 과부하가 걸려있었기에 더 이상 다른 무언가가 들어서지 못했던 건 당연한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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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현재 선생님입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참 보람됐고, 내가 날 되찾게 도와준 방법들을 글과 그림으로 올리는 건 뿌듯했지만 뭔가 틀에 갇힌 것 같았어요. 학생들의 "학생"이라는 신분이 부러웠고, 내가 쓰는 글들은 결국 오로지 나 혼자만의 성찰과 경험 속에서 나온 것이라 쓰면 쓸수록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듯해 답답했습니다. 더 도움이 되고 싶은데, 더 명확하게 전달하고 싶은데.
그래서 전 석사과정을 시작합니다! 미술을 전공하며 이 분야엔 더 이상 파고들고 싶은 게 없었고, 선생님이란 직업에서 배울 게 더 많을 것 같아서 석박사를 미뤄왔고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옳았어요. 어린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걸로 추정되는 학생들과 그들의 문제적인 행동들 - 그걸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 아이들에게서 내 어린 모습이 보이기에 도와주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는 마음. 모두 배움에 대한 갈망으로 자리 잡았거든요.
전 저를 되찾아낸 경험이 있고 그 방법들에 큰 열의와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이 경험들을 기반으로 좀 더 콘크리트 한 무언가를 빌드 업 하고 싶단 꿈이 생겼습니다. 체육시간은 영어로 PE, physical education입니다 - 신체 교육. 마찬가지로 마음을 돌볼 줄 아는 방법 역시 필수적으로 교육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Mind Education, ME?처럼. 정신질환, 트라우마에 대한 스티그마를 벗겨내고 "나"를 돌아보는 방법들은, 그 마음이 제일 말랑말랑 연약하고 가능성이 무한한 어린 시절 때 배울 수 있으면 개인적인 건강을 넘어 사회적인 선순환의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거야. 이런 생각을 하던 도중 "행동의학"(Behavioural Health)라는 석사과정을 찾았습니다. 인간의 건강은 사회적, 정신적, 육체적, 그리고 영적인 것들의 동시적 상호작용의 결과라는 가설을 기반하는 학제간연구필드 - 뭔가가 공부하고 싶어서 이렇게 안달 나긴 처음이었어요.
어렸을 때 놓친 것들은 언제든 채울 수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래서 전 학교라는 곳을 피하며 두려움에 떤 어린 저를 위해, 이번엔 정말 내가 공부하고 싶은 걸 공부하러 나 자신에게 석사과정을 선물합니다. 현실을 버텨내느라 놓친 배움의 즐거움을 이제 나 자신에게 줄 거예요. 낮엔 선생님으로, 저녁엔 다시 학생으로.
나를 사랑하는 방식은 언제나 그 모습이 바뀝니다. 아픔과 과잉각성 속에선 너무 많은 것이 우리를 스쳐갑니다. 그 나이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게 있단 게 있다고들 하지만 동의하지 않을래요. 순수함이던, 그 나이의 신분이건, 내가 놓친 것들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들이 아직 내 안에서 슬픔과 아쉬움으로 맴돈다면, 지금 그 경험을 하면 됩니다. 나이, 사회적인 기대와 역할에 포기하지 마세요.
상처 가득했던 어떤 시절 내가 놓친 것들이 있다면 너무 많이 슬퍼하지 않길 바랍니다. 빈 공간들을 다시 채울 기회는 계속 계속 찾아올 거예요. 내가 그걸 채우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한.
그러니까 우리의 삶은 무조건 행운입니다.
+ 지랄총량의 법칙을 따르면 골든 리트리버들을 보면 어렸을 때 모든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3살 때부턴 점잖고 똑똑한 우리가 아는 천사견이 된대욤. 우리네 인생은 골든 리트리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