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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 Jan 16. 2019

혜나는 그렇게 되어야만 했을까, <SKY 캐슬> 리뷰

'가치 있는' 교훈을 위해 표현은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가 

(※ 글의 특성상 <SKY 캐슬>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SKY 캐슬 공식 포스터. (출처 : JTBC SKY캐슬 공식 홈페이지)

  한 드라마가 한국 사회를 다 뒤집어 놓는 건 드라마를 접할 수 있는 매체가 다양해지면서 뜸해진 일이었다. 그러나 요즘, 매일매일 이 드라마 이야기로 떠들썩하다. 이 드라마는 바로 JTBC에서 매주 금, 토 11시에 방영 중인 <SKY 캐슬>(이하 스카이 캐슬)이다. 로맨스물, 수사물, 의학물도 아닌 입시물(?)인 이 드라마가 이렇게까지 성공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드라마의 인물소개란을 보는 것이 취미인 나는 스카이캐슬의 인물 소개란을 보면서도 배우들의 연기력이 쟁쟁한 만큼 재미는 있겠으나, 과연 인기를 끌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나는 어른들로 인해 아이들이 망쳐지는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다. 어른이 욕망하는 것을 감당해야만 하는 무기력한 아이들, 그리고 그에 만족하는 어른들을 보며 마치 고문당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굳이 마음이 불편한 드라마나 영화를 찾아보지는 않는 편이라, 스카이 캐슬이 인기몰이를 시작할 때도 클립만 찾아보다 14회가 되어서야 본방사수를 했다.

  그러나 14회, 15회를 보면서 내 마음은 아주 극도로 불편했다. 어른들로 인해 아이들이 망쳐지는 모습이 아주 노골적으로 나와서 그런 것도 있으나, 뭔가 한 가지 더 불편한 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떠오르지는 않았다.

  실체모를 불편함은 한 영화 평론가의 트윗을 보고 나서야 풀렸다. 나는 혜나의 죽음이, 그리고 혜나의 죽음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너무나 불편했던 것이다.

박우성 영화평론가 트윗 캡처.

  혜나가 어떻게 죽게 됐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자살일 수도, 타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른들의 욕망을 표현하는 방법 중에 왜 하필 아이의 죽음을 선택한 것일까. 그것도 욕망의 가장 큰 피해자라고도 할 수 있는 혜나를 말이다. 혜나에게는 주요 어른들의 욕망이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강준상, 곽미향, 김주영 이 세 사람이 각자가 추구하는 바를 얻기 위해 혜나는 희생 혹은 이용되었다.(물론 강준상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혜나도 원하는 바였으나, 김주영도 혜나를 예서의 '학습 도구'이자 자신의 욕망(가정의 파괴)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이를 추진했다.)

용의자로 아이들이 의심받자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모인 SKY캐슬의 주민들. (출처 : JTBC SKY 캐슬 공식 홈페이지)

  아마도, 작가는 이런 어른들의 욕망이 얼마나 추악한지를 보여 주기 위해 혜나의 죽음을 선택했을 것이다. 죽음 이후 스카이캐슬에 사는 어른들의 욕망은 더욱 가시화된다. 혜나의 죽음에 강준상의 결정(먼저 온 혜나 대신 병원장의 손자를 살린 것)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 용의자로 몰린 자신의 딸 세리에게 차민혁이 '가짜 하버드생'이기 때문에 더 의심받을 것이라며 비난하는 것, 강준상의 심복인 우양우가 혜나와 강준상의 관계로 인해 혜나와 예서가 싸웠다는 사실을 알고도 자신의 아내에게 숨기라고 말하는 것, '문제 해결'을 위해 모인 스카이캐슬의 어른들이 서로 의심하고 물어뜯으며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것 등 이 그 예시다. 혜나의 죽음 이후 스카이캐슬은 더욱 '재밌어'진 셈이다.

SKY 캐슬의 등장인물인 김혜나. (출처 : JTBC SKY캐슬 공식 홈페이지)

  그러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 너무나 가혹하고 잔인하다. 19살 아이의 추락, 그리고 그 추락 이후의 이야기가 모두. 제대로 인생을 꽃피워보지도 못한 채 자신의 아버지에게 '골칫거리'라는 모진 소리를 사망 당일 듣고 난 후 추락했으며,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방관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고, 죽음 후에도 제대로 추모하는 이가 없는 데다 사실상 거의 유일하게 추모했던 우주는 범인으로 지목된 상황이다. 여기서 교훈과 표현의 충돌이 발생한다. 표현 방식이 너무 가혹하고 잔인하다 하더라도 교훈이 정말 좋다면 이를 용납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드라마가 가지는 파급력이 크다는 점에서,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약자(아이, 청소년, 여성, 장애인 등)를 다룸에 있어서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현실 속에서 가혹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드라마에서까지 비극적인 삶을 부여해야 할까. 사이다가 주어지면 괜찮을 수도 있다. 그러나 <스카이 캐슬>에서 누가 혜나의 죽음에 대해 사이다를 줄 수 있겠는가. 혜나는 이미 죽었는데.


  지금까지 수많은 드라마, 영화, 연극, 뮤지컬에서 약자를 대상으로 한, 의미가 있지만 '굳이 이렇게까지?'라는 의문을 띄우게 만드는 장면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드라마와 영화에서야 모두가 잘 알 것이고,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에서도 만 8세 이상 관람 가능임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인 성폭행 장면이 나오는 것이 논란을 낳아 2018년부터 암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암시적인 표현도 내용 전개상 굳이 필요했는가, 그리고 수위가 적절한가에 대해서 비판받았다.

  약자를 향한 폭력이나 약자의 죽음을 나타내는 것이 내용을 풀어나갈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안다. 자극적인 탓에 시청자/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좋으며, 이후에 굉장히 다양한 이야기를 펼칠 수 있으므로. 따라서 지금 이 글처럼 '불편함'을 표현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또한 현실에서는 더 심한 일도 일어나는데 드라마라고 해서 왜 안 되냐고 의문을 가지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드라마니까, 더욱 안 될 일이다. 드라마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현실을 반영해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과 다르게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지 선택할 수 있다.(이는 꼭 드라마뿐만 아니라 모든 대중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말이다.) 아동폭력에 대한 영화를 찍는다 하더라도 최대한 자극적인 장면들을 피하면서 아동학대를 고발할 수 있는 것처럼(영화 미쓰백), SKY캐슬도 이래야 했다. 뛰어난 연기에, 뛰어난 내용에, 뛰어난 연출, 뛰어난 음악까지 모두 갖춰져 있음에도 이 드라마는 불편하고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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